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으로 간 윤순달 김일성이 간첩혐의씌워 탄압1953년 8월 징역 60년형 선고받고 복역지금 살아있으면 98세... 훗날 그의 삶은 어떻게 평가받을까 2개월 동안 피난생활을 청산하고 1950년 10월 초 강진으로 돌아 온 경찰은 강진군청에서 시국수습대책위원회를 개최했다. 이때 가장 중요하게 거론된게 인민군에 부역한 사람들을 처벌하는 것이였다. 나름대로 기준도 정했다. 공산당 입당자, 우익인사 살해자, 지서방화자등은 반드시 처벌한다는 지침이 전달됐다. 또 부역자를 죽일 때는 반드시 경찰서장의 승인을 받으라는 지시도 각 지서에 통보됐다. 그러나 이 기준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서장의 승인없는 즉석처형이 수도 없이 이뤄졌다. 처형자는 ‘전투중 사망, 또는 도망자 사살’등으로 보고하면 그만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2.09.04 10:34
-
2개월간 좌익세상...우익인사 대대적 탄압대구 용운마을 윤양노, 성전 곽치흠 일가족 ‘참사’ 생생1950년 8월 1일 인민군이 들어오자 고금도로 후퇴한 강진경찰은 마량앞바다를 사이에 두고 인민군과 대치했다. 고금면 가교리에 강진경찰과 화순경찰 중대본부가 차려졌다. 마량앞바다를 사이에 두고 거의 매일같이 총격전이 벌어졌다. 당시 11살이었던 오송자(서울시 동작구 거주. 완도 고금도 출신)씨는 “경찰들이 가교리 우리집으로 후퇴해 와서 제사 지낸 음식, 술, 밥, 고기등을 모두 잡수셨고 그날부터 우리집은 강진부대 중대본부가 되었다”며 “우리 옆집은 화순부대 소대본부가 주둔했고, 건너마을 외갓집 할아버지댁에는 대대본부가 주둔했다”고 회고했다. 오씨는 또 “건너편 마량에서는 인민군이 주둔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2.08.28 16:35
-
차래진회장, 배석영 목사등 총살형6.25직후 보도연맹 학살... 대구 수동마을 주민 26명 사망1950년 8월 1일 강진에 인민군 진주강진인민위원회 구성... 우익인사들 고금도로 피신 6.25가 일어나기 1년전 1949년 6월 5일, 이승만 정부는 국민보도연맹이라는 관변단체를 조직한다. 남한내 좌익출신 주민들을 조직원으로 가입시켜서 이들을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명목이었다. 조직에는 해방 후 좌익활동을 하다가 전향한 사람도 있었지만, 조직에 가입하면 정부로부터 보호를 받고 쌀과 고무신, 비료와 같은 생필품을 준다는 소문 때문에 가입한 서민들도 많았다. 각 지방 경찰과 우익단체에 할당제가 떨어졌다. 인원수 채우기 위해 좌익경력이 전혀 없는 사람까지도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이렇게 확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2.08.21 11:21
-
좌익... 농민투쟁 조직확산우익... 행정 치안권 장악1948년 10월 여순사건으로 갈등 표면화성전 수암, 성전 월출산 민간인 사망 속출1945년 11월 23일 강진에도 미군정이 들와 좌익인사들의 결집단체였던 인민위원회를 해체, 이후 부터는 민족계인 우익인사들이 강진군의 행정과 치안을 장악하게 된다. 우익인사들이 참여했던 건준위와 치안대는 해체되고 이들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한독립촉성노인회’, ‘대한독립촉성청년단’ 등을 만들며 새로운 조직으로 뭉쳤다. 독립촉성회는 이승만을 중심으로한 우익계 핵심조직이었다. 이때 영랑 김윤식이 강진에 살면서 독립촉성중앙회와 대한청년단등에서 활동했다. 이들은 해방기념3대사업을 유치하기로 결의하는등 나름대로 지역발전 청사진을 제시한다. 3대기념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2.08.07 12:28
-
드디어 해방... 강진지역 ‘민족계- 진보계’ 첨예한 대립윤순달, 남로당 조직부장 맡으며 부각 ‘광주화랑단사건’계기 강진의 좌우익 투쟁 본격화1940년 초 짧은 신혼생활을 마감하고 서울로 올라간 윤순달은 노동운동에 투신한다. 그해 4월 서울에 도착해 종이상자 공장에 들어갔다. 노동자들과 접촉하여 그들을 조직화해나가기 위해서였다. 이때의 삶은 윤순달의 삶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시기였다. 8월 경성 콤그룹의 핵심 활동가인 김삼룡을 만나게 되고 이때 그의 운명을 결정한 박헌영을 소개받았다. 조선공산당 최고 지도자였던 박헌영과 윤순달이 어떤 신뢰를 나누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은 없다. 그러나 해방후 윤순달이 남조선공산주의 활동과정에서 승승장구하게되고, 6.25때에는 빨치산 부대에서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2.07.31 10:40
-
병영... 주의 조직 가장 먼저 형성군동... 농민운동 타 지역보다 강세성전... 실용주의 사회운동 펼쳐져대구... 학생운동 중심, 공산주의 심도있게 발전윤순달선생의 흔적을 찾아보면서 강진의 사회운동 역사를 살펴보고 넘어가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다. 1919년 3.1운동 후 전국적으로 다양한 사회운동이 분출하기 시작한다. 만세운동이란 집단행동이 국민들 사이에 우리도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 같은 것을 심어준 것으로 보인다. 강진 역시 1920년 초 청년운동을 시작으로 학생운동, 신간회운동, 농민운동, 노동운동등 다양한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이 펼쳐졌다. 이와 관련해서는 2011년 발행된 박찬승 한양대학교 교수의 논문 ‘1920· 30년대 강진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이란 논문이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2.07.24 10:10
-
신문과 논문들에 그들의 발자취가가장 중요한 자료는 가족 친지들과 현지 주민들무등일보도 지난 1993년 2월 13일자 ‘광주· 전남 인물현대사’란 특집란을 통해 윤순달을 조명했다. 현대사연구회와 공동으로 기획한 1회 기사였다. 당시로서는 윤순달을 일반인들에게 알린 최초의 심층취재 기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어 1995년4월에 안종철, 김준, 정장우등이 공동저술한 ‘근현대의 형성과 지역사회운동’이란 책에 윤순달이 소개된다. 이 책는 무등일보에서 사용된 사진이 실려 있고, 가 이번에 그 사진을 인용해 보도했다. 또 김기삼 전 조선대교수가 1995년 12월에 발간한 ‘강진군의 민족운동연구’에 윤가현의 활동기록이 나오고 있고, 2000년 나온 전남대학교 염미경 교수의 ‘양반가문의 한국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2.07.17 12:01
-
“윤가현은 일본순사만 보면 가만두지 않았다”윤순달의 작은아버지... 줄기찬 항일운동공산주의 통해 독립국가 꿈꿔대구보통학교동맹휴업, 전남운동협의회등 주도 ‘수십차례 경찰서행’조카와 작은아버지는 어떤 교류를 했을까.1933년 12월 어느날, 군동면 청년 12명이 강진읍에서 망년회를 하던 도중 강진경찰서 고등계형사 윤금죽과 말싸움을 한 사건이 발생했다. 강진경찰은 이들을 붙잡아 조사를 벌였는데 뜻밖의 사건이 불거져 나왔다. ‘동지계’라는 조직이 있다는 것을 파악한 것이다. 강진경찰은 전남경찰부에 ‘동지계라는게 있는 것 같다’고 사건을 보고했다. 그해 전남지역에서는 전남노농협의회라는 조직이 적발돼 ‘남조선지방의공산주의자’ 117명이 검거된 상태여서 전남경찰부는 긴장의 끈을 놓지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2.07.17 11:44
-
윤순달, 소작료 가지고 온 농민에게 “가져 가세요.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합니다”항일운동위해 코민테른 활동초기 목표는 ‘일본제국주의 몰아내고 사회주의 국가 건설’1940년 잠시 귀향해 결혼1년 채류기간 동안 마을주민들과 많은 교감가져1950년 11월 7일 김일성과 박헌영은 ‘북한혁명기념일’을 맞아 당시 북한지도부가 피신하고 있었던 만포진의 소련대사관에서 열린 기념연회에서 만난다. 두 사람은 한달전인 10월 8일 김일성 집무실에서 유격전 문제를 놓고 심한 언쟁을 벌인 일이 있었다. 기념연회에서 술이 거해진 김일성이 박헌영에게 시비를 걸었다. “여보, 박헌영이. 당신이 말한 빨치산이 다 어디에 갔는가? 남조선 백성들이 다 일어난다고 그랬는데 어디로 갔는가. 우리가 넘어가면 막 일어난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2.07.10 12:04
-
경성트로이카란1930년대 혼란기 극복방법으로 사회주의 노선 선택윤순달, 이곳에서 공산주의 활동 본격화일제강점기 경성에서 활동하던 노동운동 조직이었다. 지도자는 이재유(1903∼1944)였다. 그는 일제의 검거망을 번번이 뚫어 일제로부터 ‘신화적 인물’로 불렸던 혁명가다. 일제에 체포된 뒤 변절을 거부하다 광복을 1년 앞두고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이재유는 3년간 70번이나 일본 경찰에 체포당했는데도 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을 감시하던 일본 경찰을 감화시켜 서대문경찰서를 두 번이나 탈출했다. 탈출 뒤 반 평 지하 공간에 40여 일 숨어 있다가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기도 했으며 2년 동안 농사를 지으며 비밀 활동을 했다. 다시 그를 잡은 일본 형사들이 이재유와 함께 기념 촬영을 할 정도였다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2.07.03 11:56
-
강진일보는 강진인물사 김충식편에 이어 윤순달 편을 연재에 들어갑니다. 윤순달은 대구 수동마을 출신으로 공산주의를 통해 조선독립을 꿈꾸었던 항일운동가였습니다. 이어 6.25 이후 북한으로 넘어가 조선노동당에서 승승장구했으나 김일성의 숙청으로 장기징역형을 선고받고 역사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윤순달의 삶은 바로 강진의 공산주의 역사이면서 강진의 사회운동 역사를 종합적으로 조망해 볼 수 있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편집자 주. ==================================================================================남한에서 소외받고 북한에서 따돌림받은 ‘슬픈 공산주의자’강진 사회운동의 원조격그의 역사를 따라간다 1994년 8월초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2.07.03 11:25
-
부자는 왜 2대를 가기가 어려운 것일까. 김충식 선생이 한번은 급전이 필요해 충청도 갑부인 ‘최진사집’에 돈을 빌리러 간적이 있었다고 한다. 최진사댁 지배인이 최진사에게 “전라도 부자 김충식씨가 돈을 빌리러 왔습니다”라고 아룄다. 최진사가 지배인에게 물었다. “김충식이 몇 대째 부자인지 알아보아라”고 했다. 지배인은 김충식씨에게 물어 본 후 최진사에게 다시 가서는 “당대 부자라고 합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최진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럼 돈을 빌려주지 못하겠다”누대에 걸쳐 부자로 지내온 사람들에게 당대부자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정한 재산가에 불과했던 것이다. 경주 최부자댁이 14대째 만석지기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런 말이 이해될만도 하다. 당대에 4만석지기의 재산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2.06.26 12:31
-
일제강점기와 함께 했던 영욕의 세월농지개혁· 6.25 전쟁이후 가세 급격히 기울고 1953년 1월 15일 64세 나이로 세상 떠삶은 화려했지만 사후는 ‘쓸쓸’일제 강점기 때 부자들 중에 친일 행각을 하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을까. 그들은 자신의 재산을 지키고 키우기 위해서, 때로는 일본의 강제력등에 의해 불가피한 인연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영암의 유명한 부자 현준호씨는 호남은행을 창립해 민족자본을 중흥시킨 사람이었지만 8년간 광주보호관찰심사회 위원으로 재임하며 사상전향사업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친일파로 분류돼 있다. 또 전북의 땅부자 집안 김성수씨도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경성방직을 만들어 민족기업 부흥을 꿈꿨지만 일제강점기 때 전국 일간지에 징병과 학병을 찬양하며 선전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2.06.26 12:21
-
한전건물이 있는 곳은 강진읍 동성리 동문마을1936년 소화전기 창립한 터애매한 행정구역 그대로 유지돼한전강진지점은 강진읍 목리마을에 있지만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진읍 동성리 50번지이다. 한전건물을 경계로 해서 뒤쪽 일부가 동성리 구역이고 한전 정문이 있는 도로 건너편 주택들이 역시 동성리 구역이다. 마을이름은 동성리 동명마을이다. 도로 건너편이 모두 동명마을은 아니다. 동광전업사 아래쪽에 있는 작은 골목을 중심으로 남쪽은 목리이고 북쪽은 동명마을이다. 상당히 복잡한 구조다. 일제 강점기부터 이어져 온 행정구역이 아직까지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목리쪽에 있는 동명마을은 주택들은 사실상 모든 생활권이 목리다. 마을 방송도 목리 이장의 목소리를 듣고 있고, 마을행사가 있으면 이웃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2.06.19 10:34
-
강진면 읍승격도 선두.... 읍내 아스팔트 도로는 군단위 최초로 개설1935년 목포서 전기송전... 전선 지나온 성전면 일찍 전기혜택받아 1930년대 부자들이 많았던 강진은 문물혜택을 다른 지역보다 비교적 빨리 받았다. 인근지역을 통틀어 전기가 가장 먼저 들어왔고, 강진면이 강진읍으로 승격된 것도 빨랐다. 포장도로가 생긴것도 전남군단위 지역에서 처음이였고, 6개 지역을 관할한 강진세무서가 들어온 것도 강진의 재력과 무관하지 않았다. 김충식 선생은 1929년 자본금 50만원을 투자해 강진에 소화전기주식회사라는 전력회사를 창립해 대주주로 참여한다. 지금의 강진읍 목리(행정구역은 강진읍 동성리) 한전강진지사가 있는 자리다. 소화전기는 디젤엔진 120㎾의 화력발전소를 설치해서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2.06.19 10:26
-
1930년대 중반 짱짱하게 막았던 탐진강 둑은 1974년 어느날 속절없이 무너졌다. 1974년 대홍수 때였다. 태풍 '리타'의 영향으로 그해 8월 28일부터 31일까지 3일 동안 비가 내렸다. 탐진강 일대에 50년만에 내린 폭우였다. 28일 정오가 조금 지나 탐진강이 범람하기 시작해 삽시간에 강진읍 목리 일대와 남포 주택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주민들은 강진중앙교와 동초등학교에 대피해 있었다. 소방대와 향토예비군들이 둑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사력을 다했으나 29일 오후 2시경 제방이 무너져 버렸다. 목리와 남포 전 가옥이 물속에 잠겼다. 이때 주택 전파가 140동, 반파 90동, 침수가옥 565동등 총 795채의 주택이 피해를 입었다(강진군정 50년사 145페이지 참조).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2.06.12 11:54
-
탐진강 하류 강진읍, 군동면 상습 수해지역1930년대 탐진강호안공사로 말끔히 씻어주민들 대대적 공사 참여... 김충식, 차종채 면장 대역사(大役事) 앞장 탐진강 하류지역인 강진은 역사적으로 큰 비가 오기만 하면 피해를 입었다. 1930년대 초반까지만해도 탐진강에 이렇다할 둑이 없었기 때문에 위쪽에서 큰 물이 내려오고 바다가 만수위가 되면 둑없는 하천수준의 냇가에서 바다로 들어가지 못한 물이 군동지역 농경지로 쏟아져 들어갔다. 매년 침수와 범람이 반복됐다. 당시 상습적으로 피해를 입은 경작지가 탐진강군동지역에만 700여㏊에 달했다고 한다. 탐진강 하류의 침수피해는 이 지역 주민들이 수백년, 수천년 동안 매년 겪어야하는 천형(天刑)이었다.피해는 군동지역에 국한되는게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2.06.12 11:44
-
세무서 자리는 조선시대때 청조루란 객사 건물이 있는 자리다. 원님이 외부에서 손님들이 오면 숙식을 제공했던 건물이었다. 청조루 부지는 1914년 강진공립보통학교가 들어섰다가 1926년 강진읍 평동으로 이전해서 현재의 강진중앙초등학교가 되는 과정을 거쳤다. 세무서 자리는 요즘에는 앞쪽에 빌라가 들어서 조망권이 막혔지만 당시에는 그곳에서 강진만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명당이였다. 그만큼 좋은 곳에 세무서를 지었던 것이다. 강진사람들의 자부심이 대단했다는 말도 된다. 김충식씨가 일부러 자기집과 가까운 곳에 세무서를 두기 위해 현재의 위치를 정했다는 말도 전해온다. 세무서는 김충식 선생의 집과 불과 300여m 거리에 있다. 집에서 세무서를 바라보면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게 보일 정도다. 그러나 요즘에는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2.06.05 11:48
-
동은선생의 가계에 관련해서 몇가지 증언들이 나오고 있다. 동은선생 집안이 초창기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관심을 끈다.동은선생의 부친 김영준(永準)은 동은 선생에게 50~60석규모의 재산을 물려줘 거부가 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김영준의 부친인 김도순(道淳)은 강진 마량의 수군만호가 아니라 진도군 금갑진(金甲鎭)이란 곳의 수군만호였다. 지금도 금갑진에는 1873년에 세운 김도순의 기념비가 남아 있다.이때 동은선생의 집안은 몹시 가난했다. 아버지 영준씨는 강진장에서 장사를 했다. 어린 동은선생이 할아버지가 근무하는 금갑진까지 가서 이런저런 수산물을 가져 오면 그것을 아버지 영준씨가 시장에서 팔았다.동은선생의 부친은 장사를 할 때 몹시 검소했다고 한다. 배앓이를 하면 약을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2.05.29 10:36
-
1933년 강진유치원 인수, 1937 강진농교 설립, 1946년 연세대에 1억기부 교육사업에 줄기찬 관심... 주변 지역 주민들 “우리지역엔 왜 저런 사람없나”1928년 11월 12일 지금의 병영면소재지에 특이한 이름을 가진 영화상영반이 들어왔다. ‘유치원구원영사 제주중앙유치원 영사반’이란 이름을 가진 단체가 병영에서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 온 것이다. 이를 해석하면 제주중앙유치원 영화상영반이 유치원의 경비를 벌기 위해 전국을 순회하며 영화를 상영했는데 이날 여수와 보성, 장흥을 거쳐 병영에 도착한 것이다. 당시 제주중앙유치원 영사반은 동아일보병영지국의 후원으로 3일 동안 영화를 상영하고 돌아갔다. 이는 동아일보 1928년 11월 16일자에 기사로 기록돼 있다. 유치원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2.05.29 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