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에서 목민관의 지켜야 할 자세 가다듬었다”

박재순 농어촌공사 사장이 지난해 태풍 볼라벤이 강진을 강타해 피해가 발생한 직후 마량방조제를 방문해 현장을 둘러봤다.
이임해서도 강진사람들과 끈끈한 관계유지
“강진사람들은 참 정이 많더라”

1993년 6월 26일자로 부임한 박재순 군수의 임기는 짧았다. 11개월간 근무를 마치고 다음해 5월 5일자로 다시 도청으로 들어갔다. 그의 강진군수 재임기간은 11개월에 불과했지만 역대 어느 관선군수 보다 많은 족적과 큰 성과를 남겼다.

1976년 1월~1979년 5월까지 3년 4개월동안 근무했던 21대 정채균 군수가 강진발전의 큰 밑그림을 그린 군수였다면 그로부터 15년 후 부임한 박재순 군수는 농촌근대화사업에 피로한 군민과 공무원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준 군수였다.

어느날 초등학생이 학교 앞 비포장도로 수렁에 빠져 흰 운동화가 흙탕물에 얼룩져 군수에 대한 불평을 했다는 소리를 듣고 다음날 교문 밖 도로를 포장해줬다는 일화, 추곡수매 현장에서 말 못하는 모녀가 검사 받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장을 접하고 군수 직권으로 21가마에 1등급 판정을 내린 사연, 여기에 그치지 않고 언어와 청각 장애인 실태를 파악해 전국지자체 최초로 수화 교육을 실시한 것등이 모두 그런 것이였다.

또 강진우시장에서 소의 무게를 속여 파는 문제를 보고받고 우시장 계량대 앞쪽에 전등을 밝게 해서 저울을 잘 보이게 하고 소의 무개를 잴 때 소코뚜레를 절대 잡지 못하게 한것도 그가 만든 역사다. 옛 우시장은 오일시장 한가운데인 지금의 군내버스정류장 주변에 있었는데 장날이면 교통혼잡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박군수는 재임중 매 장날마다 나와 군청직원들과 함께 교통을 정리했다. 강진군청의 한 공무원은 “당시 박군수님이 자신이 먼저 하지 않은 일을 직원들에게 시키지 않았다. 무엇을 지시하려면 꼭 자신이 먼저 하면서 함께 하는 식이였다”고 회고했다. 

박군수는 강진을 떠난 후에도 강진과 강진사람들을 잊지 않았다. 군수재임때 교분을 가졌던 사람들의 생일이나 조상들의 제사를 거의 빼지 않고 챙겼다. 어느날 갑자기 보내 온 박군수의 쇠고기를 받아본 사람이 강진에 참 많았다. 연중 박군수가 보내왔던 소고기가 소 몇 마리 분은 될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이 때문에 한때 강진에서는 박군수가 강진에서 민선군수에 출마해도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는 농담이 나오기도 했다. 그때마다 박군수는 “강진사람들은 참 정이 많더라. 나도 강진에 정이 많이 간다. 군수출마 그런거 생각 해보지도 않았다”고 웃어넘겼다.

그는 한국농어촌공사 사장을 지내고 있는 요즘에도 자신의 공직자 생활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때로 ‘지방행정의 꽃’이라 불리는 군수 시절을 꼽고 있다. 그는 “조선말 대실학자인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 강진에서 군수생활을 하며 목민관으로서 지켜야 할 자세를 가다듬었다”고 자주 회고한다.

그때부터 주민과 함께 생활하며, 애환을 직접 체험해야 군정을 바로 펼 수 있다고 확신했고 ‘발로 뛰는 행정’의 필요성을 몸소 실천에 옮겼다는 것이다. 이때 붙은 ‘자전거 군수’란 별명을 지금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박재순 전 강진군수는 “공직자는 국민의 심부름꾼으로서 탁상공론이 아닌 항상 실천하고 행동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걷는 자만이 앞으로 나아간다’는 좌우명으로 공직에 임해왔다”고 회고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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