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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식선생은 흔히 4만석지기였다는 말이 전해온다. 4만석을 수확하는 농경지를 가졌다는 말이다. 그럼 4만석지기란 어느 정도의 규모일까. 1석지기는 2천평, 논으로 열마지기를 지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4만석은 논이 8천만평이라는 뜻이다. 그럼 논 8천만평은 어느 정도의 크기일까. 농촌에서 흔히 사용하는 단위로 8천만평은 논 40만마지기를 나타낸다. 그럼 40만마지기는 어느 정도의 크기일까. 40만마지기는 2억6천446만2천㎡이고, 264.46㎢이다. 일반인들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감이 오지 않은 규모다.이를 좀 더 알기쉽게 강진군의 면적으로 따져보자. 강진군의 면적은 바다와 산, 들을 포함해서 500.28㎢이다. 강진만을 포함해서 강진땅을 딱 절반으로 나누면 그 땅이 모두 김충식씨의 논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2.05.22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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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시설물도 사재로 건립해 강진교육 산실 마련 유재의씨도 산 21만평 기증해 농업학교 근간갖춰동은선생은 대체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는 엄격했던 반면 명분있는 일에는 아낌없는 기부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은선생과 형제들의 관계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지금도 재산이 많은 집안이 종종 그렇지만 동은선생 집안도 일부 형제들 사이가 그렇게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은선생 바로 아래 동생인 후식씨는 다리를 약간 절었다. 그 이유가 이렇게 전해온다. 후식씨가 형님인 동은선생에게 재산분배 문제로 갈등이 있었다. 한번은 후식씨가 권총을 들고 재산을 더 주지 않으면 자살을 하겠다며 형님앞에서 시위를 벌인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방아쇠를 잘못당겨 자신의 다리를 쐈다. 다행히 총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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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05.22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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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 결혼... 아들 넷, 딸 셋 둬동생 아들 병국씨는 미국경제학박사 1호 동은 김충식선생의 가계도를 잠시 살펴보자. 장남이었던 동은선생은 네명의 남동생과 두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또 직계 자손으로는 병채, 병석, 병길, 병준등 네명의 아들과 옥자등 세명의 딸을 두었다. 동은선생 형제들의 이름은 후식, 정식, 양식등이었다. 첫째동생인 후식씨는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사람이다. 4.4만세운동이 있던날 후식씨는 보은산에서 태극기를 게양했다가 체포돼 재판까지 받았다. 둘째 동생인 정식씨는 아들들이 학문을 했다. 정식씨의 큰아들인 병국씨는 미국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우리나라 미국 경제학박사 1호로 통한다. 병국씨는 서강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던 지난 1987년 강진읍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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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05.15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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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요한 투자기질 개성상인들 콧대 꺾었다금익증권, 명치택시 창업... 조선최고 부호 꿈꿔 강진에 김충식이 있었다면 영암에는 현준호란 걸쭉한 부호가 있었다. 현준호씨는 1920년 호남은행을 창립했고, 훗날 영암 서호면에 간척사업을 벌여 200만평의 학파농장을 경영하던 기업가였다. 호남은행에는 동은선생도 주요 주주로 참여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무언의 경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단 땅은 동은선생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지만 현준호씨는 은행장으로서 자본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터라 그 힘은 막강했다. 이런 구전이 있다. 한번은 현준호씨가 조선총독 면담 신청을 했다. 김충식씨의 해운회사인 금릉회조부가 목포를 중심으로 한창 세를 불리고 있을 때였다. 면담이 쉽게 성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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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05.15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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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식 선생이 한창 활동하던 1930년대 강진의 땅 부자들은 누구누구가 있었을까. 지난호에 소개했듯이 당시 동은선생이 소유한 토지는 논이 845정보, 밭이 57정보, 기타 313정보등 모두 1천215정보였다. 전남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당시 전남지역에는 50정보 이상의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268명이였다. 보통 50정보는 되어야 지주소리를 들을 때다.그럼 강진은 50정보 이상을 가진 사람이 몇 명이나 됐을까. 장시원이란 학자의 ‘일제하 조선인 대지주의 자본전환에 관한 연구’란 논문에 따르면 강진에는 50정보 이상 땅을 가진 사람이 13명이었다. 동은선생 다음으로 땅을 많이 가지고 있던 사람은 작천의 박봉래라는 주민으로 논이 325정보, 밭이 17정보, 기타 20정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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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05.08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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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 난 승부사... 재산축적 큰 몫일부 지인들 “과장된 부분 많다”김충식 선생의 이야기가 나올 때면 빠지지 않은게 노름을 잘했다는 것이다. 노름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는 구전이 전해온다. 그와 관련된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한번은 김충식이 목포(군산이라는 말도 있음)에서 노름을 하는데 엄청난 돈을 거머쥐었다. 돈을 짊어지고 방을 빠져나오고 싶은데 그런 배포가 없어 주저주저하고 있었다. 그때 강진의 벗인 차종채씨가 갑자기 노름방 문을 박차고 뛰어들어 왔다. 그러면서 김충식에게 고함을 쳤다. “이놈아 너는 니 어머니 기일도 지내지 않고 노름이냐. 얼른 끝내지 못해?” 나중에 이야기 하겠지만, 차종채는 ‘남도의 호랑이’라고 불릴 정도로 인상이 험악하고 목소리가 우렁찼다. 김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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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05.01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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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초 근대적 농업경영회사 동은농장 설립마름중심 토지경영에서 농장중심 체제로 변신장남 병채씨 화순 지주 동복오씨 집안과 혼인아버지 재산 받지 못하고 46세에 요절동은 김충식 선생은 30세를 전후해서 아버지로부터 3천~4천석 소출의 토지를 물려 받았다. 그의 아버지 김영준 선생은 동생들이 장성한 후 재산을 다시 분배할 것을 전제로 모든 토지를 동은 김충식 선생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 동은선생은 3천석 소출의 토지를 10여년만에 4만석 소출의 토지로 재산을 늘리는데 성공한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 나오는 최참판댁이 만석지기였다. 김충식 선생은 4만석지기였으니 그 규모를 상상하고도 남는다. 그는 어떻게 그 많은 돈을 벌었을까.조선시대 지주들의 재산증식 방법은 일반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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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05.01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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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일보는 강진인물사를 새로 연재합니다. 강진인물사는 강진의 역사를 되짚어 보고 우리 조상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신비한 여행이 될 것입니다. 독자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사랑 바랍니다./ 편집자 주.--------------------------------------------------------------------------1950년대 초반 재산평가 77억환지금 돈으로 1조2천억원 가치1943년 연세대의대에 1억원 기부도1942년 어느날, 서울에서 강진으로 내려 오던 거부 김충식은 중풍으로 쓰려졌다. 김충식은 평소 고혈압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다. 이때 서울에서 강진까지 내려 온 의사가 있었다.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최동 박사였다. 최동은 구급차를 이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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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04.25 1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