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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선사, 경허-만공-보월-금오 잇는 선맥 인증고향 강진 떠나 출가한지 13년만의 광명1924년 음력 12월 금오스님의 나이는 28세였다. 스승인 보월스님의 갑작스런 입적으로 건당식(建幢式)을 치르지 못한 금오스님은 걸망을 걸머쥐고 참선 삼매경에 들어가기 위해 다시 오대산 상원사로 길을 떠난다. 건당식이란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해 주는 일종의 기념식으로 선승에게 최고의 영예스런 자리였다. 스승이 열반에 들면서 그 일을 해줄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금오스님은 오대산에서 동안거에 들었다. 동안거란 선종(禪宗)의 승려들이 10월 16일부터 이듬해 1월 15일까지 90일 동안 외출하지 않고 사찰에 머물며 오로지 수행에 전념하는 일을 말한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한 객승이 찾아와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4.04.08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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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 출가 후 오직 참선수행 외길28세 이른 나이에 깨달음 인가받아경허→만공→보월→금오 법맥 이어불교계에서는 지금도 금오스님이 16세의 어린나이로 성불을 하겠다며 강진 병영땅에서 무려 3개월 동안 금강산 마하연선원까지 걸어서 찾아간 것을 신비롭게 생각한다. 불가에서는 출가 수행자가 세속의 모든 욕심을 떨쳐 버리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닦으며 참기 어려운 고행을 행하는 것을 두타행이라고 한다. 그 사람을 우리가 종종 들을 수 있는 고행자라고 한다. 태선은 강진에서 금강산까지 3개월 걸어가면서 두타행을 실천한 것으로 평가 받았다. 교통편이 없던 시절에 무려 3개월 동안 비와 바람과 추위, 굶주림을 겪으며 태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타행을 실천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교통편도 불편했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4.03.18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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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 박동마을 출신, 남일장군과 같은 마을1912년 16세때 병영서 금강산까지 걸어가 출가백련사 스님으로부터 화두받고 출가 결심금오선사는 1896년 7월 13일 병영면 박동마을에서 동래정씨인 아버지 정용보씨와 어머니 조씨사이에 2남3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보통 고승들의 사적인 생활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지만 제자인 스님들이 금오선사의 행적을 꼼꼼히 기록하면서 가족 관계는 물론 그가 7월 13일 몇 시에 태어났는지 조차 전해지고 있다. 금오스님의 뒤를 본격적으로 따라가기 전에 우선 스님의 직계 제자들을 소개할 필요가 있겠다. 금오스님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금오스님을 ‘어느 정도의 인물이였는가’를 가장 알 수 있는 방법은 제제들의 면면을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세속
강진인물사
강진일보
2014.03.11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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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정 대표단 동료 2명도 모두 숙청60년대에는 아들 난융(南勇) 중국피신설도70년대 초반 어느날의 일이다. 광주의 어느 술집에서 강진사람과 광주사람이 자리를 함께 했다. 그때 광주사람이 강진사람에게 “강진 출신중에 큰 인물이 있는데 그것을 아느냐”고 했다. 강진사람이 “그게 누구냐”고 묻자 그 사람은 “남일장군이라고 그 사람이 강진사람인데 인물은 인물이다”고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며칠 후 경찰의 조사를 받았다. 북한 인민군 대장을 ‘큰 인물’이라고 치켜올린게 정보기관에 들어갔던 것이다.북한에서 영웅칭호를 받던 남일장군은 이렇듯 남한사람들에게, 특히 고향 강진사람들에게 거론조차 되기 어려운 사람이였다. 그래서 문중도 그를 멀리했고, 그의 후손들도 그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싫어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4.02.18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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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상장에서 남쪽 기자에 각별한 애정 표시“남일장군의 당당함에 현기증 느낄 정도” 2년 1개월에 걸친 정전회담 기싸움 압도1951년 7월 8일부터 2년 1개월간 계속된 한국전쟁 정전회담은 유엔군 종군기자들과 남한측 기자들을 통해 상세하게 보도됐다. 기자들의 관심은 단연 유엔군 대표와 북한군 대표들이 벌인 신경전에 모아졌다. 양측이 벌이는 신경전이야 말로 3.8선을 한 뼘이라도 더 유리하게 그으려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북측의 신경전을 총 지휘한 사람은 물론 정전회담 대표였던 남일장군이였다. 당시 현장에 있던 기자들의 눈을 통해 기록된 몇가지 사례를 보면 남쪽 기자들이 그를 왜 ‘남일이가 타고난 미남이지만 만약 배우의 직업을 택했다면 그는 명연기의 주인공이면서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4.01.28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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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력있는 근육, 훤칠한 키, 오똑한 콧날’ 남한 언론들도 극찬한 남일장군의 외모전형적 서구스타일… 병영 남씨와 꼭 닮은꼴남일장군이 남한지역 주민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51년 7월 10일 6.26 전쟁 정전회담이 시작되면서 부터다. 그 전 남일장군이 고향 병영에 다녀갔단 말이 있기는 하다. 병영에서 몇몇 주민들을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남일장군은 전쟁이 한창이던 어느날 밤 고향집에 찾아와 잠시 머물다 곧바로 돌아 갔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게 실제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소문으로만 있는 이야기인지는 정확히 알수 없다. 그러나 6.25 전쟁당시 남일장군이 본격적으로 남한사회에 알려지기 전에도 이미 알음알음으로 북한군 대장인 남일장군이 병영사람이라는 것은 병영주민들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4.01.21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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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만명 사망한 독소전쟁에서 큰 전공1946년 8월 재소전문가그룹으로 평양입성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소련군은 독일군에 대해 본격적인 반격에 나선다. 1942년 11월, 29세때 육군대위 계급을 달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여한 남일장군은 이후 1943년 3월 하르코프 공방전, 43년 7월 독소 양측 6,300여대의 기갑전력이 맞붙은 역사상 최대의 기갑전인 쿠르스크 전투, 44년 6월 동부 폴란드 벨라루스에 남아 있는 독일군 중앙집단군 섬멸작전인 바그라티온 전쟁에 참가해서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그는 45년 1월 영관급으로 진급하면서 게우르기 주코프 원수의 제1벨로루시전선군 소속 사단 참모장에 올랐다. 독소전쟁에서 남일장군의 활약상을 직접적으로 확인하려면 소련군 주코프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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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일보
2014.01.14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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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현대전에서 야전경험 쌓아전략가적 기질 소련군내에서 높이 평가중국에서는 남일장군을 지금도 조전영웅이라고 호칭한다. 조선전쟁의 영웅이란 뜻이다. 중공군 대표 2명과 북한군 대표 2명이 유엔군을 상대로 25개월 동안 정전협정을 벌였지만 대표로 서명한 사람은 남일장군이였다. 40만명 이상을 파병해 종전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중공도 정전협정의 대표자격을 남일장군에게 부여했던 것이다. 그만큼 남일장군이 6.25 전투과정은 물론 정전협정과정에서 보여주었던 뛰어난 전략 전술은 중공도 탄복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때문에 지금도 중국에서는 그를 조전영웅이라 칭하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그가 1946년 8월 재소(在蘇) 조선인 전문가 그룹 제4진으로 입북한 후 3년4개월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12.31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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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유학… 북한 외상시절 재일교포 북송사업 총지휘일본유학때 공산주의 접하며 재일교포와 교류한 듯일본서 소련으로 넘어가 타슈켄트사범대학 졸업 1941년 28세때 소련군 입대... 독소전쟁 참전남일장군이 광주서중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그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없다. 그후로 그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6.25때 그가 밤중에 고향집에 다녀갔다는 소문이 돈적이 있었다. 한 주민은 “오래전 작고하신 아버님께서 6.25때 남일장군이 밤중에 조용히 다녀갔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고 말했다. 남일장군이 밤중에 조용히 다녀갔다면 시기적으로 인민군이 후퇴할 때 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민군이 강진을 점령한 시기가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31일까지였기 때문에 이때 다녀갔으면 굳이 밤중에 조용히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12.24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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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참모총장, 부수상 역임… 병영출신 확실올해는 6.25 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된지 60주년이 된 해이다. 당시 국제사회의 모든 이목이 집중된 정전회담에서 북한대표를 맡았던 사람이 강진출신 인사였다면 이를 그대로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본지가 오래동안 취재한 결과 북한 대표 남일장군은 강진 병영출신인 것이 확실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같은 취재결과에 따른 판단이 언젠가 또다른 자료에 의해 뒤집히길 바라며 남일장군을 ‘강진인물사’10회째 인물로 올린다. /편집자 주.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7월 초, 개성의 한 여관에서 유엔대표와 북한대표, 중공대표가 만나 역사적인 휴전회담을 시작했을 때 병영의 몇몇 사람들은 눈이 휘둥글해졌다. 신문속에 보인 북한 대표(인민군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12.10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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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테헤란 아시안 게임서 은메달박정희 대통령“노익장이야”격려1974년 6월 대한체육회로부터 테헤란 아시안게임 출전 요청을 받은 황호동의원(37)은 결국 헤비급 출전을 결심했다. 야당인 신민당내에서 김영삼과 이철승의 당권싸움이 한창일 때라 혹여 보스인 이철승 국회부의장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까 고민했으나 이철승 부의장이 “금메달을 딴다면 국가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는 권유를 받고 출전을 결심했던 것이다. 황의원은 유신헌법으로 여야가 첨예하게 대치할 무렵 야당 의원이 정부 측의 요청에 덥석 응했다면 이상한 눈길을 받았을 것 같아 주저한 면도 있었다. 이를 보고 정일권 국회의장도 나서 “현역의원이 국제대회에 출전해서 국가의 명예를 높인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라면서 “후원회를 만들거나 해서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11.26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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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지프에서 새우잠 자며 선거운동공화당 길전식 후보에 이어 2위 당선황호동 선수가 국회의원에 출마한 9대 국회의원선거는 유신체제하인 1973년 2월27일 실시됐다. 선거 방식은 소선거구제를 채택했던 8대 총선 때와 달리, 선거구별로 다수득표자 2인을 당선인으로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를 도입했다. 6대 총선부터 8대총선까지 영암과 한 선거구를 이뤘던 강진은 9대 총선부터 인근 장흥․영암․완도와 한 선거구(전남 제8선거구)를 이뤘다. 전남 제8선거구에 출마한 후보는 길전식(吉典植․49, 공화당) ․ 정간용(鄭幹鎔․51,공화당) ․ 황호동(黃鎬東․37,신민당)후보 등 모두 3명. 공화당은 호남에서 유일하게 강진 장흥 완도 지역구에서 2명의 후보를 복수 공천해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보였다.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11.12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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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통령 3선개헌 반발 이철승계로 정계입문3선반대투쟁위원, 신민당청년부장·국장 지내황호동 선수가 역도생활을 은퇴한 60년대 후반은 우리나라가 정치적 격랑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국회에서 3선 개헌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켜 영구집권의 길을 열었다. 전국적으로 휴교령이 내려지고, 곳곳에서 3선개헌을 반대하는 데모가 일어났다.의협심이 강했던 황호동선수는 국영기업체인 대한해운공사에서 과장으로 근무하다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해 사표를 내고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 정치에 입문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나이 34세때의 일이다. 고려대 경제학과 1학년 재학 중인 1956년에 ‘고려대 덩치’ 4명에 선발돼 신익희 민주당 대통령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10.29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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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벗은 몸 보니 정말 대단하다”66년 방콕아시안게임 출전해 은메달 획득1966년는 제5회 방콕 아시아경기대회가 열리는 해였다. 30세의 황호동 선수는 일찌감치 헤비급 금메달 후보로 떠올랐다. 그는 이제 아시아의 거인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체중 113㎏으로 470㎏의 역기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3회 아시안게임 2위, 로마 올릭픽 9위, 동경올림픽 8위라는 굵직한 출전기록을 가지고 있었고, 국내 역도대회에서는 헤비급을 거의 독식하다시피하고 있었다.그는 그해 10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아시아 지역에 헤비급 선수가 드물다지만 선수층이 빈약하다는 이유로 승리가 쉬운게 아니다”고 여전히 이란선수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는 전통 강호 이란과 함께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10.22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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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촌서‘가장 큰 사람, 가장 많이 먹는 선수’정평헤비급 역도 기록 제조기, 대회마다 신기록 쏟아내 1962년이 왔다. 황호동 선수는 이제 26살이 됐다. 그해 8월에는 제4회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아시아경기대회가 있었다. 그해 2월 국가대표 선수들의 본격적인 훈련을 앞두고 정밀 신체검사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그게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실시된 운동선수들의 신체검사였다. 의사 15명, 조수 22명, 간호사 26명이 동원된 메머드급 의료진이 국가대표 선수들의 신체검사를 했다. 검사 내용은 폐기능 검사, 엑스레이 촬령, 피부과, 혈액검사, 기생충 검사. 당시 신문보도를 보면 2월 10일 역도와 권투, 자전거 선수에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10.15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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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동경아시안게임 은메달 쾌거1960년 로마올림픽 나가 예선탈락 좌절1956년 ‘고려대 덩치’ 4명에 최종 선발신익희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호활동참여훗날 정치 입문 국회의원 당선 큰 인연돼황호동 선생이 강진농고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를 진학 한 것은 본격적인 역도인생의 시작이자 정치라는 새로운 무대를 만나는 계기가 됐다. 이에앞서 황호동 선수는 1954년 10월 제35회 전국체전에서 강진농고 재학시절 전남대표로 출전해 역도 미들급에서 210㎏를 들어 1위를 차지했다. 일제치하와 1950년대 6.25란 동족 상잔을 겪은 우리민족에게 역도는 여러 가지 의미가 새로운 종목이었다. 1955년 경향신문에 나온 역도에 대한 해설을 살펴보자. 홍성범이란 역도 전문가는 이렇게 적었다.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10.08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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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 은메달중3 체격이 키180㎝에 몸무게 80㎏맞은 신발, 옷 없어 남대문시장서 미군 것 구입1974년 9월 6일 오후 3시 이란의 수도 테헤란. 제7회 아시안게임이 뜨거운 열기속에 열리고 있었다. 7회 아시안게임은 동서냉전 체제의 영향으로 굳게 문을 잠갔던 공산진영이 처음으로 아시아 스포츠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국제행사였다. 각국은 ‘평화와 화합’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스포츠대회라고 평가했지만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특히 6.25 전쟁 후 처음으로 국제대회에서 만난 남한과 북한에게 아시안게임은 피튀기는 전장터였다. 우리는 여전히 북한선수를 북괴선수로 부르고 있었다. 이날의 관심 경기는 역도 경기였다. 110㎏ 이상 거구들이 참가하는 슈퍼헤비급 무제한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10.01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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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55세의 나이에 새 옹기배 건조큰아들에게 물려주고 팔자에 없는 농사일옹기장사들은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좌우지간’ 돈을 많이 벌었다. 안벌었다고 할수 없는 돈이였다. 여수에서 배 묶어 놓고 기생집도 많이 가봤다. 통영, 진해가면 옹기배 사공의 인기가 가장 좋았던 시절이다. 봉황마을에서만 다니는 배가 서른 다섯척이나 됐기 때문에 술집 여자들이 옹기배가 떴다하면 딱 알아봤다. 그러나 함부로 낭비는 못했다. 여기저기 술집 기웃거리면 옹기판돈을 쓸 수 밖에 없었고, 그런 일이 많아지만 까딱 잘못하면 사공자리를 빼앗길 수도 있었다. 40여척이 다되는 배가 다녔기 때문에 서로 감시하고 견재를 했던 것이다. 어느배 사공이 어디 술집에서 여자데리고 시시닥 거리더라 하고 소문나면 그 세계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09.10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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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배 사공의 조건… 그래야 배를 맡겼다밥짓는 일만하다 하선한 사람들 부지기수전쟁이 끝나고 60년대 들어 서도 옹기시장은 여전히 인기였다. 김우식 사공은 1960년대 초반 남의배 사공을 다시 시작했다. 6.25때 부산항로에서 재미를 본 김사공은 이제 남해안 지리를 쫙 끼고 있었다. 캄캄한 밤에도 항해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부산을 포함한 경남시장에 여전히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부산으로 가는 길은 육지와 가까운 길을 택해 배를 몰았다. 봉황을 출발한 배가 완도해역으로 접어들어 장흥으로 들어갔다. 그 길로 곧장 가면 고흥 나로도가 나오고 여수돌산을 지나 경남 남해군으로 들어갔다. 그러면 삼천포를 거쳐 통영과 거제도, 진해로 들어갔다. 그 다음이 부산이었다. 가다가 해가지면 배를 적당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09.0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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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기 싫어하는 것이나, 칫다리 잘 다루는 솜씨나 아비를 꼭 빼닮았더라’60년까지 봉황마을 옹기 연간 90만개 생산전남지역에서 최대 옹기 생산지로 뿌리내려 봉황마을에서 옹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들어보자. 연초가 되면 시기별로 일정한 순번이 정해졌다. 땔감준비와 흙준비, 도공, 인부 운용계획들이 어느정도 나와 모든 과정이 톱니바퀴 처럼 질서있게 돌아갔다.보통때는 한 가마에서 연간 30~40굴을 했다. 굴이란 가마속에서 옹기를 구워낸 숫자를 말한다. 그러나 전쟁 이후에는 보통 한 가마에서 160굴을 했다. 한 굴에서는 평균 1천여개의 크고작은 옹기가 나온다. 그러니까 6.25 직후 봉황옹기가 한참 히트를 쳤을 때 가마숫자가 여섯 개에 달했으므로 한 가마에서 160굴을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3.08.27 1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