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의 고려청자재현 성공은 포항서 석유나온 것 만큼 대단한 일”

1978년 2월 전국을 흥분케 했던 강진의 청자 재현
‘600년간 긴 세월 동면한 한국혼을 세상에 빛낸 일’
본격적인 비색청자 재현 도전 첫발
“앞으로 절대 불이 꺼지는 일 없어야”

1981년 광주 남도예술회관에서 고려청자 재현품 전시회가 열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사진=고려청자박물관 제공>
1978년 2월 3일은 강진군과 강진군민들에게 역사적인 날이였다. 600여년만에 재현을 시도한 청자가마에서 첫 성공작품이 나온 날이 바로 그날이다. 강진군청 성상원 문화공보과장은 성공작품이 나온 다음달 곧바로 서울로 향했다. 문화공보부장관에게 재현에 성공한 고려청자 작품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바로 6개월 전인 1977년 6월, 대구면 사당리에서 열린 청자요 기공식때 김성진 문화공보부장관과 김성룡 문화재관리국장이 다녀갔기 때문에 당연히 문화공보부을 찾았던 것이다. 성과장은 “덕분에 역사적인 청자재현에 성공했습니다”를 보고하고 내려오는 길에 중앙청에서 강남고속터미널까지 택시를 탔다.

성과장은 택시 창가로 지나가는 한강변도로와 툭트인 고속도로등을 바라보며 택시기사와 ‘조국의 발전상’을 실감있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택시 기사의 나이는 45세정도로 보였다. 택시기사는 스스로 기독교 신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갑자기 택시기사가 이런말을 했다.

“손님, 우리나라도 이제 하나님의 복을 받는 시대가 돌아온 것 같습니다. 각종 건설이나 새마을운동 뿐입니까. 저 멀리 우리나라 남쪽 땅 강진에서 600년만에 우리나라를 세계에 빛냈던 고려청자가 재현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며칠 전 여러 메스콤을 통해 세상에 알려 소개되지 않았습니까. 그건 바로 몇 년전 포항에서 석유가 나온다는 기쁜 소식에 버금가는 우리 국민에게 하느님이 주신 복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성과장은 벅찬 가슴으로 택시기사의 말을 들으며 강진에 도착하자마자 청자재현사업추진위원들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강진향토지 514페이지 참조>

포항에서 유전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나와 온 국민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게 76년 1월부터였다. 포항유전은 77년말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지만, 전국의 많은 사람들이 강진에서 청자가 재현된 것을 우리나라에서 석유가 발견된 것 만큼이나 가슴벅차게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강진사람들을 짜릿하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600년만에 고려청자가 재현된 것은 국가적인 대사건이였다. 다시 청자를 재현하던 과정으로 돌아가 보자. 문화공보부장관과 전남도지사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강진요 준공식이 열린 후 청자재현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가마 공사와 함께 작업장이 들어섰고, 이곳에서 성형사와 조각사, 정형사등 7명의 도공들이 초벌구이용 도자기 200여개를 만들었다. 77년 12월 27일 오후 3시 화목가마에 불이 지펴지며 초벌구이 작업이 시작됐다. 강진에서 600년만에 청자가마에 다시 불이 붙은 것이였다.

조기정 선생은 당시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앞으로는 절대 불이 꺼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목메여 했다. 불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10여일 동안 지폈다. 78년 새해 1월 6일 오전 10시. 초벌구이 결과가 나왔다. 90% 이상의 성공률이였다. 이제 남은 것은 초벌구이에 성공한 도기를 어떻게 본벌구이를 해서 정교한 고려청자를 만들 것인가하는 것이였다.

이제 본벌에 들어가기에 앞서 가장 중요한게 유약을 바르는 일이였다. 조기정 선생이 자신의 개인요인 광주 무등요에서 만든 토석유약을 가져와 사용했다. 이렇게 해서 초벌구이에 성공한 제품 150여점을 다시 가마에 넣어 본벌구이에 들어갔다. 유약이 녹아들어 제대로 된 청자를 구워내기 위해서는 20~24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불을 지펴서 1300~1500도를 올려야했다.

1978년 2월 3일 고려청자재현추진위원들이 가마에서 나온 청자재현품들을 감격어린 표정으로 살펴보고 있다. <강진일보 자료사진>
그러나 큰 시련이 닥쳤다. 점화한지 10시간이 되지 못해 가마 뒤쪽에서 역풍이 불어와 화염이 바깥으로 새어나온 것이다. 이로 인해 제때 온도를 올리지 못하고 무려 39시간 동안 솟구치는 화염과 연기속에 장작을 던져넣는 작업을 계속해야 했다.

훗날 이 상황에 대해 조기정 선생은 “16년 동안 청자를 연구하며 만들어 보았지만 그때 일은 겪어보지 못한 고통이였다”고 술회했고, 이용희 선생은 “차라리 가마속에 몸을 던져 버리고 싶은 심정이였다”회고했다.<강진향토지 513페이지 참조>

가마의 불이 꺼지고 가마를 식히는 시간을 거쳐 드디어 1978년 2월 3일 오후 1시가 됐다. 청자 요출작업이 있는 시간이였다. 가마의 뚜껑을 열기전까지 고려청자가 600년만에 재현됐는지, 실패했는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였다. 무엇보다 역풍 때문에 가마에 정상적으로 불을 지피지 못한 상황에서 성공작이 나온다는 것은 기적같은 일이 될 터였다.

이날 전국에서 60여명의 기자들이 대구 사당리 강진요 앞으로 모여 들었다. 강진군이란 행정구역이 생긴 이후 전국의 기자들이 이렇게 모여든 것은 처음이였다. 가마주변에는 500여명의 주민들이 추위속에 운집했다.

밀봉돼 있던 가마의 틈을 열고 조기정 선생과 이용희 선생이 들어갔다. 가마속에서는 아직도 남아 있는 열기가 후끈했다. 잠시 후 가마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정채균 군수에게 무언가가 건네졌다. ‘음각국당초문화병(陰刻菊唐草文花甁)’이였다.

 비취색을 띤 고려청자였다. 600년만에 강진에서 재현된 첫 고려청자였다. 정채균 군수가 “성공”이라고 외쳤다. 이 외침에 호응하며 군중들이 일제히 함성과 함께 박수를 터뜨렸다. 강진의 역사에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순간이였다. 이날 가마에서 나온 완성품은 모두 32점이였다. 당시 언론들은 ‘600년간 긴 세월 동면에서 깨어나 한국혼을 세상에 빛낸 일’이라고 당시 상황을 극찬했다.

그럼 당시 재현된 고려청자의 수준은 어느 정도 였을까. 물론 강진에서는 대 성공이라는 자평이 나왔지만 전문가들은 상당히 신중했다. 정양모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수석학예관이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지금의 청자는 옛것의 주변만 뱅뱅돌다가 정곡을 찌르지 못한 상태”라고 말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청자재현은 고려청자의 비색을 향해 걸어가는 첫 발을 뗀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청자재현 첫 작품이 나온 그해 2월 말, 박정희 대통령이 전남도를 연두순시했을 때 전남도청에서 나누었던 대화록을 보면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하다.

당시 고건 지사가 박대통령에게 청자재현의 의의를 설명한데 이어 대부분의 대화가 청자재현에 집중돼 있었다. 그때 유남옥 한국부인회 전남지부장이 마이크를 잡고 “각하의 배려로 강진 고려청자가 재현되어 옛 선인들의 얼을 되살리게 되었습니다”고 분위기를 띄웠다. 이에대해 강진지역구 국회의원이였던 길전식 공화당 사무총장이 “이번 고려청자재현은 역풍 때문에 불 관리가 제대로 못되어 작품이 완전치 못한 것으로 압니다”라고 보충설명을 했다.

그때 박대통령이 이렇게 답변을 했다. “재현된 고려청자를 지사실에서 보았습니다. 온도와 시간등 과학적 관리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어 박대통령은 고건지사를 보며 “청재재현에는 고지사가 특별지원을 해야 되겠지요. 고려청자재현사업은 성공적으로 추진해야 합니다. 특히 빛깔 재현에 신경을 써서 추진해야 겠습니다”<강진향토지 517페이지 참조> 많은 사람들의 꿈의 색깔로 생각했던 비색청자를 재현하기까지는 아직도 먼길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청자재현사업추진위원회의 평가회의 회의록을 통해서도 당시 고려청자의 재현 정도가 어느정도 나와 있다. 당시 평가 내용을 보면 ‘기대했던 비색이 약하다는 점을 시인하면서 기본온도를 올릴 수 있는 시설이 완비되면 자연적으로 해결될 것으로 본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런 상황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보면 당시 재현 청자는 600년 만에 청자가 강진에서 재현됐다는 것에 1차적인 의미를 둘 수 있겠고, 다음으로 단계적으로 고려청자의 비색에 다가갈 수 있는 첫 단추를 끼웠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가 크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고려청자 재현은 1986년 강진군고려청자사업소 발족으로 이어지면서 강진의 한 산업으로 자리잡게 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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