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강진에는 ‘학원이 신세’라는 말이 있었다. 좀 더 길게 얘기하면 ‘학원이 신세 되어 부렀다’고 했다. 지금 60대 이상의 강진 사람들은 대부분 이 말을 안다. 출향인들도 뚜렷이 기억한다.

어떤 사람이 큰 일을 도모하다 실패하거나, 닭 쫒던 개 처지가 됐을 때 ‘학원이 신세’라고 하고 있다. 그 말속에는 약간의 비웃음과 해학이 있었다. 

학원이가 누구인지, ‘학원이 신세’라는 말이 언제부터 나왔는지 알지 못했지만 강진 사람들은 무심결에 그렇게 그 말을 재미있게 사용했다. 도대체 학원이는 누구일까.

‘학원이 신세’를 추적할 수 있는 실마리가 있어 관심을 끈다. 필자가 최근 광양민란 기사를 쓰면서 강진사람들의 관련 내용을 적은 적이 있다. 그속에 ‘김학원’이란 이름이 등장한다. 

1869년 광양민란의 주모자 민회행은 영호남을 돌아다니며 동조 인물을 끌어 모았다. 이 과정에서 1868년 처음 만난 사람이 강진의 김학원이었다. 이어 김학원은 이웃인 강명좌를 끌어들였고, 자신의 처숙인 이화삼을 내세워 강진의 향리 김문도를 포섭했다.

이들이 원래 계획했던 것은 광양읍성 점령이 아니라 전라병영성 공격이었다. 김학원등은 1868년 여름 동조자 25명을 모아 장흥읍에서 무기를 준비했다. 그런 다음 상여속에 병기를 숨기고 병영성쪽으로 행군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장흥읍~ 성불리~ 병영 도룡리 도로다. 이들은 전라병영성 공격이 성공하면 전국의 민란 세력이 동조해 들고 일어날 것으로 믿었다. 그것은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을 의미했다. 거사를 주도한 김학원이 일거에 새로운 지배층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일행이 도룡마을 주막 가까이 왔을 때 엄청난 비가 내렸다. 앞을 분간할 수 없는 폭우였다. 이들은 할 수 없이 거사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이후 장흥에서 다시 회합을 하기로 했으나 그때도 폭우가 내려 계획 자체가 취소되어 버렸다. 칼도 뽑아보지 못하고 일이 글러진 것이다. 

그런데 불행은 김학원에게만 또 찾아왔다. 첩보를 입수한 전라병영성 측이 주동자인 김학원을 체포해 버린 것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광양으로 도망가 그곳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때문에 김학원은 실제 칼을 뽑고 전투를 치렀던 광양민란에는 발도 못 딛은 처지가 됐다. 벌은 벌대로 받아야 했다. 김학원의 신세가 그랬다. /계속 <주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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