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창야화‘안개낀 여수항’여수 주민들 항의로 중간에 종영

‘강진갈갈이 사건’강진주민들 아무런 항의 안해
오히려 강진 사람들이 더 빠져들기도
 

법창야화 단행본에 게재된 삽화들의 모습이다.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장면들이 많다.
1974년 4월 첫 방송을 탔던 법창야화의 기획의미는 밝은 사회건설과 인간성 회복이였다. 법창야화는 첫 방송을 시작으로 6년반 동안 47화를 내보내며 2천15회라는 기록적인 방송역사를 만들었다.

법창야화는 47화가 방송되는 동안 ‘밝은사회 건설과 인간성 회복’이라는 긍정적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다. 76년 방영된 19화 ‘천사와 사형수’에서는 살인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대구교도소에서 수감중인 한 사형수를 무기수로 감형시키는 막강한 파워를 행사하기도 한다.

노모가 아들을 위해 교도소 바로 옆에 움막을 짓고 생활하는 모습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켜 각 종교계와 정계등에서 그 사형수를 감형해야 한다는 동정론이 불같이 번졌다. 재판부도 감복해 그 사형수는 무기수로 감형된다. 또 18년 후에는 가석방으로 세상에 발을 디뎠다.

모두 법창야화 덕분이였다. 당시 법창야화 드라마를 통해 유명해진 사람이 재소자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삼중스님이다. 또 78년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교도소에서 역시 살인죄로 수감중이던 이철수씨사연을 담은 ‘내고향으로 날 보내주’를 방송했다.

작가 최풍씨가 15일간 미국에서 체류하며 현지를 취재했다고 한다. 법창야화는 3개월 동안 억울한 교포청년의 울부짖음과 그를 구하려는 재미교포들의 동포애를 감동적으로 그렸다. 재미교포들이 불같이 일어나 구명운동을 벌였다. 이철수씨는 79년 2월 샌프란시스코법원으로부터 구속정지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그 역시 법창야화가 큰 역할을 한 사건이였다.  

한편으로 법창야화는 현지 주민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지금도 여수하면 밀수꾼들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도 모두 법창야화 덕분이다. 법창야화는 77년 10월들어 ‘안개낀 여수항’이란 소재를 방송했다. 여수가 밀수와 치정, 음모의 도시로 묘사됐다.

주민들이 방송국에 항의하고 난리가 났다. 여수시민들은 “사회공익을 위한다는 명분은 이해하지만 너무나 흥미본위로 다뤄 청취자들이 여수와 여수시민들을 모욕적으로 볼 위험이 뒤따르고 있다”며 방송을 중단해 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동아일보 77년 10월 22일 기사>

또 절에서 고시공부를 하고 있던 한 여수시민이 지방신문에 항의광고를 하는등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자 MBC측은 당초 60회 분량이던 문제의 드라마를 40회로 종방해야 했다.

1939년 사건의 무대였던 군동면의 한 마을 주변 산이다.
그때도 여수시민들은 “여수의 이미지가 ×되부렀다”고 한탄을 했다고 한다. 한 지역신문의 칼럼에서 “77년 법창야화로 먹칠을 당한 여수의 이미지가 여수엑스포 때문에 간신히 씻어졌다”는 표현을 하기도 했다.

그만큼 법창야화 내용이 그 지역에 끼친 영향이 컸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안개낀 여수항’ 보다 치정과 음모가 훨씬 악날하게 묘사된게 제1화 ‘강진갈갈이 사건’이었다. 그나마 안개낀 여수항은 70년대 벌어졌던 사건이 주를 이루었지만 강진갈갈이 사건은 1939년도에 일어났던 사건이여서 강진군민들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도 정확한 사건기록도 없이 작가 최풍씨가 사건 30년후 주민 1명의 기억을 기초로 해서 작화한 것이었다. 억울해도 너무나 억울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강진사람들은 어디에 항의 한마디 할 줄 몰랐다.

70년대 초반만 해도 농촌 주민들이 방송국에 항의를 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때였다. 대신 강진 주민들 스스로가 법창야화에 빠져 들었다. 라디오도 귀했던 시절, 그 기계에서 강진과 관련된 드라마가 나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저녁 10시가 되면 전국의 거리가 조용해 졌다. 강진은 더 조용해 졌다. 주민들은 마을회관에서 각 가정으로 유선으로 연결된 스피커에서 잡음과 함께 흘러나오는 법창야화를 귀가 뚫어지도록 듣고 또 들었다.

그러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야 정말 나쁜 놈이구나. 진짜 잔인한 놈이구나”. 그런 생각을 한 사람들은 강진주민들 뿐이 아니었다. 전국에서 ‘강진갈갈이 사건’이 대히트를 쳤다. “야 정말 잔인한 사건이였구나. 강진에서 정말 갈갈이사건이 일어났었구나”

강진갈갈이 사건이 방송되자 그 반향이 엄청났다. 전국이 갈갈이사건 열풍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 사건이 60년대 후반이나 70년대 초반 사건으로 알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당시 청취율이 60% 이상이였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우리나라 사람 10사람 중 6명 이상이 강진갈갈이 사건을 열광적으로 청취한 것이다. 그 정도면 요즘 TV 오락프로그램이나 인기 연속극이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이다.

사건 관계자들 후손들도 모두 고향 떠나고
강진 사람들은 물론 출향인들도 상처투성이
올해로 방송 41년째, 사실과 다른 허구투성이

그렇게 심어진게 ‘강진= 갈갈이 사건’이였다. 강진갈갈이 사건이 방송되기 전 사람들은 강진이란 지명 자체를 처음 접한 사람들이 많았다. 요즘에야 각종 매체가 발달돼 전국 군단위 지명과 위치를 어느정도 파악하지만 당시는 경상도의 군위군이나 충청도의 괴산군 같은 곳은 강진사람들에게 이름도 처음 들어본 것 처럼 여겨지던 시대였다.

그러다가 강진갈갈이 방송이 대 히트를 치면서 강진이 일약 관심지역으로 떠올랐다. 그 때는 청자도 없을 때고 다산 정약용 선생도 모를 때였다. 70년대 후반 부산으로 취직을 나갔던 어느 주민의 경험이다.

“공장에 출근했는데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요. 그냥 이상할거 없이 강진이라고 했죠. 그랬더니 옆의 한 사람이 아~ 갈갈이 사건 그래요. 그러더니 주변사람들도 피식 웃으며 다 알고 있다며 고개를 끄떡거리더군요. 범인이 정말 깨알에 글씨를 쓰는 사람이였냐, 은순이가 그렇게 예뻤느냐하며 별의별 것을 다 물어요. 사람들이 갈갈이 사건에 대해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경험은 한두사람이 한게 아니다. 70, 80년대 외지에서 살거나 새로 진출했던 강진사람들이 한결같이 갈갈이 사건에 연루되어야 했다.

서울의 한 주민은 “80년대 초반에 서울에 올라갔는데 강진이 어디있는지는 몰라도 갈갈이 사건은 다 알고 있어요. 많이 화가 났습니다” 서울의 또 다른 주민은 “지금도 강진이 어디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해남 옆이라고 이야기 하면 고개를 끄떡인다.

그러나 아주 젊은 사람들도 갈갈이 사건을 알고 있는 것을 볼 때 깜짝 놀라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70년대 초반 법창야화 1화 강진갈갈이 사건을 직접 듣지 않은 세대들도 이런저런 구전을 통해 강진갈갈이 사건을 알고 있는 것이다. 지난 세월 강진사람들은 큰 상처를 입어야 했다.

법창야화의 포탄이 직접적으로 떨어진 곳은 강진에 살고 있던 후손들이었다. 강진읍에서는 사건당사자들의 후손들이 장사를 하거나 혹은 식당을 하며 살고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지 30년이 지났기 때문에 그 후손들은 자신의 조상들이 그런 사건에 관계됐는지 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다가 법창야화가 일대 사건이 되면서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모아지는 것을 느꼈다. 결국 후손들은 강진에서 살지 못하고 고향을 떠났다. 범인이었던 고재웅(가명)의 직계후손은 현재 광주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법창야화 제1화 강진갈갈이 사건 방송사건은 방송이 끝난지 4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흐르고 있는 역사다. 그 사건은 1939년의 일이였으므로 장장 70년 동안 대한민국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건이었다.

강진갈갈이 사건은 이제 강진사람들과 전국민의 기억 속에서 떠날때가 됐다. 사건 자체가 과장되게 묘사돼 필요 이상으로 강진의 이미지를 망쳤다. 강진갈갈이 사건은 이제 영원히 사라지는 역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 사건에 ‘강진갈갈이 사건’이라는 이름을 붙혀 법창야화 제1화로 방송한 것 자체가 큰 사건일 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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