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부터 청자재현 작업 시작
해방후 경기도 이천, 광주 청자재현 시도
유약개발 미미한 수준
1978년 강진청자 재현 성공 후 본격화

당시 청자재현은 전국적으로 어느정도 진행되고 있었을까. 고려청자 재현의 몸부림은 일제강점기때부터 있었다. 일본은 한국에서 수집된 청자편등을 분석해 이 기술을 본국으로 가져가 오사카 주변에서 상당한 수준의 청자를 재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방과 함께 일본인들이 물러간 후 우리 도공들이 경기도 이천과 여주등지에 모여 창자를 굽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청자 재현의 역사는 해방과 함께 비롯된 셈이다. 도예가 혜강 유근형 선생과 지순탁 선생등의 경우 일제강점기부터 청자재현을 시도했던 사람들인데 이천과 여주에서 자리를 잡고 해방후에도 청자 연구에 매진했다.

이뿐만 아니라 60년대 초반에 중앙공업연구소와 원자력연구소등에서도 비색청자를 과학적으로 실험하며 재현을 시도하기도 했고 1964년 9월에는 전남 함평초등학교의 교사들이 청자재현을 연구해 대통령 상을 받기도 하는등 고려청자 비색을 재현하려는 노력은 다양한 방면에서 시도됐으나 괄목할만한 성과는 없었다는게 학계의 정설이다.

강진의 청자재현사업에 참여했던 조기정 선생의 경우 당시까지 16년 동안 광주 무등요에서 청자재현을 연구했다고 하니까 60년대 초반부터 그 일을 시작했던 셈이다. 조기정 선생과 함께 강진청자 재현 실무일을 했던 이용희 선생 역시 1964년 군 재대 후 독자적으로 청자제작기술을 배우면서 경기도 광주나 이천등을 찾아 청자제작 기술을 배웠다고 하니까 강진의 경우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 청자재현 작업의 역사에서 상당히 뉘늦은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진의 경우 고려청자가 생산된 곳으로서 그 정통성을 뚜렷하게 인정받은데다 수백기의 청자요지가 산재해 있다는 점에서 1978년 초 일부분 청자재현 성공이 갖는 의미가 대단한 것이였다. 강진요에서 생산된 청자역시 초창기에는 주변환경과 가마의 부조화, 유약의 문제등으로 고려청자 비색을 재현하는데는 미치지 못했으나 그 후로 연구를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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