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물선 화장실서 굶주림·폭염과 싸우며 35일 생존

적도를 두 번 넘어 미국으로… 시애틀에서 교포도움 받으며 연착륙

밀항선 떠난 후 한국과 미국 인권운동가들 긴박한 연락
미국도착 4개월 후 교포들 가장 많이 사는 LA로 이주

윤한봉 선생이 미국 밀항에 성공해 막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때다. 건강을 회복한 모습처럼 보인다. 그의 나이 33세 때의 사진이다.<사진=윤한봉 기념사업회 제공>
윤 한봉선생이 1981년 4월 29일 마산항에서 밀항선에 올라 미국에 도착하기까지는 35일이 소요됐다. 화물선은 호주에서 알루미늄 원광석을 싣고 미국 서북부의 워싱턴주 벨링햄으로 가는 항해일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밥을 먹은 것은 여덟차례 뿐이였다.

나머지는 매일 잣 3알과 멸치하나, 마른새우 하나씩을 먹었다. 표범호란 화물선에 몸을 실을 수 있었던 것은 이 배의 선원이었던 두명의 후배덕분이였다. 후배들은 배에 타기 전부터 배에 오른 후 다른 사람의 눈에 띠지 않고 미국에 도착하기 까지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윤한봉선생은 화물선의 큰 연통이 지나가는 작은 화장실로 잠입해 들어갔다. 선원들의 병실에 딸려 있는 화장실이였는데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했다. 바람한줄기 들어오지 않은 골방이였다. 화장실 바로 옆으로는 엔진의 매연을 배출하는 큰 연통이 지나고 있었다.

바람한줄기 들어오지 않고, 바닥은 타일이고, 사면의 벽과 천장과 문짝까지 철판인 화장실. 게다가 철판벽을 사이에 두고 연통이 계속 열을 품어댔다. 버틸 재간이 없었다. 피부 여기저기에서 기포와 수포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특히 배가 적도를 통과할 때는 2~3동안 화장실 전체가 숨이 막힐 정도로 열기가 가득찼다. 미국에 도착하기 까지 그런 적도를 두 번이나 통과했다.

마산항을 출발한지 보름째가 되면서 배가 호주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긴장했다. 첫 관문이 있었다. 세관원들이 배에 직접 올라와 밀항자들이나 밀수품이 있는지 수색하기 때문이다. 이때 잡히면 꼼짝없이 본국송환이였다. 호주의 세관원들은 윤한봉 선생이 숨어 있는 화장실 칸의 바로 옆까지 수색을 하다 돌아갔다. 위기의 순간이였다. 호주의 위기는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넘어갔다.

윤한봉 선생이 밀항할 때 탔던 화물선 레오파드호의 모습
표범호는 호주를 떠났다. 미국으로 가던 중 두차례의 폭풍우를 만났다. 윤한봉 선생은 화장실안의 청소도구들과 함께 이리저리 뒹굴었다. 뱃속에 든 것이 거의 없는데도 쓴물까지 토해냈다. 변기를 껴안 듯이 꼭 붙잡고 앉아 버텼다. 윤한봉 선생은 그 와중에 혼자서 웃었다.

“제기랄 별명값 하는 구나. 합수가 변소에서 생활하다가 그것도 부족해 요강까지 껴안고 앉아 생똥을 싸는 구나”

합수는 재래식 변소에 들어 있는 분뇨다. 윤한봉 선생의 별명으로 사용되다 아호가 됐다. 윤한봉 선생은 인간으로서 견딜수 없는 고통이 밀려 올 때 마다 5.18을 전후해 체포되어 소름끼치는 고문을 당했던 광주의 구속자들을 생각했다.

그들이 당한 고문에 비하면 이 정도의 고통은 뺨 한 대 맞은 것에 불과했다. 또 담배를 많이 피웠다. 담배가 유일한 벗이였다. 평소에 좋아 하던 담배였다. 밀폐된 공간에서 수없이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를 흡입했다. 건강에는 최악의 조건이였다. 열기와 허기로 탈진 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이 미련하게도 밀폐된 작은 공간에서 하루에 담배를 두갑 반씩이나 피웠다.

윤한봉 선생은 1993년 귀국 한 후 폐기종 진단을 받는다. 그는 그때 사정없이 피워댔던 줄담배가 폐기종의 결정적인 원인이 됐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배가 미국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는 배에서 무사히 내리는 것이 문제였다. 마지막 관문이였다. 배에서 잘 내리기만 하면 한국을 떠나기전 후배들과 미리 상의한 대로 항구에서 미리 연락이 된 재미교포 부부를 만나면 되는 일이였다. 배는 미국 서북부의 워싱턴주 벨링햄 항구한쪽 펌데일이란 화물선 전용부두에 정박했다.

배에서 내리기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만나기로 했던 한국인 부부가 보이지 않은 것이였다. 배에서 함께 내린 선원후배들이 연락을 도왔다. 일행이 찾아간 곳은 항구에서 10㎞ 정도 떨어진 시애틀의 어느 가정집이였다.

윤한봉 선생이 말했다. “나는 봉선화를 좋아합니다”
그쪽에서 말했다. “저는 진달래를 좋아합니다”

암호가 통하는 순간이였다. 마산항을 떠나기전 서울의 후배들과 상의하면서 미국에 도착하면 만날 사람을 미리 주선해 놓기로 했었고, 그들을 만나면 암호로 의사소통을 하기로 약조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들 부부는 윤한봉을 만나기 위해 항구까지 나갔었으나 한참을 기다려도 나오지 않자 계획이 바뀐 것으로 알고 먼저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이들 부부는 윤한봉 선생이 미국에 처음 도착해 많은 도움을 받은 김진숙 선생의 남편 김동건 선생이였다. 윤한봉 선생은 부부를 만나 자신이 마산항을 출발한 후 한국과 미국간에 긴박하게 연락망이 오간상황을 알았다.

마산에서 윤한봉을 배웅한 광주의 후배들이 강신석 목사와 조아라 여사를 찾아가 협조를 부탁했다. 강신석 목사는 유신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냈다고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4개월간 실형을 살았고, 조아라 여사(1912-2003)는 ‘광주의 어머니'로 불리었던 전 광주 YWCA명예회장이다.

두 사람은 당시 광주운동권의 대부였다. 강목사는 도청과 편지검열을 피하기 위해 선교사로 나와 있던 베스헌트리 목사에게 편지를 써주며 미국에 나가서 직접 부쳐달라고 부탁했다. 헌트리 목사는 편지를 부치기 위해 직접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시건주 디트로이트시에 살고 있는 김용성 박사와 이학인 선생에게 그 편지를 발송했다. 편지 내용은 이러이러한 사람이 미국으로 배를 타고 가니까 그를 인도받아 정치망명을 신청할수 있게 도와달라는 내용이였다.

편지를 받은 두 사람은 워싱턴DC북미한국인권위원회 총무로 활약하고 있는 감리교의 페리스 하비 목사에게 그 내용을 알렸다. 하비목사는 평소에 인권운동 관계로 잘 알고 지내던 시애틀의 김동건, 김진숙선생 부부에게 즉시 연락을 취하고, 한편으로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에게 연락해 윤한봉 선생이 미국에 상륙해서 정치망명을 신청할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케네디 의원도 바로 워싱턴주 이민국에 전화를 해서 협조를 당부했다. 캐네디상원의원은 윤한봉 선생이 미국에 도착해서 얼마후 보좌관 칼리 키씨를 광주로 직접 보내 강신석 목사와 조비오 신부를 만나 ‘사람’이 잘 도착했다는 보고를 하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이렇듯 윤한봉 선생의 ‘미국상륙’은 한국과 미국 인권운동가들의 치밀하고 적극적인 작전에 의해 성공했던 획기적인 사건이였다.

미국생활을 시작한 윤한봉은 나름대로 생활수칙을 정한다. 첫째 영어는 어쩔수 없을 때만 쓰고, 운전은 안한다. 둘째, 샤워는 조국에서처럼 한달에 두어 차례만 한다. 셋째 조국의 가난한 동포들과 감옥에서 고생하는 분들을 생각해서 침대에서 자지 않는다. 넷째 조국에서처럼 절대 내것을 갖지 않는다. 다섯째 생활의 긴장을 유지하고 도망자라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조국에서 도피생활을 할 때처럼 허리띠를 풀지 않고 그대로 잔다. 윤한봉선생은 미국망명 생활 12년 동안 자신의 이런 결심을 그대로 실천했다.    

윤한봉 선생은 6월 12일 변호사를 따라 위싱턴주 이민국에 출두해서 정해진 조사를 받고  정치망명을 신청했다. 이민국에서 망명신청도 하고 건강도 많이 회복한 윤한봉선생은 ‘김일민’이라는 청년으로 행세하며 김동건 선생의 식품점에 나가 일을 거들었다. 그곳에서 다양한 인종의 세계인들을 만났다.

새로운 경험이였다. 또 식품점 일을 돕는 틈틈이 해외운동을 위한 학습도 해 나갔다. 창고에 있는 신문 잡지들을 뒤져 해외동포 운동에 관한 자료들을 열심히 찾아 읽었다. 모든게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이였다. 한번은 인근에 있는 반핵평화운동단체를 찾아갔다. 시애틀의 핵잠수함 기지 반대운동을 하고 있는 단체였다. 한 독일 대학생이 물었다.

“코리아의 문자 해득률이 몇 퍼센트나 되나” “5퍼센트만 문맹이다. 95%는 글을 해독할 줄 안다” 그러자 독일 대학생의 반응이 왔다. “그렇게 문자해독율이 높은 나라에서 왜 그렇게 심각한 핵문제를 방치하고 있는가. 왜 강력한 반핵평화운동이 없는가”

충격이였다. 윤한봉 선생은 돌아오는 길에 인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국제연대운동과 반핵평화운동에 관한 생각을 많이 했다.

그해 가을이되자 윤항봉 선생은 시애틀을 떠나 LA로 갈 계획을 세웠다. LA는 우리동포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고 조국과 가장 빈번한 교류와 왕래를 하는 도시였다. 윤한봉 선생은 그런 LA를 활동의 거점으로 삼고 싶었다.

다행히 전 서울시장을 지냈던 김상돈 장로가 윤한봉 선생에게 LA에서 활동하라며 자신의 집에서 숙식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11월 초순, 윤한봉 선생은 김동건 김진숙 선생에 대한 감사의 정을 가슴에 깊이 담고 4개월 동안 머물렀던 시애틀을 떠났다. 윤한봉 선생의 본격적인 LA 생활이 시작되는 순간이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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