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이 신세’란 말이 다른 곳에서 강진으로 유입된 것으로는 보이지는 않는다. ‘학원이 신세’란 소설이 보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강진에서 역외로 유출됐을 가능성이 많다.

강진은 예전에 전국을 다니며 장사하는 병영상인들이 많았다. 강진의 소식이 전국으로 퍼져나가는 전파력이 쎘다. ‘옴천면장 맥주 따르데끼’가 전국으로 퍼져 나갔듯이 ‘학원이 신세’도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까지 나온 자료만으로 결론을 짓자면, 1868년 지금 병영면에 있는 전라병영성을 공격해 세상을 바꿔 보려다 좌절된 강진 사람 김학원의 꿈이 대중의 언어속에 체화되어 ‘학원이 신세’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할 때, 또는 다른 사람의 처지를 안쓰러이 여길 때, 때로는 약간 비꼬는 의미를 담으면서 너도 나도 ‘학원이 신세’를 말하며 울고 웃고 했던 것이다. 

더 특이한 것은 학원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랬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학원이 신세’를 말하다 보니 어느 시점에는 학원이가 누구인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강진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학원이 신세’란 말은 자연스럽게 100여년 이상 동안 흘러 내려왔던 것이다. 

그래서 김학원이란 사람을 우리 강진에서나마 확실하게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추모한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다. 김학원의 행적을 다시한번 정리하는 것으로 ‘학원이 신세’의 세 번째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조선말은 민란의 시대였다. 왕권이 부패하면서 전국에서 민심이 들끓었다. 1868년 강진의 김학원이란 사람도 역린을 꿈꾸었다. 호남의 권력 심장부였던 전라병영성을 공격하기로 했다. 

김학원과 그를 따르는 25명의 동조자들은 1868년 여름 장흥읍에서 무기를 준비했다. 상여속에 병기를 숨기고 병영성쪽으로 행군하기 시작했다. 병영성 공격이 성공하면 김학원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엄청난 비가 내려 거사를 포기해야 했다. 첩보를 입수한 전라병영이 움직이면서 김학원은 칼 한번 못써보고 체포되고 만다. 김학원의 꿈이 좌절되는 순간이었다. 김학원의 신세가 말이 아니었다. 

그후로 오랫동안 강진사람들은 어떤 사람의 큰 계획이 실패했을 때, 닭 쫒던 개 신세가 됐을 때 ‘학원이 신세’라고 했다. ‘학원이 신세’란 말을 계속 살려가 보면 좋겠다.<끝>           <주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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