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전 노인복지 개념 도입… 독거노인 장례대행제도등 시행

생활영어 강좌개설, 성요셉여고 외국인선생님이 강의 맡아
 “강진군수시절 영원히 잊지 못할 것”

박재순 농어촌공사사장(가운데)이 지난해 태풍 볼라벤이 강진을 강타해 피해가 발생한 직후 황주홍 국회의원, 강진원 군수 등과 마량방조제를 방문해 김외출 지사장으로부터 피해상황을 보고받고 있다.
박재순 군수가 부임한지 두달 후인 94년 여름이였다. 태풍 ‘너그’가 다가오면서 강진지역에 엄청난 양의 비가 내렸다. 박군수가 밤중에 전 읍면을 돌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마량에서 대구에 들러 칠량으로 이동할 때였다. 이미 주변은 칠흙같이 어두운 밤이였다. 칠량 장계천의 물이 엄청나게 불어나 바다로 들어가고 있었다. 천변에 있던 이용규씨 집은 이미 불이 꺼져 있었다. 물이 불어나는지도 모르고 온 가족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박군수는 차를 즉시 멈추게 했다. 도로변에서 이씨의 집까지는 외길을 100여m 걸어 들어가야 했다. 박군수는 우산을 쓰고 손전등을 밝히며 이씨의 집을 향해 걸었다. 바다쪽에서 새찬 비바람이 불어왔다. 우산이 뒤집히고 다시 펴고를 몇차례 반복한 끝에 어렵게 이씨의 집에 도착했다.

박군수는 자고 있던 일가족을 깨웠다. 빨리 대피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집주변의 물은 계속 불어나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일가족이 불어난 물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박군수는 그길로 이용규씨 일가족을 차에 태워 칠량면사무소 숙직실로 대피시키고 다음 행선지인 군동으로 향했다.

박군수는 당시의 상황을 어느 잡지에 기고한적이 있는데 그 글을 통해 “이씨 가족을 깨워 대피시킨 일은 나의 작은 부지런함이 가져다준 봉사행정이라고 생각한다”고 적었다.

박군수가 강진군수로 재직한 짧은 기간(1993.6~ 1994. 5월) 동안 일화는 그밖에도 많다. 94년초 강진사람들은 독거노인이 돌아가셨을 때 읍면장들이 검은 양복을 입고 장례를 총지휘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읍면장들이 장례위원장을 맡은 것이다.

박군수는 독거노인들이 돌아가시면 장례가 너무나 쓸쓸한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냈다. ‘장례대행’ 제도였다. 장례를 치러줄 사람이 없는 독거노인이 사망하면 읍면장이 장례위원장을 맡아 장례용품 구입에서부터 매장절차까지 뒷마무리를 말끔하게 처리했다. 이 제도는 당시 농협이 장제사업을 시작한다는 말이 나오면서 오랫동안 실시되지 못했지만 지금 도입해 보아도 좋을 정책으로 보인다.

이에앞서 박군수는 경로봉양제라는 것을 실시했다. 자식없이 쓸쓸히 노후를 보내는 80명의 노인들에게 같은 동네에 사는 초중학교 80명과 자매결연을 맺어 주어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를 드리게 한 것이다. 말벗도 되어주게하고 등도 두드려 주었다.
 
박군수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읍면의 독거노인들을 사회복지사들과 인연을 맺게해서 이발과 목욕도 시켜주고 빨래도 해주는 쪽으로 이 제도를 발전시켰다. 요즘에는 노인복지제도가 광범위하게 인식되고 일반화됐지만 당시만 해도 노인복지란 개념 자체가 부족할 때였다.

노인들이 못살고 어려운 것은 팔자소관이라는 인식이 강할 때였다. 이를 군단위에서 시행한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이였다. 또 한가지 소개해야 할 일이 있다. 요즘에는 생활영어 교육을 다양한 방법으로 받을 수 있지만 20년 전만해도 외국인을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박군수가 아이디어를 냈다. 성요셉여고의 외국인 선생님들로부터 공직자들이 생활영어를 배우자는 것이였다. 아론매리 필립수녀를 직접 찾아가 강의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생활영어를 가르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참가자들이 쇄도했다. 군청과 읍면공무원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많았다. 읍내에 개업중이던 치과의사도 생활영어를 배우겠다고 신청서를 냈다.      

박 군수는 “43년간 공직에 몸담아 오면서 강진군수했던 기간이 나에게 가장 보람있는 시간이였다”며 “강진주민들의 순수한 마음을 나는 오래오래 아니 영원히 간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강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