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균/고막원 교회 목사

항상 약자와 정의 편에 서기를 좋아하는 기질
동성리 강진약국은 야당 인사들의 아지트

정확한 시기는 알수 없지만 황호신 선생과 지인들이 강진읍 서산리에 있는 서산교회를 방문해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 = 황호신 선생 유족 제공>
황호신 선생이 일제 때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황호신 선생은 일제 말에 서울약전 재학 중에 독립운동 조직에 가담하여 활동했다. 미망인인 오상선 여사(현재 89세, 집사)의 증언에 의하면, 오집사의 외숙모 댁이 서울 돈암동에 살고 있었다.

황선생은 당시 그 댁 문간채에서 하숙을 하다가, 외숙모의 소개로 오여사와 알게 되었다. 오여사는 당시 경북 안동여고에 재학중이었다. 오여사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피신 다니던 황호신 전문학생과 연애를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애국독립군에 위문편지’보내는 심정으로 편지를 적어 보냈다. 지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쫓겨다니던 청년 황호신과 사이에 사랑이 싹텄던 것이다. 이들은 편지로만 사랑을 주고 받았다. 해방 후에야 만나서 결혼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들은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정부의 방송에서 ‘국군이 인민군과 용맹하게 싸워 서울을 사수한다’는 말만 믿고 미처 피난을 가지 못했다. 그는 서울에 남아 있다가, 인민군에게 납북되었다. 인민군에게 약사가 필요했던지 그는 평양까지 끌려가게 되었다. 황호신 청년은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 추운 겨울 천신만고 끝에 남쪽으로 도망해 나왔던 것이다.

그는 남하한지 불과 얼마되지 않아, 인민군으로 의심받았다. 황호신 청년은 결국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그는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포로로서 통역으로 일했다. 드디어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정권의 주도로 3만 5천명의 반공포로들이 석방되었다. 청년 황호신은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당시 한반도의 파란만장했던 격동의 정세 속에서 생사의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나라의 운명과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다. 운명적으로 민족의 고난과 함께하는 인생경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가끔 강진약국을 드나드는 후학들에게 ‘평양에서 포로수용소 수감시절’을 회상하곤 했다. 그는 특유의 입담으로 중공군이 밤에 피리를 부는데, 어찌나 처량하게 들렸던지 눈물을 흘리는 동료들이 많았다고 증언을 했다.

황호신 청년은 강진 토박이 아전 집안 지주의 아들이었다. 부잣집 아들이었지만, 사서 고생을 하다가 죽음의 고비를 잘도 넘겼던 것이었다. 자유당 시절이나, 군부독재 시절에 강진에서 민주주의에 관한 시국관이 투철했던 사람은 강진에 몇 명 되지 않았다. 그는 만년 야당이요, 강진약국은 야당 인사들의 아지트였다. 그런 이유로 황호신 선생은 줄곧 경찰당국의 요시찰 인물이 되었던 것이었다.

중년기인 자유당 시절에도 줄곧 재야인사였다. 이제 대명천지 민주화 세상이 되어서 사회주의 경력을 가진 독립유공자까지도 추서하고 있다. 숨겨져 있던 민주유공자들도 발굴하여 그들의 노고를 인정해주는 때이다. 그는 일제시대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서 일했다. 지하로 숨어다니면서, 독립운동가로서 온갖 고초를 겪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민간인 포로로 납북되었다. 천신만고로 다시 남하 후에는 인민군 포로로 간주되어 생고생을 했던 것이다.

자유당 시절에는 이승만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다. 3.15부정선거 무렵 강진의 야당인사들이라면, 제 기억에는 김현문, 임원수, 박윤근, 이선웅 선생 등이 있었다. 당시 동아일보 지국장이었던 김현문 선생이 비오는 날 마분지로 만든 종이 스피커를 들고 이승만 독재정권을 향해 ‘못살겠다 갈아보자’고 시장통에서 외쳤던 것을 기억한다. 황호신 청년은 자유당과 군부독재에 저항하여 민주화운동에 직접 참여했다.

또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야당과 양심적 인사들에 대해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황호신 선생의 삶의 내력을 소상히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필자는 많이 부족한 사람이지만, 용기를 내어 ‘황호신 선생의 생애와 그의 신앙과 민주화 활동, 사회활동’에 대하여 증언하고자 결단한 것이다.

□ 민초들과 애환을 함께한 인간 황호신 장로
황호신 장로를 기억하는 강진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 분은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생각해 본다. 강진약국 약사, 교회 장로, 미국사람과 유창한 영어로 통하는 분, 좌담을 잘하는 분, 제스추어가 멋이 있는 분, 조리있는 언변과 활달한 웃음, 세계와 한반도의 정세를 통찰하여 논하는 시국해설가, 어떠한 계층의 인생상담에도 선뜻 응해주는 상담가, 항상 약자와 정의 편에 서기를 좋아하는 기질을 가진 분, 일제시대, 자유당 독재와 군사정부 시절에 이르기까지 강진에서 줄곧 경찰정보당국의 감시를 받아온 분, 강진지역을 넘어 이 땅의 권력적 주류에 맞서 비판의식을 가진 반골기질을 가졌기에 많은 소외된 사람들과 사회적 약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던 분이었다고 말한다면 특별히 이의를 제기할 분은 많지 않을 것이다.

강진약국은 장날 뿐 아니라, 평일에도 사람들이 붐볐다. 해방 직후부터 오랜 약사 경력과 체험을 가지고, 실력있는 조제를 했다. 강진에 거주하는 수많은 민초들이 많은 효험을 보았기 때문에 강진약국은 항상 붐비었다. 황호신 선생은 조제실에서 약을 지으면서도, 약국 의자에 앉아 있는 청중들을 향해서 ‘예수 이야기’ ‘시국 이야기’를 거침없이 토해 내었다.

약을 지러 온 사람들은 불안해 했다. 저 황약사가 자기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서 약은 제대로 지고있는가? 누가 항의(?)할라치면, 황약사는 민초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질병의 원인과 약의 효력에 대해서 항상 시원하게 설명해 주었다.

약을 조제할 때도 그들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서, 얼마어치를 지어줄 것인가, 또 며칠 먹을 약을 지어줄 것인가를 반드시 물어보고 지어 주었다. 약값에 대한 부담을 전혀 지우지 않으려는 민중적인 배려였을 것이다. 그는 가난한 자에게는 약값을 싸게 받았고, 좀 돈이 있다 싶게 생겼으면 약간을 약간 올려 받았다고 실토했다. 부자의 주머니를 털어 가난한 자의 주머니에 전가시켜 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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