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식시대 8년간 철옹성… 88년 황색바람 김영진시대 열어

80년대에 국회의원 선거 세차례
전두환 육사동기 김식 국회의원 승승장구

좌측은 김대중 평민당 총재가 13대 총선 기간인 88년 4월 초 완도에서 열린 정당연설회에 참석, 김영진 후보 지원유세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우측사진은 민정당 노태우 대표위원이 1985년 3월 12일 광주를 방문, 신양파크호텔에서 열린 민정당 전남지부 환영리셉션에 참석해 당직자 및 지구당 위원장들과 함께 건배하며 환담하고 있다.
80년대에는 세 번의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제11대 국회(1981.4.11 ~ 1985.4.10) 제12대 국회(1985.4.11 ~ 1988.5.29), 제13대 국회(1988.5.30 ~ 1992.5.29)의원 선거가 있었다.

제11대 국회의원 선거는 1981년 3월 25일 실시됐다. 1979년 ‘10․26 사건’ 이후 11대 총선까지 1년 5개월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큰 정치적 격변기였다.

전남 제9선거구(장흥․강진․영암․완도)에서 입후보한 후보는 10대 총선 때와 같이 모두 7명이었다. 이 가운데 정당후보는 백정기(白正基․51, 한국국민당) ․ 유재희(柳在熙․46, 민주한국당) ․ 이정채(李正彩․32, 원일민립당) ․ 송춘호(宋春浩․46, 신정당) ․ 김윤봉(金潤奉․39, 민권당) ․ 김식(金湜․48, 민주정의당)후보 등 6명이었다. 무소속 후보는 이영권(李永權․45) 후보 1명뿐.

후보들은 4개 군에서 모두 출마했다. 백정기․이영권 후보는 장흥 출신이었고, 김식․김윤봉 후보는 강진 출신, 송춘호․이정채 후보는 완도 출신, 그리고 유재희 후보는 영암 출신이었다. 

선거전은 여야 대결 및 소지역 대결 양상으로 진행됐다. 선거쟁점은 여야 간 공명선거 논쟁, 여당의 안정론과 야당의 견제론, 관권선거 시비 등이었고, 민한당과 국민당 등 야당은 선명성 경쟁을 벌였다.

선거운동 초반에는 5공화국 주도세력인 김식 후보(육사 11기, 소장 예편)와 백정기 후보(육사 8기, 준장 예편)의 동반 당선이 점쳐지면서, 누가 금메달로 획득하느냐가 관심사였다.

그러나 선거운동이 중반에 들어서면서 4파전으로 흘렀다.  전국웅변협회 이사장인 유재희 민한당 후보와 광운대 교수인 이영권 후보가 야성향 표와 지역표를 확보하면서 맹추격, 4명의 후보가 치열하게 혼전을 벌였다. 선거 결과, 김식 후보와 유재희 후보가 동반 당선됐다.

(좌측부터) 11대 김식·유재희의원, 12대 김식·이영권의원, 13대 김영진 의원이다.
김식 후보는 유효 투표수(18만8천299표)의 39.43%인 7만4천256표를 얻어 1위를 차지했고, 유재희 후보는 3만4천89표(18.1%)를 얻어 2위로 금배지를 달았다. 백정기 후보는 2위 보다 2천770표가 적은 3만1천319표를 득표해 3위에 그쳤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이영권 후보는 4위로 낙선했지만 2만5천449표(13.51%)를 얻어 성장가능성을 보여줬다.

‘2․12총선’으로 더 알려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는 1985년 2월 12일 실시됐다. 전남 제9선거구(장흥․강진․영암․완도)에서 금배지에 도전한 후보는 모두 4명. 이들은 김식(金湜․52, 민정당, 강진) ․ 윤재명(尹在明․54, 국민당, 강진), 유재희(柳在熙․50, 민한당, 영암) ․ 이영권(李永權․49, 신민당, 장흥) 후보 등이었다. 완도 출신 후보는 없었다.

선거전은 소지역 대결과 함께 여당의 ‘정치 안정론’과 야당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론’, 그리고 후보들 간 감정문제까지 섞이면서 치열한 4파전으로 전개됐다. 현역 의원인 김식 후보와 유재희 후보는 정치규제에서 풀려난 3선의 윤재명 후보를 가장 강력한 상대로 판단, 집중 견제했다.

88년 총선 김영진 후보 3만5천65표 득표
2위는 2만7천925표 얻은 이선동 후보
김식 후보는2만2천305표로 3위에 그쳐


두 후보는 “수작부리는 사람”으로 윤재명 후보를 몰아붙였고, 이에 대해 윤 후보는 “정치에 미숙한 사람들”이라고 두 후보를 반격하는 등 공방을 벌였다. 합동유세 때, 유재희․이영권 후보는 여당후보인 김식 후보를 공격하기보다는 윤재명 후보를 더 공격했다. 유 후보와 이 후보도 선명성 경쟁에서는 서로 난타전을 벌였다. 

4선에 도전하는 윤재명 후보는 김식 후보가 윤씨 성을 가진 경찰관 2명의 인사에 관여했다고 비난했고, 김 후보는 “파면될 뻔한 사람을 살려놨다”고 해명하는 등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와함께 후보들은 저마다 완도와의 인연을 동원해 후보가 없는 완도표 공략에도 집중했다.

유재희 후보는 “강진에서만 두 사람을 보낼 수 있느냐”며 출신지인 영암표의 결속을 유도했고, 이영권 후보는 서울과 달리 미미한 신당돌풍에 기대하지 않고 오로지 저인망식 주민접촉으로 표밭갈이를 했다. 선거 결과, 김식 후보와 이영권 후보가 금메달과 은메달을 차지해 국회입성에 성공했다. 김 후보의 낙승은 예상됐지만, 조직력․자금력에서 뒤졌던 이영권 후보의 2위 당선은 다소 의외였다. 

김식 후보는 유효투표수 19만2천309표의 49.43%인 9만5천55표를 얻어 1위, 재선에 성공했다. 두 번째 금배지에 도전한 이영권 후보는 유효투표수의 23.63%인 4만5천447표를 획득, 2위로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윤재명 후보는 13.53%인 2만6천22표를 득표해 3위에 머물렀고, 현역의원인 유재희 후보는 13.41%인 2만4천785표를 얻는데 그쳐 4위를 기록했다. 친구사이인 이영권 후보와 유재희 후보는 11대 총선부터 맞붙어 1승1패를 기록했다.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는 1988년 4월 26일 실시됐다. 평민당의 ‘황색바람’은 호남에서 위력을 더해 ‘황색돌풍’으로 변했다. 평민당은 광주와 전남․북 등 호남지역(37명 중 36명)을 휩쓸었다. 평민당은 한화갑 후보가 후보등록무효가 되자, ‘총선 후 입당’을 조건으로 한겨레민주당 박형오 후보를 지원해 당선시켰다. 이로써 평민당은 사실상 호남지역 전 의석을 석권했다.

13대 총선 실시에 앞서 강진의 선거구가 변경됐다. 강진은 12대 총선까지만 해도 전남 제9선거구(장흥․강진․영암․완도)였으나, 13대 총선부터는 장흥과 영암이 분리됐다. 그리고 완도군과 한 선거구가 됐다. 선거구 명칭도 <강진․완도 선거구>로 변경됐다.

강진․완도 선거구에서 13대 총선에 출마한 후보는 김식(金湜․55, 민정당) ․ 김석영(金錫英․41, 민주당) ․ 김영진(金泳鎭․42, 평민당) ․ 이선동(李先東․56, 무소속) 후보 등 모두 4명이었다. 김식․김석영․김영진 후보는 강진 출신이었고, 이선동 후보는 완도출신.

선거전은 3파전으로 진행됐다. 김식 후보의 3선 여부와 김영진 후보의 첫 국회 입성 여부, 이선동 후보의 완도지역 표 결집 여부에 관심이 쏠렸다. 특히 김영진 후보가 황색돌풍에 편승, 무난하게 당선될지 여부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 이유는 노태우 대통령․전두환 전 대통령과 육사동기이며, 재선의원을 지낸 김식 후보가 조직이 탄탄한데 비해 김영진 후보의 경우 문동환 목사 등과 함께 ‘평민연’ 일원으로 평민당에 입당한 정치신인이었기 때문. 이와 함께 유일한 완도출신 후보인 무소속 이선동 후보가 ‘완도당’ 기치를 내걸고 선전을 하고 있었던 것도 언론으로부터 ‘관심지역’으로 분류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폐지된 후보합동연설회 전경 한 토막을 통해 당시를 회상할 수 있다. 선거일 이틀 전인 4월 24일 강진 장날에 마지막 합동연설회가 열렸다. 이날 오후 2시 강진동초교 교정에는 5천여 명의 군민들이 참석했다.

맨 먼저 등단한 김석영 후보(기호2번)는 유권자들의 성향을 의식한 듯 민주당의 김영삼 총재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이 오히려 평민당 김대중 총재와 사이가 가깝다면서 “제2의 김대중 총재가 되도록 표를 찍어달라”고 호소했다.

이어 김식 후보(기호1번)는 “대선과 총선은 그 성격이 다르다”면서 “지역 일꾼을 뽑는 총선에서는 지역개발에 앞장설 수 있는 여당후보를 지지해달라”고 부탁하고 강진에 전남도청 유치, 4년제 대학과 공단 유치 등을 공약했다.

이선동 후보(기호4번)는 “내가 평민당 공천을 받게 돼 있었는데 종교단체의 압력 때문에 탈락됐다”고 주장한 후 “김영진 후보가 사퇴하도록 유권자들이 압력을 가해달라”고 호소하자 평민당 지지자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마지막으로 등단한 김영진 후보(기호 3번)는 “김대중 선생이 다시 대권에 도전할 수 있도록 평민당 후보에게 많은 표를 찍어 달라”고 부탁하면서 “지난 7년 동안 수많은 강진군민이 살기 어려워 강진을 떠났는데도 민정당이 살기 좋은 농촌을 건설했단 말이냐”고 김식 후보를 공격했다.

선거결과는 정치신인 김영진 후보의 첫 ‘여의도 입성’으로 마무리됐다. 김 후보는 유효투표수 8만6천647표의 40.47%인 3만5천65표를 득표했다. 2위는 2만7천925표(32.23%)를 얻은 이선동 후보가 차지했다. 김식 후보는 거세게 불어 닥친 ‘황색돌풍’을 차단하지 못하고 2만2천305표(25.74%)를 득표해 3위를 기록했다. 김석영 후보는 1천352표(1.56%)를 얻어 맨 꼴찌.

김영진 의원은  도암면 항촌리에서 4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적상 1947년생이지만 실제는 1946년생. 김 의원의 어린 시절은 초가집도 아닌 움막집에서 생활했을 정도로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 우체국 사환으로 학비를 벌어 강진농고를 졸업했을 정도.

젊은 시절 농협에서 10여 년간 근무한 적이 있는 김 의원은, 독실한 신앙심을 갖고 있는 기독교 장로출신 정치인이다. ‘5선 국회의원․농림부장관 김영진’이 있기까지는 종교 활동이 정치적 기반이었고 출발점이었다.

김 의원은 기장 강진읍교회 청년회장, 기장 광주전남 청년연합회장을 거쳐 기장 전국청년연합회장,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EYC) 7대 회장 등 점차 활동영역을 넓혀가면서 지도력과 반독재 투쟁이력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이 때 민주화운동으로 두 차례나 구속되기도 했다.

13대 총선 때 DJ에 의해 종교계 몫으로 평민당 후보로 국회의원이 된 것도 순전히 종교 활동을 통한 민주화운동, 농민운동이 계기가 됐다. 김 의원의 국회 상임위활동은 대부분 농수산위원회에서 했다. 지역구를 도시(광주 서구을)로 옮긴 이후 18대 국회에서는 교육과학기술위원회에서 활동했지만, 13대부터 16대 국회까지 줄곧 농수산위를 떠나지 않았다.

농고를 졸업하고 농협에서 근무했고,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원장과 농림부장관을 지낸데 이어, 국제농림어업의원연맹 회장도 역임했다. 그래서 그에게는 ‘농어민의 대변인’, ‘진짜 농정통’이라는 별칭이 영광스럽게 붙는다. 동료의원들이 “김 의원은 농(農)자 없이는 못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김 의원은 88년 국회 광주청문회 때 노무현 ․ 이해찬 의원 등과 함께 5․18광주민중항쟁 가해자들인 전두환 전 대통령과 민정당 정호용․박준병 의원 등을 매섭게 추궁해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하지만 90년 7월 ‘국회 명패투척사건’으로 곤경에 빠지기도 했다.

김 의원은 모두 5선을 했다. 고향인 강진에서 13,14,15대까지 내리 3선을 했고, 16대 때는 전국구 의원으로, 18대는 광주 서구을 선거구에서 당선돼 5선 의원이 됐다. 17대 때는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광주 서구을에서 출마했으나 ‘탄핵바람’에 휩쓸려 열린우리당 후보에게 낙선했다. 전적은 5승1패. 그는 19대 총선(4.11)에 출마, 6선을 한 후 국회의장에 도전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으나 민주통합당 공천에 탈락했다.

[광복 70주년 기획시리즈, 우리 강진은 이렇게 살았다] 이번주 기사는 임영상 칼럼니스트가 2012년 1월부터 2012년 6월까지 <강진일보>에 연재한 [총선으로 본 강진정치사] 기사를 요약해 정리한 것입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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