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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등 신군부에 눈엣가시… 육군대장 꿈 이루지 못하고 전역1981년 9월 서울지하철 공사사장 취임, 새로운 도전 시작1977년 정전위대표 시절, 회의 전날부터 물한모금 안먹어1979년 작전참모부장(소장) 됐으나 신군부에 의해 중장진급 좌절1977년 8월 19일 판문점 UN군사정전위 회담장. 1953년 7월 정전위가 구성된 후 379차 회의가 열렸지만 이날 만큼 긴장감이 흐른날이 없었다. 그 전날, 그러니까 18일 오전 10시 45분, 판문점 회담장에서 불과 수백m 떨어진 공동경비구역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유엔군측 제3초소 앞에서 북한군이 미루나무를 손질하던 미군병사 2명을 도끼와 쇠망치로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소위 ‘8.18 도끼만행사건’ 이였다한국와 미국의 의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03.20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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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유학 5년… 빵공장 다니며 생활비 벌고월남전 참전 4년… 정보참모 맡아 심리전 주도 한미참모단장 5년… 미군과 동등한 국군위치 정립유학 후 고향에 부친 짐 속에 전투교본 뿐몸에 베인 청렴… 명예로운 군인생활 택해 우리나라의 정규육사는 미국 군사고문단의 지도를 받으며 미국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식 교범과 훈련방식을 채택했다. 미군은 6.25를 치르면서 한국군의 군사력 강화를 절감했다. 국방부와 미군은 국군장교들을 뽑아 미국 현지 군사학교에서 교육을 시키기로 했다. 6.25 전쟁에서 능력을 검증받은 육사 출신들이 교육대상이 됐다. 김재명 장군은 55년 소령 시절 첫 기수로 미국의 특수전학교 유학생으로 뽑혀 첫 도미길에 올랐다. 당시 한국군 장교들 사이에는 미국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03.12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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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탱크 부수겠다’육탄용사 자원, 출전 직전 후퇴 7월 1일 충남 대전에서 소위임관… 본격 전장터로 강진농고를 졸업한 김재명 장군은 1949년 7월 15일 서울 태능에 있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다. 함께 입학한 동기가 312명이였다. 그의 나이 18세때의 일이다. 육군사관학교는 49년 입학한 1기수를 제10기로 본다. 1기수가 10기수가 된 것은 그 전 졸업생들은 일제강점기와 겹쳐 기수에 포함되지 못하다가 나중에 육사 기수를 정리할 때 기수에 포함시켰다. 그렇게 되면서 김재명 장군이 포함된 1기가 10기수가 된 것이다. 육사가 명실공히 대한민국 육군장교 배출의 산실로 자리잡기 시작한게 이때부터다.이때 육사가 처음으로 2년제가 도입됐다. 10기 생들이 1학년이였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02.26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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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이번주부터 강진인물사 5편으로 전 서울지하철공사 사장 김재명 장군을 연재합니다. 칠량에서 태어난 김재명 장군은 우리나라 군 역사는 물론 서울 지하철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입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편집자 주 ==================================================================================끊임없는 도전과 시련대한민국 발전 기틀마련1984년 10월 13일자 뉴욕타임즈 신문. 서울발 기사로 거미줄 처럼 모양이 잡혀가는 서울지하철 관련 특집기사가 게재됐다. 기사중에 한 사람의 멘트가 눈에 띤다.“인류역사상 105㎞의 지하철을 일시에 건설한 예는 없다. 그러나 우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02.19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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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강요된 삶… 국악계 외면, 가족도 모두 떠나1994년 6월 서울 면목동 지하셋방서 쓸쓸히 숨져병영 예술의 마지막 세대그녀의 삶은 참으로 척박했다함동정월이 나이 50이 넘어 만난 사람이 판소리 고수 김명환이였다. 김명환은 곡성 출신으로 유명한 고수였다. 20대 후반부터 중앙무대에 진출하여 판소리 공연에 참가했고 기량의 출중함과 판소리 이론의 탁월함이 인정돼 이른바 서울에서 이름을 날렸다. 그는 1978년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고법 예능보유자로 지정된다.그러나 함동정월이 그를 만났을 때 돈 없는 한량이였다. 곡성군 만석꾼의 7남매중 막내로 태어난 김명환은 북과 판소리에 미쳐서 가산을 모두 탕진한 상태였다. 함동정월의 말에 따르면 “누구도 옆에 두고 북을 치게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02.06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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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사람 다섯번째 소실로 들어가 자식 7남매 낳아둘은 6.25때 죽고 하나는 교통사고로 잃어함동정월이 서울의 조선권번에 적을 두고 한창 이름을 날리고 있을 때 그녀의 삶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틀어진다. 조선권번 생활 2개월 보름만의 일이였다. 정 아무개라는 서울 남자의 아이를 가진 것이다. 남자의 나이는 53세였다. 함동정월의 나이 스물 한 살때의 일이였다.정씨는 함동정월이 자신의 아이를 가진 것을 알고는 두말 하지 않고 손목을 붙잡고 집으로 데려가 버렸다. 정씨의 집은 난관이였다. 자신은 다섯 번째 소실이였다. 아이가 수십명이 됐다. ‘밥하고 빨래하고 애기 낳는 일’이 반복됐다. 가야금은 만저볼 수가 없었다.정씨의 네번째 소실인 김 아무개씨는 조선권번에서 춤을 추던 무희출신이였다. 이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01.30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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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생활 접고 21세에 서울로 가 유명 조선권번에 등록김소희·박초월등과 어깨 나란히… 명월관 최고명기 이름날려 서울 좋은 생활 두달반, 다섯 번째 첩으로 들어가예술생활 사실상 끝… 인생의 큰 아픔 시작돼함동정월이 열아홉살(1935년) 먹던 봄날, 그러니까 ‘공부’ 시작한지 7년만이다. 광주에서 열린 콜롬비아레크드회사 주최 콩클대회에서 최연소로 일등을 한 함동정월은 일본으로 건너가 음반을 취입할 수 있는 특전을 얻는다. 그러나 가지 않겠다고 했다. 더 공부를 해서 가겠다고 떼를 썼다. 콜롬비아레코드사 이하윤 문예부장이 함동정월의 도일을 적극 추천했다.이하윤은 동국대학장 출신으로 시인이였다. ‘이풍진 세상’이란 일본노래를 개사해 한국어로 소개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이 풍진 세상’은 일본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01.22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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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창 송만갑씨‘육자배기’듣고 판소리 공부 결심목포 권번등록후 본격 기예생활… 무안 목우암서 100일 판소리 공부19세때 콜롬비아레코드사 콩클대회 최연소 1위일본으로 건너가 음반취입 ‘국제무대 첫선’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전남지역(지금의 광주광역시 포함)에서 예술이 유명한 곳이 아홉군데가 있었다. 지금 말이니까 예술이지, 당시에는 일종의 고급 기생문화였다. 병영, 장흥, 강진읍, 보성, 해남, 영암, 능주, 화순, 광주가 그곳이였다. 밑기지 않지만 이중에서 가장 유명한곳이 바로 병영이었다.함동정월의 자서전적 책 ‘물은 건너봐야 알고...’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온다. ‘병영을 가운데 두고 장흥, 강진읍, 보성, 해남, 영암, 능주, 화순, 광주가 쫙 연결돼 있었지. 그중에서 병영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01.15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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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 잡아 먹은’가야금 솜씨… 목소리에는 관능미 넘쳐강진일보는 강진인물사 제4편 함동정월편을 연재합니다. 함동정월은 병영출신으로 무형문화재 23호 가야금 산조부분 예능보유자였으며 최옥산류 가야금 전승자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가야금 산조의 최고봉에 선 명인이면서도 사회의 무관심속에 고통받으며 살다간 불행한 예인이였습니다. 함동정월의 예술흔적을 더듬는 길은 우리 강진의 예술역사를 따라가는 길입니다. 독자여러분의 많은 성원바랍니다. /편집자 주. 전라병영성이 국악입문 기반열한살 때 권번에 입문 기예수업받아똥물 먹으며 판소리 연습10대에 판소리, 가곡, 가야금 두루 섭렵1938년 8월 어느날 시인 정지용이 강진에 내려왔다. 그는 병영에서 당시 스물한살이던 함동정월의 가야금병창 ‘상사가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01.02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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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선배재현들을 찾아 떠나는 역사여행모두가 훌륭한 인물독자들의 다양한 참여 바라강진일보는 1월 창간 후 4월 24일자 제 14호 신문에서부터 ‘강진인물사’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제1화는 강진의 전설적인 부호 김충식(1889~1953) 선생을 10회에 걸쳐 조명했고, 제2화는 비운의 공산주의자 윤순달(1914~?)을 9회에 걸쳐 연재했다. 이어 제3화로 독재에 항거했던 윤기석 목사(1931~ 1997)를 8회에 걸쳐 잇따라 조명했다. 총 27회에 걸쳐 계속된 기획시리즈였다.독자들의 반응은 지대했다. 막연히 ‘갑부’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김충식 선생이 연세대 의대에 거액을 기부했고, 총 자산이 지금 화폐가치로 1조2천억원에 이른다는 사실이 새삼 확인되면서 1930~1950년대에 걸쳐 강진사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2.12.11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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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8월 소천... 솜털처럼 가벼운 몸 내려놓아이 땅의 암흑시대에 밤하늘의 별처럼 한 시대를 살고 간 사람육체적 고통딛고 가장 빛나는 삶 실천1990년대로 들어오면서 윤기석 목사는 몸이 쇠약해진다는 것을 자주 느낀다. 회고록 에는 그의 일기가 들어 있는데, 이 시기에 건강에 대한 걱정과 그러면서도 하루하루 심방하고 기도할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드린다는 내용이 무척 많이 눈에 띈다.90년 8월 5일자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무더운 여름은 천식 환자인 나로서는 견디기 힘든 나날이다. 이제는 몸이 많이 힘들다. 병원 치료를 받고 오면 몸이 조금 좋아진다. 그러나 나에게 몸을 돌볼 시간은 없는 듯 하다. 계속되는 심방과 새벽 기도는 육체
강진인물사
주희춘
2012.12.04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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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9월 광주한빛교회로 임직어두웠던 80년대 온몸으로 부딪혀1975년 8월 도암교회에서 강진읍교회에 부임한 후 10.26사태를 맞았고 5.18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윤기석 목사의 삶은 ‘형제의 아픔을 위해, 소외된 민중의 아픔을 위해’ 보낸 일관된 생이였다. 김목사는 연약한 형제와 고난당하는 이웃을 돌아보는 것은 교회가 마땅히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또 강진읍교회의 자랑이며 전통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자서전에 1979년 강진읍교회 김유웅 집사(현재는 장로)가 농촌교회 설립유공자로 노회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은 것을 큰 기쁨으로 소개했다. 윤목사는 김유웅 집사가 어려운 농촌교회 목회자의 생활보조금을 매월 배후에서 말없이 지원해 왔고 군동면 계산교회와 칠량 송산교회등에
강진인물사
주희춘
2012.11.27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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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석 목사는 배영석 목사 추모비 건립을 추진한다. 1978년은 8월은 배목사가 순교한지 30주년되던 시기였다. 요즘에 배영석목사 순교정신계승 강진군민 배구대회가 7회째가 열리고 있지만 배목사는 6.25때 순교한 강진기독교계의 정신적 지주였다. 6.25 강진읍교회 담임목사였던 배영석 목사는 지역에서 대표적인 우익단체였던 국민회부회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교인들은 배목사에게 피난을 갈 것을 권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를 뿌리쳤다. 살벌한 전쟁터에 교인들만 두고 혼자서 피난을 갈수는 없다는 입장이였다. 강진은 7월 31일 함락된다. 강진에 인민군이 진주하면서 종교인들과 우익인사들이 표적이 됐다. 8월 4일 오후 강진읍시장에서 인민재판이 열렸다. 국민회장 차래진씨와 부회장이던 배영석 목사, 칠
강진인물사
주희춘
2012.11.13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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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8월 양림교회‘유신헙법 철폐’기도회 후 첫 구속광주교도소에서 1년 옥살이 어려움 속 강인함 더 빛나1975년 1월 광주 양림교회에서 구국기도회를 열면서 창립된 선교자유수호위원회의 반정부성격의 기도회는 계속됐다. 윤목사는 자유선교위원회의 서기였다. 그해 8월까지 전남지역에서만 열여덟 차례 기도회가 열렸다. 3월 25일 열린 제15회 기도회에는 결의문도 채택했다.결의문 내용은 ‘첫째 반공에 투철한 구속된 성직자들을 즉시 석방하라, 둘째 명동사건은 애국심의 발로이며 신앙양심의 고백이다, 셋째 유신헌법을 철폐하고 민주헌정을 회복하라, 넷째 우리 교회는 이 일이 성취될 때까지 살아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고 공동운명체로서 활동할 것을 굳게 다짐한다’ 였다. 이 결의문은 윤기석 목사와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2.11.06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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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3월 1일 삼일기도회 개최일부 신자들 반대목소리 ‘죽으면 죽으라’ 원칙으로 극복강진읍교회로 옮긴 후 유신항거 투쟁 본격화강진에도 민주화운동 세력 서서히 무르익어윤기석 목사가 도암교회에서 강진읍 교회로 옮긴 1975년은 전국적으로 민주화운동이 본격적으로 분출할때와 궤를 같이 한다. 종교단체와 농민단체, 노동자단체, 대학가를 중심으로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움직이 폭발했다. 사태는 긴박하게 돌아간다. 그해 1월 13일 광주 양림교회에서 개헌서명을 위한 한국기독교장로회임시노회가 열렸다. 서울에서는 이미 유신철폐에 대한 백만인 서명운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전남지역 개헌서명운동은 광주양림교회 개헌서명이 처음이였다. 당시 임시노회를 주도한 사람이 노회 서기를 맡고 있던 윤기석 목사였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2.10.30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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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독재정권보며 사회정의 일으키기로 결심1971년 도암에 민주주의수호협의회 창립강진의 민주화운동 불씨 집혀74년 ‘구속자를 위한 기도회’ 처음 개최75년 2월 민주회복국민회의 강진군지부 결성도암교회는 원래 도암면 항촌마을에 있었다. 1933년에 지어진 오래된 교회였다. 그러다가 1965년 봄에 현재의 장촌리로 이전을 했다. 윤기석 목사가 1966년 3월 3일 지석교회에서 도암교회로 부임했으니까 교회를 옮긴지 딱 1년만의 일이다. 도암교회는 당시 항촌마을에서 옮겨온 그대로 아담한 한옥이였으나 윤목사가 석조교회당 건립을 추진했다. 도암교회가 석조교회당을 짓기까지 일화는 유명하다. 1969년 모래작업을 시작으로 약 4천여장의 돌을 신도들이 지금의 신전면 수양마을과 인근 하천에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2.10.16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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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대 마친 윤기석 고향행 결심... 도암 지석리서 개척교회 시작극심한 천식 때문에 육군사관학교를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 온 윤기석은 삶의 의미와 의욕을 잃어버렸다. 윤기석은 자신의 자서전인 ‘죽고자 하면 살고...’에서 “하루의 길이가 몇배로 늘어난 것 같았다”고 귀향 직후의 심정을 토로했다. 장군이 되어 금의환향하겠다는 청년의 꿈이 산산히 부서진 나날들이였다.그러나 청년 윤기석은 얼마 후 전혀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된다.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마을에 항촌교회가 있었다. 그는 신자가 아니였다. 교회나가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장군의 꿈을 포기하고 깊은 절망의 심연에 빠져 있을 때 그는 고개돌려 교회를 보았다. 거기에 믿음이 있었고 사람이 있었다. 윤기석이 고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2.10.09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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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강진인물사 3번째 연속기획으로 윤기석 목사를 시작합니다. 도암 항촌 출신의 윤기석 목사는 70· 80년대 강진에서 목회활동을 하면서 민주화운동에 헌신, 어두운 시대에 큰 등불을 밝혔던 분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제언과 관심 부탁드립니다./편집자 주. 절대권력과 독재권력에 맞섰던 ‘의인’옳지 않으면 절대 불복민초에게 큰 힘 있다는 사실 일깨워전두환 노태우와 육사동기현대사의 극명한 삶으로 대비돼 1980년 9월 전두환 정권의 칼날이 서슬퍼렇던 어느날이다. 강진에 청와대 핵심인사 한명이 내려왔다. 이 사람은 강진읍교회에 시무중이던 윤기석 목사를 만났다. “각하께서 목사님께 도움을 청하고 계십니다. 국가를 위해 큰 일을 함께 해 보자시는게 각하의 생각이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2.09.25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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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와 가해자, 좌익과 우익 모두 아우르는 화해필요다른 지역들 화해작업 활발... 강진은 침묵했다영암 구림마을, 좌우익 모두 포용하는 화해화해와 용서의 성지돼“지금부터 강진도 그렇게 해보자” 노무현정부들어 본격화된 과거사 진실규명은 각 지역별로 많은 진척을 거듭해 왔다. 좌익이나 우익이나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기념비 건립등이 광범위하게 진행됐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현지 주민들의 신고를 통해 조사된 결과를 가지고 진행되면서 주민들이 신고조차 하지 않은 지역이나, 신고를 해도 그 규모가 미미한 지역은 관심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또 피해가 확인됐더라도 이해당사자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은 지역은 상대적으로 명예회복 정도가 적은 현상들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2.09.18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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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진상조사 강진지역 제외...2005년 과거사 정리위원회 조사때도 단지 8건 신청 조사후 국가사과, 위령탑건립등 이끌어 내야지역내 각종 6.25 관련 역사기록도 정정할 부분 많아 6.25직전 보도연맹 학살을 시작으로 해서 8월 1일 인민군이 점령한 후 2개월 동안 계속된 우익인사 살육, 다시 10월 5일 경찰이 강진을 수복한 후 몇 달 동안 진행된 좌익 학살은 강진사회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은 아픔의 역사다. 단지 5~6개월 정도사이에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가장 슬픈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념도 아닌 것이, 사상도 아닌 것이 한 지역에서 얼굴을 맞대고 살던 사람들을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전을 벌이게 했다.이런 역사를 가진 곳이 어디 강진뿐이랴. 동족과 동지역민을 서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2.09.11 10: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