1980년은 5.18 민주화운동과 함께 시작됐다

5월 21일 시위대 버스 강진도착 5.18 상황전개
강진읍교회 식사제공, 남도장 여관에서 숙식

강진읍 시외버스터미널 뒷편에 5.18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강진에는 옛 남도장 자리를 비롯한 7곳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항쟁당시 시위대들이 활동했던 곳이다.
1980년이 왔다. 70년대에서 80년대로 건너오는 길목은 국가적으로 다급함 그 자체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대통령이 시해된 이후 정국은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이였다. 수십년 군사독재정권이 무너지는 상황이었지만 국민들은 불안했다. 80년은 오고 그해 봄도 또 오고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봄이 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1980년 5월 18일 계엄령 10호가 발표되면서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 포고된다. 5월 17일 광주민주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윤기석 목사는 그의 회고록 ‘죽고자 하면 살고...’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을 ‘비상계엄하에서 일어난 광주학생들의 장거요, 의거였다. 광주의 빛나는 전통을 과시했다’고 평가했다.

19일에는 광주에서 군인들에 의해 일어나고 있는 만행들이 속속 강진으로 전해졌다.  21일 오후 광주를 빠져나온 시위대가 7,8대의 버스를 타고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면서 상황이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광주에서 무장하고 내려 온 청년과 학생들이 강진경찰서 총기를 탈환했다. 경찰은 도망가고 학생들이 난입해서 무기 20여점을 가져갔다. 강진청년들은 두 트럭에 분승해서 보성까지 갔다가 되돌아 오기도 했다.

시위대가 진입하자 경찰이 자진 철수하여 무력충돌은 없었으며, 이미 광주지역에서 발생한 일을 알고 있던 많은 군민들은 시위대를 열렬히 환영하면서 시위대열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22일 새벽 4시부터 공포탄이 발사되며 강진읍내 분위기가 삼엄했다. 강진읍교회측은 시위대에 밥을 제공하기로 하고 부인회를 동원해 아침밥을 마련했다. 쌀은 윤기명씨와 차기완씨등이 많이 내 놓았고 부족한 것은 각 가정을 방문해 한말 다섯되를 모았다. 밥을 포장할 비닐과 상자는 시내에서 상점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자진해서 가지고 왔다.

당시 담임목사였던 윤기석 목사는 자서전을 통해 시위대에 식사를 제공하는게 강진의 안보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시위대를 냉대하고 식사를 제공하지 않으면 총을 든 이들이 주민들을 상대로 어떤 일을 하게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다. 이들이 이성을 잃지 않도록 선도하는 방법이 이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일이였던 것이다.

시위대는 강진읍교회에 본부를 두고 여신도들이 지어준 밥을 먹고, 날이 저물면 강진읍교회와 남도장 여관에서 숙박을 하면서 버스터미널, 군청앞 등지에서 상당히 조직적인 시위 및 항쟁을 벌였다. 23일 새벽 1시에 전화가 왔다. 남도여관이었다. 광주에서 시위학생 80여명이 왔는데 배가 고프다고 아우성이라는 것이었다. 윤목사는 전화를 받은 후 교회에서 자고 있는 부인회원 2명을 데리고가 밥 120덩이를 나누어 주었다. 교회신도인 오연배씨와 차기완씨가 학생대표를 만나 협의했다. 상가에 다니면서 행패를 부리지 말 것과 총기를 들고 야외에 다니지 말 것을 제의했더니 학생대표가 순순히 합의를 해주었다.

그날 오전에는 군부대에서 전화가 왔다. 강진에 병력을 배치하겠다는 것이였다. 그렇게 될 경우 시위대와 군인들간에 총격전이 불가피한 일이였다. 윤목사는 그런일 만은 없어야 한다고 군부대를 설득했다. 강진에서는 절대 피를 흘리지 말자고 호소했다. 군부대측으로부터 먼저 발사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학생측 설득은 윤목사가 맡기로 했다. 그러나 다음날 부대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군인들을 배치하겠으니 현장으로 나와달라는 요청이었다. 현장에 나가보니 군인들이 도로 양편에 무장하고 강진읍으로 진입하고 있는 상황이였다. 일촉즉발의 순간이였다.

윤목사는 급히 학생들이 있는 남도여관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다행히 학생들이 후퇴하고 아무도 없는 상황이었다. 강진의 유혈충돌은 그렇게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23일 오후 강진농고(현, 전남생명과학고)생 500여명이 교복을 거꾸로 뒤집어 입고 “계엄철폐”, “민주회복”, “김대중 석방” 등의 구호를 외치며 자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한데 이어 지역청년들과 청년회의소 회원들이 가세하여 시위가 절정에 도달했다. 또 그날 오전에는 해남 우슬재에서 군인들과 시위대 사이에 총격전이 발생해 일부 시위대 부상자들이 강진에 있는 도립병원으로 이송돼와 치료를 받은 적도 있다.

강진에서는 강진농고생들의 시위로 교장이 곤욕을 치른다. 그러나 강진에서의 시위는 상당히 격렬한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쟁과 관련한 구속자가 거의 없다. 교회와 지역사회가 나서서 시위대를 안정적으로 지원한 결과 직접적인 무력충돌이 없었던 까닭이다. 시민군에 합류한 강진청년들이 장흥, 보성 등으로 진출하면서 강진은 24일 경 시위가 종료된다.

5월 27일 새벽 2시를 기해 계엄군이 광주를 완전히 장악했다. 강진에 일부 남아 있던 시민군은 완전히 철수하고 강진에서도 경찰이 활동을 재개했다. 학생의거도 그렇게 막을 내렸다. 당시 일반 주민들은 어떻게 5.18을 보냈을까. 수필가 김성한선생이 지난 2011년 지역신문에 기고한 ‘내가 겪은 5.18 광주 민주화항쟁’이란 글을 보면 주민들의 고민이 고스란히 보인다. 

‘나는 그날 광주에 있는 사람들이 시골로 내려온다는데 마량에서 버스에 올랐다. 광주를 가려고. 그러나 그것은 생각뿐이었던지 아니면 함께 술을 마셨던 재정형의 완력에 의해서였던지 면소재지가 있는 집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이끌려 내렸다. 그때 쉴새없이 내 머리를 휘젓는 것은 ‘무고한 광주시민은 다 죽어 가는데 나는 비겁하게 이렇게 수수방관하고 있어야 하는가’ 하는 자괴감이었다.

대구단위농협건물 옆의 자주 들리는 조그만 술집으로 들어갔다. 술집 뒷마당에서 몇 사람이 윷을 놀고 있었다. 그들이 방관자들인지 광주의 진실이나 어떤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인지는 모른다. 나는 고함을 질렀다.

“야 이 새끼들아! 이 짐승만도 못한 자식들아!” 라고. 그리고 덕석(윷판)을 걷어차며 처마 밑에 쌓아둔 장작개비 하나를 들어 사정없이 휘둘러 댔다. 그들은 피해버렸다. (뒤에 들은 얘기인데 그때 내 눈엔 핏발이 서 있더란다.)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마을 앞 농로 길을 가는데 안면이 있는 중학교 선생이 아이를 업은 부인과 쌀자루 하나를 들쳐 메고 걸어갔다. 괜히 속이 끓어 올랐다. “그래, 먹고는 살아야지. 이 나라의 민주가 죽어가고, 정의는 짓밟혀도 내 알바 아니지. 광주시민이 다 죽어가도 나는 먹고 배딱지 불리고 살아야지…” 넋두리처럼 이죽거려도 그들은 그냥 묵묵부답 걸어갔다.’

김성한 선생의 글 속에는 역사의 전환점에서 이러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등했던 일반인들의 마음이 잘 표현돼 있다. 아마도 당시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강진군에는 총 7곳의 5.18민중항쟁 사적지가 있다. 사적지에는 기념 표지석이 설치돼 그때를 기념하고 역사적인 장소로 보존하고 있다. 강진에는 강진버스여객터미널, 강진청년회의소, 강진의료원, 강진군청, 강진읍교회, 전남생명과학고(옛 강진농고), 남도장(옛 남도장여관) 등 7곳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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