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9월 전자전람회에서 박정희대통령에게 김회장이 아남산업의 제품을 설명하고 있다.
1967년 1월 10일 차가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날 50대 중반의 신사가 김포공항에서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는 강진읍 출신 아남산업 김향수 회장이였다. 김회장은 찬바람을 맞으며 바로 몇 달전 청와대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일부 대기업 사장들을 청와대로 불렀다. 김향수 회장도 초대를 받았다. 박대통령은 김회장에서 이례적으로 전자산업과 고려자기의 명예를 되찾기 위한 도자기산업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했다. 박대통령도 1964년부터 강진에서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한 청자요지에 큰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김향수회장은 전자산업과 고려자기가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박대통령은 일본이 임진왜란때 우리나라 도공들을 납치해서 세계도자기 시장의 70%를 점유할 정도로 이 사업을 성장시켰으나 우리는 양질의 고령토를 일본으로 원료만 수출하고 있는 것을 개탄해 하고 있었다. 이 내용은 1976년 11월 강진지역 시민단체였던 ‘밀알회’ 초청으로 강연을 했던 도예가 조기정 선생이 했던 말과 비슷하다.

박대통령이 김회장에게 고려청자의 명예를 되찾아달라고 말했던 1967년이면 이미 1964년부터 시작된 국립중앙박물관의 대구면 사당리 이용희선생 집터 발굴을 통해 강진에서 청자기와와 청자타일등이 대량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시기였다.

김회장은 이 말에 귀가 확 트였다. 고려자기야 말로 고향 강진에서 나왔던 것이고 그것을 발전시키는 것은 자신의 한 책무라고 느꼈던 것이다. 그는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빛나는 문화유산인 고려청자의 오묘한 비법을 재현해서 수출의 길을 트고 외화를 벌어들인다면 우리가 문화민족이었음을 세계에 알릴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준비를 서둘러 일본의 도자기 시장과 미국의 전자시장등을 둘러보려고 비행기에 올랐던 것이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이 일본의 세토시였다. 세계적 도자기 수출국인 일본에서도 가장 유명한 도자기 산지였다.

그러나 김향수 회장은 세토시를 천천히 돌아보면서 도자기산업은 장래성이 약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세토시는 도자기산업은 발달돼 있었으나 흙먼지가 많아 공장 주변의 산야를 뿌옇게 물들였고 강물까지 흙탕물이었다. 김회장은 도자기 산업은 미래지향적 첨단기술산업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김회장은 이때 청자산업 진출을 포기하고 대신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기로 하고 훗날 아남반도체와 오늘날의 엠코코리아라는 세계적인 반도체 회사를 탄생시켰다.<김향수 회장 회고록 ‘작은 열쇠가 큰 문을 연다’ 참조>

당시 김회장의 판단이 강진 청자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한참이나 후퇴시켰는지 모를 일이다. 요즘 강진을 비롯한 도자기 산업이 발달돼 있는 지역이 모두 그렇지만, 결코 흙먼지가 주변산야를 뒤덥고 강물까지 흙탕물로 변한 곳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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