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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마을의 겨울이 깊다. 차가운 기운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서기산(해발 511m) 아래 월남마을이 있다. 강진읍에서 가장 멀리 있는 마을이다.산이 높아 겨울이 빨리 찾아오고 깊게 지나간다. 1960년대 초반 서산제가 축조되었다. 강진에서 담수량이 가장 많은 저수지라고 한다. 저수지가 막아지기 전 마을 풍경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마을 하천을 따라 이 곳 산골까지 민물장어와 은어가 올라왔다.철따라 은어와 민물장어를 잡으려는 통발이 즐비 했었다. 지금의 서산저수지 부지가 온통 논이었다.이 깊은 산골자기에 큰 마을이 들어선 이유가 바로
기획특집
주희춘 기자
2023.01.19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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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이 신세’란 말이 다른 곳에서 강진으로 유입된 것으로는 보이지는 않는다. ‘학원이 신세’란 소설이 보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강진에서 역외로 유출됐을 가능성이 많다.강진은 예전에 전국을 다니며 장사하는 병영상인들이 많았다. 강진의 소식이 전국으로 퍼져나가는 전파력이 쎘다. ‘옴천면장 맥주 따르데끼’가 전국으로 퍼져 나갔듯이 ‘학원이 신세’도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까지 나온 자료만으로 결론을 짓자면, 1868년 지금 병영면에 있는 전라병영성을 공격해 세상을 바꿔 보려다 좌절된 강진 사람 김학원의 꿈이 대중의 언어속에 체화되어
짜투리
주희춘 기자
2023.01.19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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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재 한옥체험관의 이용가격이 4인실 기준으로 하루 10만원 안팎에서 35만원으로 치솟은 것은 심각한 문제다.군이 그동안 이곳을 직영하며 벌어들인 수익이 연간 8~9천만원 정도였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관리비가 1억원 정도 들어갔다고 한다. 1천만원 정도 적자가 발생해 이를 군비로 충당했다는 뜻이다.그래서 서비스도 향상하고 군비 적자도 없애기 위해 대기업에 운영을 맡겼다는 것인데, 이용료가 세배이상 뛰었다. 다소 유동성이 있겠지만, 대기업 K업체가 벌어들일 수익이 가격 인상대로 세배로 치면 연간 3억원이 넘는다.그러나 계약에 따라
오피니언
주희춘 기자
2023.01.19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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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뉴스
주희춘 기자
2023.01.12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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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읍 중심가의 서쪽 마을이다. 건우1차아파트 좌측도로를 경계로 홍암마을은 서쪽, 서문마을은 동쪽이다. 장애인복지관과 강진고, 강진여중이 모두 홍암마을 소속이다.그 너머로 강진의료원이라는 큰 건물이 있다. 다시 서쪽으로 돌아가면 호수공원 동쪽으로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곳 역시 홍암마을이다. 마을내에는 낙하정이라는 아름다운 솔밭이 있으며 현재 이 곳에는 삼일운동기념탑이 있다. 또 1960년대에서 70년대까지 5~6곳의 주점이 있었고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병원과 학교가 생기고 모두 철거됐다.마을내에는 고인돌군이 존재했던 것으로 봤을
기획특집
주희춘 기자
2023.01.12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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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원이 체포되어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는 기록에 없다. 단지, 김학원이 체포된 후에도 광양란을 일으킨 강진사람 강명좌와 김문도로부터 보고를 받다가 들통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중형을 면치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는 광양란의 주동자 5명(강명좌, 김문도 포함)에 대해서는 한양으로 압송시켜 추국한 다음 모반대역죄를 적용해 능지처참했다. 적극 가담자 44명은 전라좌수영에서 참수했다. 전체적으로 종합해 보면, 김학원은 강명좌, 김문도와 전라병영성을 공격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원대한 꿈을 꾸었으나 실행도 못해 보고 혼자서만
짜투리
주희춘 기자
2023.01.12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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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10년 동안 강진읍 동문마을 만큼 큰 변화를 맞은 곳도 드물다. 1801년 다산 정약용 선생이 슬픔과 절망을 안고 찾아든 동문마을은 이제 그때 그 일이 자산이 되어 날개를 단 듯 발전하고 있다.다산이 강진에 도착해 처음 어려운 시간을 보낸 사의재가 있는 마을이 동문마을이다. 강진군청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강진경찰서부터 동문마을이 시작된다. 군청은 탑동마을 소속이다. 뒤쪽으로 세무서와 지적공사가 있고, 다시 동쪽으로 사의재가 자리잡아 보은산 아래를 포근히 감싸고 있다. 해남세무서 강진지서가 있는 곳은 조선시대 동헌이 있었을 당시
기획특집
주희춘 기자
2023.01.0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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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강진에는 ‘학원이 신세’라는 말이 있었다. 좀 더 길게 얘기하면 ‘학원이 신세 되어 부렀다’고 했다. 지금 60대 이상의 강진 사람들은 대부분 이 말을 안다. 출향인들도 뚜렷이 기억한다.어떤 사람이 큰 일을 도모하다 실패하거나, 닭 쫒던 개 처지가 됐을 때 ‘학원이 신세’라고 하고 있다. 그 말속에는 약간의 비웃음과 해학이 있었다. 학원이가 누구인지, ‘학원이 신세’라는 말이 언제부터 나왔는지 알지 못했지만 강진 사람들은 무심결에 그렇게 그 말을 재미있게 사용했다. 도대체 학원이는 누구일까.‘학원이 신세’를 추적할 수 있
짜투리
주희춘 기자
2023.01.05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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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묘년 새해가 새롭게 시작됐다. 희망찬 새해지만 걱정도 많은 새해다. 새해 경제는 더욱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우리 강진도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받을 것이다. 이를 이겨내기 위한 노력이 어느때 보다 절실하다. 강진군을 책임지는 군수의 역할도 어느때 보다 중요하다. 강진호의 선장 강진원 군수의 새해 각오를 들어봤다./편집자 주.▶새해가 밝았습니다. 주민들에게 새해 인사 말씀해 주시지요.▷2023년 계묘년(癸卯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지난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굳건하게 역경을 이겨내 주신 군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올
기획특집
주희춘 기자
2022.12.29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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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투각칠보문뚜껑향로(靑磁 透刻七寶文蓋 香爐). 12세기 강진에서 만들어진 상감청자의 걸작이다. 1967년 국보로 지정됐다. 이 상감청자는 세련됨으로 가득찬 고려청자에서 드물게도 다양한 기교를 부린 작품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수다스럽다’ ‘가장 어여쁘다’는 미사여구가 따라 다닌다. 향로는 위로부터 뚜껑과 몸체, 이를 받치고 있는 받침대등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이 걸작을 제일 아래쪽에서 떠 받치고 있는 세 마리의 동물이 있는데, 이 것들이 토끼라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청자의 무늬나 조각에 사자, 오리, 원숭이, 잉어, 용이 있
짜투리
주희춘 기자
2022.12.29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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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에도 많은 사람들이 운명을 달리했다. 3월에는 강진의 1세대 기업인 영동농장 김용복 명예회장이 별세했다. 향년 88세였다. 고인은 군동 석교마을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미군 생활을 거쳐 1979년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서 사막 한가운데서 농경을 하는 영동농장 대표를 10년간 하며 농업인으로 성공했다.이후 국내에서도 신전면 논정리에 간척지를 인수해 강진영동농장을 창업하고 대농을 일궜다. 이후 용복장학회, 한사랑농촌문화재단, 월정어린이복지재단 등을 설립했다. 장학사업과 농민 지원사업을 펼쳤다.4월 중순에는 김식 전 농림부장관이
사회
주희춘 기자
2022.12.22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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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인구감소로 상가와 주택가 크게 퇴조재래시장 살리기와 도시재생사업으로 크게 활성화 동명마을은 강진읍의 심장 강진오일장이 있는 곳이다. 오일마다 심장이 고동치고, 매일같이 사람들이 오가며 피가 돌고 있는 강진의 길목이다. 옛말에 강진오일장은 ‘허천뱅이 장’이라고 불렀다는 말이 있다.허천이라는 말은 몹시 굶주리거나 궁하여 체면도 가리지 않고 함부로 먹거나 덤빈다는 뜻이다. 아무거나 먹는다는 의미인데, 강진장은 무엇이든 가지고 나가기만 하면 팔리기 때문에 허천뱅이장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만큼 강진장은 잘되는 장이었다. 상인들은 무
기획특집
주희춘 기자
2022.12.22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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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 김윤식 선생의 동상을 동초등 앞 동성사거리 회전교차로로 이전하기로 했다. 1979년 지금의 영랑로터리 소공원에 세워진 이후 44년만이다. 그럼 영랑선생의 동상은 누구가 만든 것일까. 이에 대해 성전에 거주하는 서예가 성산 윤봉전 선생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작가는 고정수라는 이름의 조각가이다. 47년생이니까 올해로 만 74세가 되어 조각계에서 원로로 꼽힌다. 조선대 교수를 지내다 지금은 전업작가로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이다. 강진의료원 앞에서 호수공원으로 옮겨진 다산 정약용 선생 동상도 그의 작품이다. 김수환 추기경 동상
짜투리
주희춘 기자
2022.12.22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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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마을은 강진읍의 상업 중심지다. 주요 상가들이 남문마을에 밀집돼 있다. 한편으로 마을의 북쪽은 재미있는 강진의 역사를 듬뿍 담고 있는 곳이다. 오랜 역사와 현대가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는 마을이다.남문마을의 경계는 경찰서앞 길 건너편 청소년문화의집을 시작으로 남쪽으로~ 남문마을은 상가 밀집 지역이기도 하지만 한때 강진의 주요 기관들이 모여있는 마을이었다. 지금은 강진읍 서성리 홍암마을에 있는 도립 강진의료원의 탯자리가 바로 남문마을이다. 지금의 청소년문화의집이 있는 곳이다.1947년 8월 일제가 패망 후 떠나면서 유곽으로 사용되던
기획특집
주희춘 기자
2022.12.19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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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리앞 바다에는 민물장어가 서식한다. 어린 실뱀장어 떼가 해류를 타고 탐진강으로 올라가 몸집을 키운 다음 성어가 되어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 길목이 바로 목리앞이다.오래전부터 목리 사람들은 이 길목에서 장어를 잡았다. 바다에 돌담을 수북히 쌓아 놓으면 7월부터 장어들이 이곳으로 들어가는데 그것을 손으로 잡아 올렸다. 목리에는 이 독특한 방법으로 장어를 잡는 사람이 많을 때는 10여명까지 있었지만 지금은 이금용(68)씨가 마지막 ‘돌담 장어잡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며칠전 이금용씨를 만나 장어잡이 이야기를 들었다. 올해 자연산 장어
짜투리
주희춘 기자
2022.12.19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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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1월 하순부터 한달간주민들이 각 가정 돌며 김장 강진읍 도원마을 사람들은 매년 11월 중순이 되면 가장 바빠진다. 온 마을이 김장준비를 위해 들썩거리기 시작한다.배추와 양념은 각 가정에서 준비하지만 나머지 일은 하나에서 열까지 마을사람들이 함께 모여 일사천리로 진행한다. 올해만 벌써 20여 가구의 김장을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해결했다. 지난 5일 오전 도원마을 김석순씨 집. 150포기의 김장을 하는데 20여명의 주민들이 모였다. 여성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고춧가루와 젓갈을 비롯한 각종 재료를 수북히 준비했다. 이것들을 큰
사회
주희춘 기자
2022.12.08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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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앞으로 탐진강이 흐르는 평화로운 강변마을이다. 이제는 기차가 들어오는 강진역이 들어서 마을 분위기가 크게 변화하고 있다.목리의 옛 이름은 초지(草旨)다. 초지는 소가 먹는 풀을 의미한다. 소를 먹이는 풀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강진읍의 지형은 풍수지리학상으로 “황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 전해왔다. 군동 금사봉에서 읍의 형세를 보면 우두봉이 한눈에 보이고 읍의 형국을 유심히 보면 흡사 황소가 그 턱을 목에 걸고 콧김을 내뿜는 듯한 느낌을 준다. 우두봉은 황소의 머리를 뜻함이요 읍성은 소의 얼굴을 말함인데 양쪽 귀를 넌지시 펼치고
기획특집
주희춘 기자
2022.12.08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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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말 고흥 소록도 앞바다에서 70여년만에 발견된 강진 옹기선은 3명이 탑승하는 배였다. 풍선을 운항하면서 돌발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앞쪽에 두 사람, 뒤쪽에 한 사람의 일손이 반드시 필요했다. 배의 선장격인 사공과 사공을 보좌하는 조동무, 밥하는 화장이 역할을 나누었다. 사공은 배의 왕, 다시말해 최고경영자였다. 배의 안전 운항에서부터 옹기 판매, 시장 분석, 날씨 판단, 판매 후 정산등이 모두 사공의 책임이다. 우선 사공은 뱃길과 관련된 종합적인 정보를 외우고 있는 것은 필수였다.어느 지점에 어떤 암초가 있는지, 어디쯤에
짜투리
주희춘 기자
2022.12.08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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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량 봉황에서 옹기를 팔러가다 침몰한 옹기운반선이 70년만에 발견됐다. 배에 타고 있던 3명의 봉황 주민 유해나 유품은 발견되지 않았다.목포에 있는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올해 고흥군 해역에서 실시한 수중문화재 신고해역 탐사에서 침몰 옹기운반선 한 척이 확인됐다. 연구소는 지난 8월 고흥군 도양읍 소록화도 해역에서 조개를 캐던 잠수사의 신고를 받고 해당 유역에 대한 탐사에 착수했다. 선박은 수심 약 7m 해저에 침몰해 있었으며, 독·장병·뚜껑 등 다양한 종류의 옹기들이 선체에 실려 있었다.이 선박은 봉황옹기마을에서 제
사회
주희춘 기자
2022.12.01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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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남매중 장남이던 부친, 효자로 소문생활비라도 벌어 보겠다고 옹기배 탑승 24세때 집을 나섰던 아버지는 침몰한 배가 70년만에 발견됐다는 소식으로 돌아왔다. 그때 4살이었던 아들은 이제 70대의 노구가 됐다.칠량 봉황마을 박종채(73)씨는 며칠전 목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아버지가 탔던 것으로 추정되는 옹기선이 발견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버지 박순조(당시 24세)씨가 바다에서 실종된 후 70여년만의 소식이었다.박씨는 만감이 교차하며 옛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부친의 시신은 물론 소집품 하나 전달받지 못했지만 배가 발견됐다
사회
주희춘 기자
2022.12.01 1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