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이면서 강진역사에 족적을 남긴 사람들

‘강진인물 소사전’오기호, 허림, 김병국 등 소개
2014년 2015년‘강진인물사 1, 2권’발행

강진일보는 지난해 4월부터 ‘강진인물 소사전’이라는 코너를 통해 13명의 인물을 소개했다. 그동안 ‘강진인물사’란 코너를 통해 신문 전면을 차지하는 양으로 5회 이상을 연재 하던 것과는 달리 비교적 지면을 좁게 해서 짧은 양의 원고로 작성된 기사들이었다.
 
이는 사람의 중요성이 낮아서 그런게 아니라 구할수 있는 자료들이 적어서 불가피하게 원고량을 적게 한 경우였다. ‘강진인물 소사전’ 13명을 연재 한 후 다시 ‘강진인물사’라는 기획연재물로 들어가 다시 현구 김현구선생 대선제분 박세정 회장과 시인 김현구 시인을 연재했다. 현재는 강진출신의 나주 고막원교회 김병균 목사의 집필로 ‘내가 본 강진의 사람들’이 연재되고 있다.

지금까지 강진일보를 통해 연재된 ‘강진인물’은 총 28명에 이른다. 강진일보를 통해 연재된 인물들은 강진 출신이면서 한국근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사람들로 모두 고인이 된 사람들이다.

‘강진인물 소사전’을 통해 소개된 사람들도 강진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사람들이다. 손암 오기호(1865~1916)는 을사오적 암살 시도하다 실패한 유명한 독립운동가이다. 군동 덕천리에서 태어났다. 화가인 허림(1917~1942)은 미산 허형선생의 막내아들이자 남농 허건화백의 막내동생인데 1917년 병영에서 태어났다.
 
진도군 의신면 서천리, 그러니까 지금의 운림산방이 있는 곳에서 살았던 미산의 가족들은 생활이 갈수록 어려워지자 1912년 병영으로 이사를 온다. 남농선생이 5살때의 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병영은 상인들이 많아서 전남 지역에서 가장 큰 번화가 중의 하나였다. 병영에 가면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이 가난한 예술가의 집안은 진도에서 강진으로 이주를 선택했던 것이다.

허림은 미산의 가족이 병영으로 이사 온지 5년 후인 1917년 태어났다. 허건은 1922년인 15세 때 병영의 세류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지금의 병영초등학교 전신이다. 그러나 그 해 미산선생은 가족들을 데리고 다시 목포로 이사를 갔다. 허림의 나이 5살때였다. 그러니까, 병영에서 태어난 허림선생은 이곳에서 초등학교도 다니기 전에 부모의 등에 업혀 목포로 갔던 것이다.

김병국 전 서강대학교 학장은 60·70 한국 경제학계의 태두로 서강학파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강진읍 동성리 집을 천주교광주대교구에 희사해 수녀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정년 후 미국으로 건너가 2011년 미국에서 사망했다. 북한 계관시인 오영재(1935~2011)는 원래 장성에서 태어났으나 군동 화방마을에서 11세때부터 살았다. ‘늙지 마시라 어머니여~’란 유명한 시를 지은 시인이다. 화방마을이 제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강진농고 3학년 때 의용군에 입대해 북한으로 넘어간 것으로 전해진다.

박기환 선생(1933~1995)선생은 70년 80년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이다. 통일주체대의원과 대한곡물협회장등 맡아 활동했고 군동중학교를 설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3.1운동기념탑등 지역에 기념비적인 일을 하는데 앞장섰다.

김영렬 화백(1923~2003)은 강진에서 태어나 강진에서 살며 강진만 그리다 떠난 화가이다.  강진만 풍경등 유화 수백여점 남겼으며 27년동안 성요셉여고에서 제자들을 교육했다. 효암 차부진(1901~1994) 선생은 강진의 근현대사를 가장 첨예하게 살았던 사람이다. 군청과장과 건준활동, 도의회부의장, 강진군번영회장등을 역임했으며 강진의 문화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등 문화강진의 초석을 놓았다.

신전들노래 이만동 선생(1924~2004) 은 토종 소리꾼으로 강진들노래라는 토종 노래를 되살렸다, ‘강진사람들이 흥얼거리던 소리’를 전승했으며, 입으로 전해오던 신전들노래를 도문화재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다. 명고수 청암 김성권 선생(1943~2008)은 북으로 세상과 소통한 영원한 고수였다. 칠량 벽송마을 출신이며 국창 김채만 선생의 종손이기도 하다. 199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9호 판소리고법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낙천 윤재찬(樂泉 尹在瓚 1902~1998)선생은 평생 다산을 위해 살다간 사람이다. 오랫동안 역사속에 묻혀 있던 다산선생의 유적을 복원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김기삼 전 조선대학교 총장(1938~1999)은 옴천 좌척마을 출신으로 종합대학교 총장에 올랐던 사람이다.

김영 전 강진군번영회장(1920~2012)은 강진의 운수업계를 이끌었던 기업가로 2, 3대 강진읍의원을 지냈으며 강진군 의용소방대장 15년, 번영회장 12년 맡아 활동했다. 이형희 전 문화원장(1919~2011)은 1973년부터 23년간 문화원장을 역임했던 강진문화계의 산증인이었다. 역도에 관심이 많아 국가대표 전지훈련팀을 유치하기도 했다.

박세정 회장 ‘행상에서 시작해 국내 최대 종합 곡분회사 설립’
허   림 화백 ‘미산 허형선생의 아들, 병영에서 출생’
오영재 시인 ‘장성출신이지만 군동 화방이 제2의 고향’

박세정 회장(1917~2001)은 작천 구상마을 출신으로 행상부터 시작해 대선제분이라는 우리나라 최대 곡분회사를 일으킨 인물이다. 현구 김현구 선생은 영랑 김윤식 선생과 함께 강진을 대표하는 서정시인이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인물이다.

강진일보는 2014년에는 ‘강진인물사 1’를, 2015년에는 ‘강진인물사 2’를 각각 발간했다. ‘강진인물사 1’에는 한양까지 자기땅만 밟고 갔을 정도로 큰 부자였던 김충식 선생(1889∼1953), 비운의 공산주의자였던 윤순달 선생(1914∼?), 유신독재에 항거했던 윤기석 목사(1931∼1997), 가야금 명인 함동정월(1917∼1994), 서울지하철공사 사장을 역임한 김재명 장군(1931∼2006), 5.18 마지막 수배자이면서 평생 야인으로 살았던 윤한봉 선생(1947∼2007) 등이 책속에 담겨 있다.

강진인물사 2에는 국회의원 신분으로 아시아경기에서 역도 은메달을 딴 황호동(1936∼2010), 만성적인 홍수에 시달렸던 탐진강의 호안 공사를 마무리한 차종채(1890∼1960), 옹기 배를 타고 제주 부산 울산을 다녔던 김우식(1924∼2010), 국내 최초로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아남산업 김향수 회장(1912∼2003), 북한에서 인민군최고사령관과 외무상등을 지낸 남일(1913∼1976), 해방 후 한국불교 정화운동의 선구자 금오스님(1896∼1968) 등이 실려 있다. 모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들로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집약한 인물들로 평가 받은 사람들이다.

병영면 출신의 금오스님은 해방 후 한국불교의 정화를 주도했던 조계종 대표 선승으로 오늘날 한국불교의 변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이정표가 되고 있는 인물이다. 금오스님의 직계 제자들이 주축이 된 금오문중은 법주사와 불국사, 금산사, 수덕사등에서 공부하면서 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의 2대 문중으로 꼽히고 있다. <강진일보>는 2016년에도 강진의 인물를 지속적으로 발굴해 연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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