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강이 강진만으로 들어가는 길목… 풍족한 마을

 

마을앞으로 탐진강이 흐르는 평화로운 강변마을이다. 이제는 기차가 들어오는 강진역이 들어서 마을 분위기가 크게 변화하고 있다.

목리의 옛 이름은 초지(草旨)다. 초지는 소가 먹는 풀을 의미한다. 소를 먹이는 풀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강진읍의 지형은 풍수지리학상으로 “황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 전해왔다. 군동 금사봉에서 읍의 형세를 보면 우두봉이 한눈에 보이고 읍의 형국을 유심히 보면 흡사 황소가 그 턱을 목에 걸고 콧김을 내뿜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마을에서 부두로 나가는 오래된 골목이다. 
마을에서 부두로 나가는 오래된 골목이다. 

 

우두봉은 황소의 머리를 뜻함이요 읍성은 소의 얼굴을 말함인데 양쪽 귀를 넌지시 펼치고 엎드린 모양은 천만년의 풍우에도 끄떡없는 의연함을 말없이 묵묵히 보여주고 있다.

군청앞에 있던 우물은 원래는 쌍샘으로 황소의 콧구멍에 해당되고 지금의 군청사터는 코등이라고 한다. 초지는 풍수지리적으로 황소가 풀을 뜯어 먹는 곳이라는 의미다.

마을의 동쪽 모습이다. 멀리 있는 고층건물은 평동마을 지역이다.
마을의 동쪽 모습이다. 멀리 있는 고층건물은 평동마을 지역이다.

 

목리에는 큰 다리가 있다. 목리다리라 한다. 목리다리가 들어선 것은 1961년 12월이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중반 탐진강 하구 간척지 공사가 마무리 됐지만 그 후에도 오랫동안 군동 비자동쪽 사람들과 칠량쪽 주민들은 한참을 걸어와서 탐진강을 건넜다.

목리 다리가 들어선 후 주민들의 생활이 획기적으로 변했다. 강진읍과 강진의 동쪽 지역 사람들의 이동이 폭증했다. 동쪽에서 강진읍으로 오가는 학생들이 편리해졌고, 목리에서 동쪽으로 농사지으러 다니는 사람들도 편해졌다. 목리 주민 70여가구가 건너편 학평마을 주변 들에서 농사를 지었다.

마을 복지회관에는 늘 사람들이 북적인다.
마을 복지회관에는 늘 사람들이 북적인다.

 

목리다리는 1997년 위쪽에 큰 새 목리교가 들어서면서 기능이 위축됐다. 구 다리라는 별칭도 붙었다. 그러나 목리주민들에게는 여전히 없어서는 안될 다리로 사용됐다. 2004년에는 상판이 내려 앉아 큰 보수공사를 했다. 다리는 여전히 주민들에게 중요한 농로이고, 계절따라 낚시객들이 숭어를 잡으러 진을 치기도 한다.

최근 목리의 옛 한옥들이 잇따라 새단장을 해 눈길을 끌고 있다. 원형은 그대로 유지하되 현대적 감각과 구조물을 담아 또 다른 생활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인데, 과거와 현재와의 소통 공간을 창조하는 ‘새로운 변화’라는 평가다.

옛 부두자리다.

 

목리마을 서쪽에는 최근 느루라는 커피전문점이 생겼다. 25평 규모의 건물내부는 대들보, 서까래 등 굵직한 틀은 모두 살리고 현대적인 시설만 보강했다.  ‘느루’라는 이름으로 지난 3월 문을 연 이곳은 유수현 前국회의원의 고택을 카페로 개조한 공간이다. 정확히는 옛 사랑채 건물이다.

유 전 의원은 지난 1965년 국회에 입성했다. 해남군수와 무안군수를 역임한 이력도 갖고 있다. 그의 부친(유재의)은 금호그룹 창업자인 박인천 회장이 당시 광주여객(금호고속 전신)을 설립할 수 있도록 재정지원을 해주었던 인물로 강진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거부였다.  

목리장어집이다. 지금은 민물장어만 취급한다.

 

유재의씨 역시 이 가옥에서 거처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의 건물은 모두 20세기에 들어 새로 지어진 건물들이다. 

느루 한옥에서 동쪽으로 100m정도 떨어진 또 다른 한옥도 분위기가 바뀌었다. 강진의 부호 중 한명으로 꼽히는 차동진 선생의 고택이다. 차동진 선생은 연안차씨이며 문절공 운암선생 차원부의 후예다. 

을사년에는 승훈장이 되었으며 같은 해에 정3품인 통정대부에 오른 인물이다. 남을 돕기를 즐겨하면서 그 혜택을 입은 지역사람들이 칭송을 기리는 비를 너 댓 군데에 세웠을 정도로 이웃사람에게 본보기가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강진마을사에 따르면 ‘차동진 고택’은 상량문이 종도리 밑의 장설(長舌)에 가려 정확한 판명은 어려우나 안채가 1900년대 초, 사랑채가 이보다 늦은 1920년대쯤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최근 후손들이 새로운 생활터전으로 삼고자 작업에 나서면서 눈길을 끌고 있다.

강진읍 목리 앞바다는 탐진강과 강진만이 절묘하게 만나는 곳이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민물장어가 많이 잡혔다. 이 일대는 수심과 수온이 장어가 서식하기에 가장 알맞은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강진장어는 예부터 대합과 함께 매우 유명한 특산물로 평가받아 왔다.

장어는 주낙으로 주로 잡지만 갈쾡이, 뜰망, 발, 돌담등의 여러 가지 방법으로도 잡아 낸다. 요즘도 돌담을 이용해 장어를 잡는 전통이 전해져 온다. 큰 것은 몸길이가 60㎝가 넘는 것도 있다.

목리다리 밑에는 오래전에 평상을 깔고 장어요리를 하는 곳이 있어서 여름철이면 전국에서 식도락가들이 몰려들곤 했다. 목리에서 더 이상 자연산 장어를 맛볼수는 없다.

목리마을은 20년전까지 400가구중 절반이 재첩잡이에 나섰지만 지금은 재첩이 거의 잡히지 않는다.  /주희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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