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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으로 남쪽에 옹기소비 폭증10여척이던 옹기배가 36척으로 증가부산 피난민들이 최대 옹기 소비자옹기가마도 두 개에서 여섯 개로 늘어 1950년 초, 스물일곱살이 됐다. 동생들이 모두 떠나고 혼자 완도와 고흥등지로 옹기를 팔러 다닐 무렵 여순반란사건이 터졌다. 남해안 일대에 비상이 걸리면서 옹기장사도 발목이 잡혔다. 옹기장사를 다닐려면 여행증이 있어야 했다. 그것을 하나 받으려면 강진경찰서 보안과에 가서 이런저런 사상 시험을 치른 후 열흘짜리 여행증을 하나 끊어주는게 전부였다. 옹기배가 한번 나가면 한두달은 그냥 넘기기 십상이였는데 열흘짜리 한 장은 너무 짧은 여행증이었다. 그럼 섬에 돌아다니면서 지서에 들어가 사정을 해야 했다.“당신도 아다시피 옹구를 실어다 물에다 버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08.20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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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세 동생과 고기잡이 생활활어는 청산도 어판장서 일본인들에게 판매25세때 한동네 옹기만드는 집 딸과 결혼결혼 후 두 동생들‘각자 먹고살자’결별주낙배 하지 못하고 다시 옹기판매 나서삼형제의 고기잡이 생활이 시작됐다. 김우식 선생이 스무살, 동생 봉식이 열 아홉살, 영식이 열여섯살 때였다. 김우식 선생이 동생들을 데리고 고기잡이를 한 과정을 보면 1940년대 강진어민들의 고기잡이 활동 범위를 엿볼 수 있다. 그때는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의지해 살 때다.삼형제는 날씨가 좋으면 완도의 청산도와 모도, 여호도 일대에서 고기잡이를 했다. 날씨가 좋지 않으면 강진만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강진만은 그만큼 안전한 곳이였다. 잡히는 어종은 계절에 따라 조금씩 달랐지만 돔과 농어가 주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08.06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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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일보는 강진인물사 ‘아남그룹 김향수 회장’에 이어 옹기배 사공 김우식씨를 연재합니다. 김우식 사공의 일평생은 강진 옹기의 희노애락을 한눈에 보여줍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편집자 주. 돛배에 옹기싣고 부산으로 제주도로옹기는 청자의 뿌리를 이어받았을까. 고려 멸망 후 청자 소비가 급감하자 그 도공들이 서민들을 대상으로 옹기를 만들어 팔았을 것이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구전되는 이야기다. 대구 청자촌과 아주 가까운 곳에 옹기를 만들어 전국에 팔러다니던 마을이 있다. 칠량 봉황마을이다.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200여가구의 1천여명의 주민들이 살았던 마을이다. 마을 나름대로 완벽한 분업체계가 존재했다. 자금을 지원하는 사람, 옹기 만드는 사람, 옹기 굽는 사람, 옹기 팔러다니는 사람...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07.30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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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 열심히 한 이유“부모님 안심시키고 효행의 길 닦는 일이라고 믿었다”김향수 회장은 평생 부지런 함과 검소함으로 산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노년까지 한시도 틈을 가지고 살지 않았다. 반도체 공장을 가동할 때는 60세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야전침대를 놓고 거의 공장에서 살다시피했다. 늦은 밤이나 새벽을 가리지 않고 공장안을 돌아다니며 야간근무하는 기사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또 평생 검소했다. 그는 회고록에 “적어도 수천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사람으로서, 그리고 수십명의 손자가 딸린 할아버지로서 해방 전후와 6.25동란 후의 우리나라의 가난과 어려움을 몸소 겪은 사람답게 그들에게 모범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적었다. 대부분의 식사는 집에서 간단히 해결하거나 구내식당을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07.23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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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산업 진출 5년만에 ‘전자산업의 꽃’ 피워반도체, 칼라 TV 김향수회장 통해 처음 태어나김향수 회장이 한국경제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 국내 최초로 반도체 생산에 성공한 것이였다면 그 기반을 바탕으로 쌓아올린 금자탑이 바로 컬러TV 생산이였다. 김회장은 1969년 반도체 생산과 수출에 성공한데 이어 그로부터 5년만인 1974년 1월 국내 칼라TV 1호를 만들어 냈다. 두가지 모두 한국경제사에 이정표를 세우는 일이였다.김회장이 컬러TV 생산을 처음 추진한 70년대 초반, 우리나라는 대세가 흑백TV였다. 그나마 삼성과 금성의 흑백TV는 품질이 매우 떨어진 것이였다. 일본은 이미 소니와 내쇼날전기, 마쯔시다전기등에서 컬러TV를 양산하고 있을 때다. 컬러TV의 중요성을 인식한 정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07.16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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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반대 물리치고 반도체산업 진출좌절과 고난의 연속… 주문물량 없어 동분서주1960년 4.19혁명으로 국회가 해산돼 의원직을 상실한 김향수 회장은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50대 중반의 일이다. 지금이야 50대가 젊은층에 속하지만 당시만 해도 사회적으로 은퇴를 준비하는 연령대였다. 그는 훗날 자손들이 “우리 할아버지는 1960년대에 조국근대화가 진행중일 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라고 물었을 때 해줘야할 답을 찾고 싶었다. 그것은 새로운 사업이였다.그는 농촌출신답게 산지개발과 작은 계곡을 이용한 발전(發電)사업에 관심을 가졌다. 해남에 작은 시험장도 마련해 도지사등을 초청해 설명회도 가졌다. 그러나 그 사업은 정책적인 지원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07.09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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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국회의원 선거 고향 강진서 무소속 당선김향수 장학회 설립, 많은 학생들 혜택재경강진향우회장도 9년동안 맡아 활동‘기계공업 육성을 위한 자전거 경기법안’입안 5.16으로 무산… 국회의원도 임기도 짧게 마쳐 1958년 4월, 김향수회장이 45세가 됐을 때다. 세계일주를 마치고 귀국했을 때 고향 강진에서 김향수 회장을 국회의원에 출마시키기 위해 주민들이 대거 상경해 있었다. 보통학교 은사님을 포함해 30여명이 올라와 서울역 앞에 있던 호텔에 진을 쳤다. 고향 주민들 중에는 김회장을 무소속 후보로 추대하는 운동을 벌였다가 자유당측에 의해 경찰서로 끌려가 봉변까지 당한 사람도 있었다. 자유당 말기에 가깝던 당시는 경찰이나 자유당 사람들의 행패가 극에 달하고 있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07.02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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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시절 부산서 강진사람 도움으로 자본 융통수입부품 공급 국내자전거시장 90% 이상 장악타고난 사업수완…전쟁 전 보다 더 큰 부자 돼종전직후 서울 명동에서 아남산업 재건‘4대 민의원 선거 출마하라’ 고향서 성화 김향수 회장은 1.4후퇴때 고향 강진에 내려와 잠시 머물면서 재기를 노렸다. 서울의 모든 재산은 포화속에 날아가 버렸다. 남은 것은 피난때 가지고 내려온 금 10냥(100돈)뿐이였다. 김회장은 부산으로 가기로 했다. 무슨 일인가를 해보려면 피난민들이 모여 있는 부산밖에 없을 것 같았다. 7톤짜리 목선을 탔다. 당시에는 강진에서 부산등 전국 각 항구로 이어지는 뱃편이 많을 때다. 군동 백금포와 강진읍 목리, 강진읍 남포에서 화물선과 어선이 출발했다. 김회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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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일보
2013.06.25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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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해 결혼해라’부친 권고에 고향 오승례 규수와 결혼1939년 일만무역공사 창업, 해방 직후 아남산업공사로 개명자전거 부품생산, 식품 유통, 면사판매로 큰 돈 벌어1926년 봄 14세의 나이로 혈혈단신 상경했을 때 김향수 회장의 목표는 경성사범학교에 들어가는 것이였다. 당시 경성사범학교는 서울대 최고 인기학과 만큼이나 문턱이 높았다. 김향수 회장은 그곳에서 필기시험과 면접시험을 무난히 합격했다.그러나 건강이 문제였다. 어릴때부터 있어온 탈장 증세가 문제가 됐다. 결국 그는 불합격 처리돼 경성공립농업학교에 들어갔다. 야간이였다. 일본인 회사에 들어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세월을 보냈다. 넷째 형님이 계셨으나 어려운 살림살이였다. 월급을 받으면 우체국 저금통장에 저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06.18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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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닷다 스승만나 큰 인생 공부15세때 고향떠나 혈혈단신 경성으로고향 강진에 대한 남다른 애정 깨복친구 만나면 만사제쳐 놓고 함께 자리1912년 가난한 선비집안의 7남매중 막내로 태어난 김향수 회장은 현대사의 굴곡을 평생동안 겪었던 사람이다. 그가 태어난 해인 1912년은 한일강제합병이 이뤄진지 2년째 되던 해였고, 그가 고향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교육받던 시기는 일제치하였다. 또 8.15 해방을 맞고 나서는 5년후에 6.25 전쟁이 일어났고, 이어 사업을 한창 벌이고 있을 때 4.19 의거와 5.16 군사혁명, 10.26 사태, 80년 광주민주화운동등 파란만장한 세월이 이어졌다.그는 1993년 발행한 자신의 회고록 ‘작은 열쇠가 큰 문을 연다’에서 “나는 나라를 빼앗긴 일제 식민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06.11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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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후반 강진청자 세계화 꿈일본에 도자기사업 모색하러 갔다가‘산업의 쌀’ 반도체 사업 첫 만남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 초석닦아 1983년 어느날이다. 지금은 반도체로 먹고 살고 있는 삼성그룹의 고 이병철 회장은 본격적인 반도체 사업 진입 여부를 놓고 고심중이였다. 엄청난 초기투자금이 들어가는데다 당시만 해도 반도체산업의 미래가 불투명할 때였다. 그때 이병철 회장을 만난 사람이 아남산업의 김향수 회장이였다. 아남산업은 1970년 이미 반도체조립생산을 시작한 우리나라 반도체산업의 선구자였으나 자본력이 삼성 만큼은 되지 못했다. 김향수 회장은 이병철회장에게 “삼성 같은 대기업이 반도체 사업을 벌여야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다"며 강력히 권고했다. 이때는 참 애매한 상황이였다. 아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06.04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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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와 타협없는 갈등, 5·18단체와도 대립‘진정 5월 정신 계승하는 모습없다’한탄파란만장한 삶 뒤로하고 2007년 9월 폐기종으로 사망 역사에 남을 야인,‘민중이 주인이다’그의 뜻 되새겨야윤한봉 선생은 1993년 5월 19일 LA발 서울행 대한항공 귀국 비행기에 오른다. 12년만에 꿈에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가는 순간이였다. 그는 비행기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온갖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다.‘서른네살에 왔다가 마흔 여섯 살이 되어 돌아가는 구나.... ... 캄캄한 밤에 외항선에 숨어타고 떠나온 조국에 백주 대낮에 보란듯이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는 구나. 떠나 올때는 36일이었는데 돌아가는 길은 12시간이구나. 떠날때는 화장실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지금은 동행자들과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05.28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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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4회째 강진서 행사 윤한봉선생의 뜻 매년 기려후술하겠지만, 윤한봉 선생은 2007년 6월 27일 지병인 폐기종으로 61세의 나이로 서울 영동세브란스병원에서 별세했다. 그를 기리는 (사단법인)윤한봉 기념사업회가 광주에서 운영중에 있고, 또 4년전부터는 5.18민중항쟁기념사업 강진행사위원회가 합수 윤한봉배 족구대회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합수는 재래식 화장식의 똥을 의미하는 옛 말로 윤한봉 선생의 아호였다. 올 윤한봉배 족구대회는 지난 12일 국민체육센터 족구장에서 열렸다. 대회에는 모두 12팀이 참가해 열띤 경기를 벌였다. 식순에는 윤한봉 선생의 기리는 내음이 가득했다. 윤한봉 선생의 약력이 소개되고, 윤한봉 선생의 가족이 인사말을 했다. 채일손 강진행사위원회 위원장은 “오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05.14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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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를 두 번 넘어 미국으로… 시애틀에서 교포도움 받으며 연착륙밀항선 떠난 후 한국과 미국 인권운동가들 긴박한 연락미국도착 4개월 후 교포들 가장 많이 사는 LA로 이주윤 한봉선생이 1981년 4월 29일 마산항에서 밀항선에 올라 미국에 도착하기까지는 35일이 소요됐다. 화물선은 호주에서 알루미늄 원광석을 싣고 미국 서북부의 워싱턴주 벨링햄으로 가는 항해일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밥을 먹은 것은 여덟차례 뿐이였다. 나머지는 매일 잣 3알과 멸치하나, 마른새우 하나씩을 먹었다. 표범호란 화물선에 몸을 실을 수 있었던 것은 이 배의 선원이었던 두명의 후배덕분이였다. 후배들은 배에 타기 전부터 배에 오른 후 다른 사람의 눈에 띠지 않고 미국에 도착하기 까지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05.14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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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운동, 기독교운동, 여성· 문화운동등 다양한 활동70년대 광주· 전남지역 거의 모든 운동의 기초 닦아민청학련 사건으로 제적,‘똥가방’메고 다니며 동가숙서가식77년 박정희 암살계획 수립, 79년 10월 부마항쟁 보고 큰 충격윤한봉선생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15년에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고 안양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다가 10개월 만인 1975년 2월 15일 대통령 특별조치로 석방됐다. 그의 삶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민주화운동의 길로 접어 들었다고 할 수 있다. 민청학련으로 함께 구속됐던 사람중 8명이 인혁당을 재건한다는 누명을 쓰고 4월 9일 8명이 사형당한 것도 윤한봉 선생이 마음을 다잡은 큰 사건이였다. “감옥살이를 하면서 수없이 되풀이해서 반성한게 아하~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05.01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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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제가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싸우기로 했습니다” “그래 해라. 그런데 앞장만 좀 서지 마라”전국 대학연계 민주화운동 계획, 긴급조치 4호 발동으로 무산민청학련사건, 군사법정회부 징역 15년자격정지 15년 선고... 10개월 수감생활민청학련(민주청년학생 총연맹) 호남지역 총책임자가 된 윤한봉선생은 전북대와 전남대, 조선대 학생들을 차례로 만나며 시위를 계획해 갔다. 1973년 후반기의 일이다. 접촉장소는 외지로 했다.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주로 대전, 속리산, 조치원, 천안등이 그들의 만남의 장소였다. 민청학련의 최종 목표는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를 중심으로 서울지역 대학의 연계망을 구축하는 것이였고 이를 통해 서울대와 경북대, 전남대를 연결해 전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04.24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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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농대 학생회 선거참여… 지지후보 당선초창기 시험부정예방·학생회비 인상반대투쟁 주도 1972년 10월 17일 유신헌법이 통과된 후 휴교령이 내려지자 윤한봉은 잠시 고향에 내려온다. 자신의 표현대로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을 때였다. 고향에서 마음이라도 좀 추스려 볼 참이였다. 그런데 고향에서도 비참한 모습이 이어지고 있었다. 윤한봉은 ‘5․18 항쟁사 정리를 위한 인물사 연구’ 녹취록에서 “고향에서 충격적인 일을 겪었다”고 표현했다.그것은 교육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였다. 윤한봉의 초등학교 동창들 중에서 교사가 된 사람들이 몇 사람 있는데 두 명이 칠량초등학교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이들이 위에서 내려온 지시에 따라 학생들을 데리고 다니며 10월 유신 지지행진을 하고 있는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04.16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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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가쁜 고난과 투쟁… 희생과 역경으로 점철된 삶 살아70· 80년대 독재정권과 싸웠던 사람들 중에 윤한봉만큼 사람들에게 강렬하게 각인된 이름도 드물 것이다. 그는 늘 역사의 뒤쪽에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독재자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인물이였고, 때론 동료들한테도 가장 껄끄러운 사람이였다. 독재자들에 쫒겨 민주화세력의 등에 떠밀려 그는 1981년 4월 29일 화물선을 타고 미국으로 밀항했다. 그곳에서 해외민주화운동이라는 것을 했다. 그는 수배가 풀려 귀국해서도 정권과 싸웠고, 5.18 세력과도 대립했다. 2007년 6월 폐기종으로 사망하기까지 그의 인생은 영원한 야인이였다. 그의 삶을 따라가 본다. /편집자 주.=================================================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04.09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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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명예로운 삶 살았던 강진출신 참 군인 서울지하철에 ‘말죽거리역’이름을 남겼다 김재명 장군은 서울지하철공사 사장으로 재직중일 때 강진사람을 많이 썼다. 현재 서울메트로(구 서울지하철공사)에 근무하는 사람들과 지역인사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김재명 사장 시절 서울지하철공사에 취직한 강진사람들이 줄잡아 100여명은 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서울지하철 2, 3, 4호선 운영에 필요한 기술 및 사무인력이 7,000명이였다. 그중에 강진사람이 100여명 들어갔으니까 극히 일부의 숫자이기는 하다. 그러나 80년대, 호남사람들이 공기업 들어가기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 만큼이나 어려웠던 시절 서울지하철공사는 그나마 강진사람들이 괜찮은 직장에 들어가는 큰 통로였던 것이다. 8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04.02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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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관도입 계약서 꼭 한글로 써라’관철‘차관도입하면 리베이트 받는다더라’소문 끝내 허위로 판명김재명 장군이 서울지하철공사 사장으로 취임한 1981년 9월 무렵은 서울의 지하철 전망이 암울한 때였다. 서울시는 1966년부터 지하철 추진했으나 1호선을 착공한 것은 71년 4월이였다. 서울역~ 청량리까지 9.54㎞를 놓는데 6년이 넘는 기간이 소요돼 77년 10월에야 완공을 보았다. 순환선인 2호선은 77년 4월에 착공돼 80년 들어서도 공사가 계속되고 있었다. 모든 구간이 돈 부족으로 공사가 지연되고 연기되기를 반복했다. 여기에 1978년 이미 지하철 3, 4호선 공사 계획을 확정한 상태였다. 정부와 서울시가 지하철 3, 4호선 건설을 위해 짜낸 묘안이 민자를 유치하는 것이였다. 정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03.26 1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