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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임해서도 강진사람들과 끈끈한 관계유지“강진사람들은 참 정이 많더라”1993년 6월 26일자로 부임한 박재순 군수의 임기는 짧았다. 11개월간 근무를 마치고 다음해 5월 5일자로 다시 도청으로 들어갔다. 그의 강진군수 재임기간은 11개월에 불과했지만 역대 어느 관선군수 보다 많은 족적과 큰 성과를 남겼다.1976년 1월~1979년 5월까지 3년 4개월동안 근무했던 21대 정채균 군수가 강진발전의 큰 밑그림을 그린 군수였다면 그로부터 15년 후 부임한 박재순 군수는 농촌근대화사업에 피로한 군민과 공무원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준 군수였다.어느날 초등학생이 학교 앞 비포장도로 수렁에 빠져 흰 운동화가 흙탕물에 얼룩져 군수에 대한 불평을 했다는 소리를 듣고 다음날 교문 밖 도로를 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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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3.04.16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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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영어 강좌개설, 성요셉여고 외국인선생님이 강의 맡아 “강진군수시절 영원히 잊지 못할 것”박재순 군수가 부임한지 두달 후인 94년 여름이였다. 태풍 ‘너그’가 다가오면서 강진지역에 엄청난 양의 비가 내렸다. 박군수가 밤중에 전 읍면을 돌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마량에서 대구에 들러 칠량으로 이동할 때였다. 이미 주변은 칠흙같이 어두운 밤이였다. 칠량 장계천의 물이 엄청나게 불어나 바다로 들어가고 있었다. 천변에 있던 이용규씨 집은 이미 불이 꺼져 있었다. 물이 불어나는지도 모르고 온 가족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박군수는 차를 즉시 멈추게 했다. 도로변에서 이씨의 집까지는 외길을 100여m 걸어 들어가야 했다. 박군수는 우산을 쓰고 손전등을 밝히며 이씨의 집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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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3.03.26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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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 설명절 한파로 뱃길 두절… 마량항서 진두지휘하며‘따뜻한 대접’지난 2월 3일, 박재순 한국농어촌공사 사장이 나주시 세지면 화탑마을을 찾았다. 화탑마을은 박근혜 당시 대통령 당선인이 어느 좌석에서 농촌 발전의 성공 모델로 언급한 곳이였다. 박대통령은 후보시절 화탑마을을 방문하기도 했다. 박당선자가 화탑마을을 농촌의 성공모델로 소개하자마자 서울에서 한국농어촌공사 사장이 화탑마을을 찾은 것이다. 박사장의 이날 방문이 대통령의 농촌관심에 힘을 실어주고 한편으로 전남지역에서 척박한 박대통령의 위상을 많이 높힌 것은 물론이였다. 어찌보면 공기업 사장으로서 대통령을 돕는 당연한 행보로 보이지만 막상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박재순 전 강진군수는 이렇듯 업무의 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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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3.03.20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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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각장애인 벼수매 못하는 것 보고장애인과 공무원, 주민들에 수화교육 역대 강진군수들과 관련해 많은 일화가 있지만 박재순 군수(1993년 6월~ 1994년 5월) 만큼 많은 이야기가 있는 사람도 드물다. 박 전군수는 요즘 농어촌공사 사장으로 재직중이다. 여기저기 강연도 많이 다니고 신문 인터뷰도 많이한다. 그때 마다 단골이야기가 있다.“강진군수 하던 시절이 가장 기억난다” “자전거로 강진을 누비던 군수시절 경험을 경영에 접목하고 있다” 박재순 사장의 강진군수 시절 경험담은 청중과 독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며 고개를 끄떡이게 한다. 그렇게 거창한 일들은 아니지만 인간미가 한껏 뭍어나는 일이 꼬리를 물고 나온다. 박사장의 지론은 결국 행정도 인간미에서 결실을 맺는 것이고, 그런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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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3.03.12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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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융자지원 약속해 놓고 지원 늦장초가지붕에 손 넣은 공무원, 물컹한 구렁이 잡히자 줄행랑60· 70년대 농촌의 큰 변화를 꼽으라면 지붕개량을 꼽을 수 있다. 6.25 전쟁이 끝나고 대도시를 중심으로 지붕개량 운동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농촌지역 지붕개량은 66년 7월에 ‘농어촌 지붕개량 촉진법’이 만들어 지고 나서부터다. 정부는 다음해 5월 10년내 초가지붕을 기와등으로 개량하기위해 농협을 통해 농가 1호당 지붕개량 소요액의 50%인 1만원을 연 9%로 융자해 주기로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지방순시를 할 때면 “고속도로 주변 초가집 지붕을 빨리 바꾸라”고 지시하곤 했다. 공무원들이 가만히 있을리 없었다. 주겠다던 융자금은 주지 않으면서 빨리 지붕을 개량하라고 재촉했다. 고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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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3.03.05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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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열기 파주군과 전국 1, 2위 다퉈파주는 출판도시로 성장… 강진은 잊혀진 독서도시경기도 파주에 출판단지가 있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서울시내도 아닌 곳에 500여개 출판관련 업체가 입주해 있는 출판단지가 있다. 이곳은 요즘 관광지가 되어 서울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간다. 책도 대부분 50% 가격에 판매한다. 파주는 거대한 출판도시가 됐다.한때 파주는 강진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마을문고 시범지역이였다. 그 여세를 몰아 오늘날 출판도시로 성장한 것이다. 1960년대 중반들어 정부는 마을문고 육성에 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농촌의 근대화없이 한국의 근대화를 바랄 수 없다’는 모토를 세웠다. 농민들이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시범지역 운영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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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일보
2013.02.26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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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통령, 양수기 애착 각별 ‘수시감사’잘 돌던 양수기 감사 나오면 ‘스톱’ 일쑤 1968년과 69년 엄청난 한해를 겪은 박정희 대통령은 70년대로 접어 들면서 가뭄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양수기 확보가 시급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는 저수지 개발이나 관정보급이 거의 되지 않았을 때다. 69년 처음으로 연리 9%, 1년거치 4년 분할조건으로 양수기 구매자금을 전액 융자로 보급하는 제도가 도입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상당히 높은 금리지만 그 전까지는 본인부담이 40%에 달해 현금이 없는 농민들이 양수기를 구입할 수 없는 형편이였다.한편으로 정부는 68년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일본에서 2천여대의 양수기를 도입한데 이어 70년대 들어서는 농업원조차관이 들어오면 우선적으로 양수기를 구입하는데 투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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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3.02.19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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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인구는 5만3,500명... 며느리도 몰랐던 농촌인구 변화지난해 말 현재 강진의 인구는 4만 241명이다. 강진의 인구는 1967년 12만7천170명을 최 정점으로 점점 줄어든다. 10만명대를 유지했던게 1979년까지 였다. 그때 인구가 10만237명이였다. 그후로 10만명대가 무너졌고, 90년도에는 7만명대가 무너졌다.강진군에서는 1977년 처음으로 강진군농어촌종합개발계획이라는 것을 세운다. 또 강진읍도시종합계획을 세운 것도 이때다. 강진군의 장기발전 플랜을 처음으로 만든 것이다. 1977년부터 1996년까지 장장 20년 동안 강진군을 발전시킬 청사진이 이때 세워졌다.당시 정채균 군수 재임시절인데 이를 근간으로 해서 강진군의 모든 발전 계획과 개발 모양이 확립됐다고 해도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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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3.02.06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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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천면장 술인심 좋았던 사람, 그런거 애낄 사람 아니였다”소문 일파만파 전국 술자리에 단골등장… “오래전 일 이제 잊어달라” 옴천면장이 맥주를 한잔 사겠다고 하자 다른 면장들이 농담을 건냈다. “옴천면장도 술 살돈이 있당가” “아 맥주한잔 살돈도 없당가” 옴천 한면장이 농담을 받았다. 다른 면장들은 육군 상사출신이 몇 있었고, 옴천면장은 유일하게 대위출신이였기 때문에 이런 분위기에서 옴천면장이 밀리지 않으려 했다. 옴천면사무소는 재정이 가장 어려운 곳이였으나 당시에는 사실 모든 면사무소가 돈이 있는 곳이 아니였다. 가난하기는 옴천면장이나 성전면장이나 매 한가지였던 것이다.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맥주를 4병 시켰다. 맥주가 아주 귀할 때다. 삼거리 막걸리집에 유리잔이 있는게 아니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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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3.01.29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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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면장 회의 마치고 옴천면장이 맥주를 샀는데…‘옴천면장 맥주 따르대끼 한다’는 말이 있다. 맥주잔에 거품을 많게 따라서 맥주양을 늘리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말은 우스 개 소리로 많이 하지만 옴천주민들에게는 그렇게 기분좋은 말은 아니다. 궁색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이 강진은 물론 전국에서 사용된다. 서울이나 부산에서 ‘옴천면장 맥주 따르듯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사람들이 많다. 서울의 강남 압구정동에서 이 말이 돌았다. 이 말은 도대체 어디에서 연유된 것일까.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만큼 이 말에 대한 이런저런 설도 많다. 옴천면장이 외부에서 온 손님을 접대하다 그랬다는 말이 있다. 광주 도청에서 손님이 왔는데 강진읍 술집에서 맥주로 접대를 하게 됐다는 것이다. 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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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3.01.22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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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읍중앙로새마을정비사업, 땅부자들 반대로 무산… 가장 큰 아쉬움강진읍서 반대한 사업 해남읍에서 대환영… 해남읍 발전기틀 마련70· 80년대 강진군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정채균 군수 이야기를 많이 한다. 정군수는 1976년 1월~1979년 5월까지 3년 4개월동안 21대 강진군수를 했던 사람이다. 보통 관선군수의 임기가 1년이였다고 한다. 다른 사람보다 세배가 넘는 강진군수로 재직했다.정채균 군수의 업적을 되돌아 보면 지금 강진군의 큰 그림을 그때 그렸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청자재현사업이란든가 다산유적지 성역화사업, 영랑생가 복원, 마량면소재지 공유수면매립, 강진읍토지구획정리사업, 강진군청 청사설립등이 그때 이뤄진 것이다. 지금 강진의 큰 모습을 보면 그 때 잡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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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3.01.08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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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글씨 잘쓰던 윤지현씨 대통령 업무보고 차트도 만들어공직사회의 3대 혁신이라고 하면 컴퓨터, 복사기, 팩스등이 꼽힌다. 이 세가지가 공무원들의 업무 방법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이 세가지가 없을 때는 공무원들의 업무가 그렇게 힘들었다는 뜻이기도 하다.최근에 고지된 자동차세를 예로 들어보자. 요즘에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모든 것을 처리하지만 컴퓨터가 없을 때는 모든게 수작업이였다. 세금 부과때가 되면 담당공무원들이 며칠씩 밤샘을 했다. 비율에 맞게 계산을 해서 정산을 하고 이를 청구서에 하나하나 옮겨 적었다. 컴퓨터 덕을 가장 많이 보는 부서중의 하나는 예산관련 부서다. 수많은 항목을 분류하고 다시 수치를 계산해 처음부터 끝까지 1원까지도 맞아 떨어져야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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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3.01.02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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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외상 계산하고 인정 넘치는 병애주 한잔군청직원 이름 모르던 술집주인, 장부에‘군청 미국사람’으로 관리요즘에야 급여가 모두 통장으로 입금되지만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모두 봉투에 담아서 나왔다. 매월 급여날이면 각 부서의 서무담당들이 봉투에 담은 현금을 공무원들에게 배포했다.옛날에는 비자금 만들기도 좋았다. 요즘처럼 연말이면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내는 시기였기 때문에 부서서무에게 빈봉투를 하나 더 얻어 원천징수 항목에 불우웃돕기 성금 금액을 많이 적어서 현금을 따로 챙기고 집에 가져다 주는 식으로 비자금을 많이 만들었다. 월급날은 외상값 갑는 날이기도 했다. 카드가 없던 시절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공무원들이 식당이나 선술집에 작은 장부를 놔두고 외상거래를 했다. 소주한병을 마셔도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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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12.18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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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 배수로 풀베기 감독나간 담당직원 현장 확인 없이‘깨끗히 베었다’보고 들통70년대 초중반 공무원 조직의 최대 과제는 뭐니뭐니 해도 증산이였다. 통일벼가 나오고 보온못자리가 등장하면서 혁명적인 영농 변화가 이뤄졌다. 그러나 매년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식량수요가 급격히 증가해 쌀을 자급하는 것은 국가적인 과제가 됐다. 정부는 증산을 위하여 다섯가지 집중정책을 내놓는다. 첫째는 정부가 장려하는 벼품종에서 종자를 선택할 것, 둘째 가급적 집단재배를 실시할 것, 셋째 보온못자리를 설치할 것, 넷째 종자소독에서부터 수확기에 이르기까지 병충해방제를 철저히 할 것, 다섯째 제때 농업용수확보에 차질이 없게 할 것등 이였다. 정부의 이같은 모든 지침이 행정조직을 통해 전달됐고, 이를 잘 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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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일보
2012.12.11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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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두환 군부정권 행정기관 통제수단으로 악용1965년 관련법 제정 시행… 93년 김영삼 정권 출범후 자취 감춰 70년대 80년대는 감사(監査)의 시대였다. 행정조직의 경우 자체감사는 물론 감사원감사가 있었고, 감사원 감사에 대비한 자체감사가 있었으며, 또 자체 감사가 끝나면 감사원감사가 뒷따랐고, 또 감사원 감사에서 지적된 사항을 정리하기 위한 자체감사가 또 있는 식이였다.곧이어 보안감사와 연말특별복무감사가 들이닥쳤다. 감사의 방법도 천태만상이였다. 보통감사, 특별감사, 기동감사, 개별감사, 수시감사, 정기감사등 셀 수 없는 감사들이 줄을 이었다.이중에서 공무원들이 가장 어려웠고 난감했던게 보안감사였다. 박정희 정권은 1965년 7월 ‘비밀보호와 보안조사에 대한 법률안’을
군정비사
주희춘 기자
2012.12.04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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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일식집서 와사비 처음 보고 고추에 찍어 먹은 A씨주변 사람 놀라“괜찮으시냐”고 묻자“원체 즐기는 음식”70년대 초반 어느날 일이다. 당시에는 일본식 된장의 일종인 ‘와사비(고추냉이가 표준말임)’가 대중화되지 않을 때다. 군청에 근무하던 A씨가 중요한 손님을 만나기 위해 어느날 광주의 고급 일식집을 갔다. 분위기가 꽤 좋은 식당이였다. 먹음직스런 회가 정갈하게 차려졌다. 그런데 햐얀 속살이 정갈스러운 싱싱한 회 접시 주변에 푸른 색소가 들어간 된장 같은게 나왔다. A씨는 처음부터 ‘푸른된장’에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된장같기도 하고, 고추장같기도하고... 저게 뭘까... 고추장이면 색깔이 빨갈텐데... 강진에서는 못 본 것이고... ” A씨는 손님들과 대화중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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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11.27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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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나무를 산림과에서 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산림과는 산의 나무를 관리하는 곳이니 새마을과에서…공무원들, 주말과 휴일 반납 막노동 지금의 벚나무 터널 장관 만들어지금은 봄이되면 군동 호계리에서 금곡사앞을 거쳐 작천까지 이어지는 벚꽃이 장관을 이뤄 강진사람들은 물론 관광객들의 큰 볼거리가 되고 있다. 이 벚꽃거리가 생겨나기 까지 적지 않은 에피소드가 있었다.92년 부임했던 문병일군수는 나무를 심는 일에 유난히 애정이 많았다. 문군수는 호계리에서 금곡사로 이어지는 도로 주변에 나무가 없는게 늘 아쉬움이였다. 경남 진해의 벚나무가 늘 부러웠다. 그래서 생각한게 호계리~ 금곡사까지 벚나무를 심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나무심는 예산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본예산만 내 주면 나머지 부
군정비사
주희춘 기자
2012.11.21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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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지역이 그렇지만 우리 강진지역에서도 60, 70년대를 거치면서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지역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제 50대 이상이 된 그들은 울고 웃고 하며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낸 사람들이다. 그중에 공무원들은 보이지 않은 곳에서 많은 역할을 했다. 70년대 중반만 해도 강진의 인구는 12만이였다. 공무원들은 주민들과 가장 가까이 상대하며 새마을운동을 이끌었고 식량증산을 이룩하는데 일조했다. 그속에서 전해오는 재미있는 이야기, 역경극복 이야기등을 차례로 연재한다./편집자 주 병충해 예찰 나가 선술집서 라면 끊여먹던 공무원 읍장이 질책하자 “라면은 안넣고 물만 끓였는데요
군정비사
강진일보
2012.11.13 1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