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교육, 농사지원까지 일인삼역 맡아

참석자들이 111주년 기념탑을 제막하고 있다.
백양교회로 가기 위해서는 작은 골목길을 지나야 한다. 모두 돌담이다. 동쪽 회관쪽에서 교회로 올라가는 길은 꼬불꼬불 돌담길을 걸어간다. 돌담위에 푸른 담쟁이 넝쿨이 아름답게 수놓고 있다.

돌담아래 개울은 가뭄이 심했지만 여기저기 고여있는 맑은 물속에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다녔다. 마을에 식수가 풍부하다는 의미였다. 백양교회로 가는 길은 호젓했다.

지금으로부터 111년전(1901년) 백양교회가 설립된 시기는 우리나라가 큰 혼란기에 있었다. 조선말 국가의 위상은 흔들리고 외국 문물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지방은 거의 무정부 상태였다. 민란이 끊이지 않았고, 약탈도 많이 일어났다. 지방민들의 생활은 갈수록 피폐해졌다.

서민들은 자신들을 구해주고 지켜줄 절대자를 간절히 찾았다. 마을에서 시작된 교회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백양교회도 마찬가지였다. 1900년대 초반은 전라병영성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병영면 지역(당시에는 고군면이었음)이 쇠퇴일로에 접어들 때다.

백양마을에 들어선 작은 교회는 병영사람들의 예배장소이자 문화센터였다. 백양교회는 설립된지 5년만에 교회부속 기관으로 금화학당이란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주민들에게 글을 가르쳤고, 어린이들의 초등교육을 도왔다. 청년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기능도 했다.

또 1960년 광주덕림교회에서 자리를 옮긴 강주원 목사가 재정난 해소를 위해 교회과수원을 조성하고 여기에 100여그루의 감나무를 심은게 ‘병영감’의 효시였다는 것도 눈길을 끈다. 초기 교회들이 그랬지만, 백양교회 역시 선교는 물론 주민들에 대한 교육, 주민 생활개선까지 다양한 활동을 펼쳤던 것이다.

23일 열린 111주년 기념예배는 담백하지만 화려하게 드려졌다. 많은 손님들이 찾아와 이 시골작은 교회의 큰 역사를 되돌아 봤다. 강진원 군수는 “백양교회가 걸어 온 길은 곧 강진의 교회역사다”며 “백양교회가 새로운 역할을 통해 침체되가는 농촌마을에서  농촌을 회생시키는 교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강진의 교회역사는 백양교회에 이어 잇따라 전개된다. 1902년 병영교회가 설립됐다. 병영에서 강진에서 최초로 잇따라 교회가 두 개 설립된다는 것은 인상적인 일이다.

이는 병영에서 상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상대적으로 외지 문물을 많이 접했던 사람들이 교회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어 1907년에는 도암 학장교회가 세워졌다. 이어 4년 후 인 1909년에는 강진읍 서산교회가 문을 열었다.


 

저작권자 © 강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