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잠겨 있던 고려청자의 문을 두드리다

1977년 고려청자재현위원회 출범‘웅비의 날개 시작’
‘강진도요지 고려청자를 재현해 다시한번 
한국인의 예술성을 전 세계에 자랑하자’다짐

1977년 6월 18일 대구 사당리에서 청자요 기공식이 열리고 있다. 우측으로부터 고건 전남도지사, 이용희 실장, 김성진 문화공보부장관이고, 제일 좌측이 정채균 당시 강진군수다. 문화공보부장관이 강진까지 온 것은 이례적이였다. <사진=고려청자박물관 제공>
1976년 11월 어느날이다. 강진지역 시민단체였던 ‘밀알회’가 작은 초청강연을 열었다. 초청강사는 도예가 조기정씨였다. 조선생은 강진에서 청자요지 발굴작업이 10여년간 계속되고 있을 때 광주 무등요에서 17년간 실제 청자를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인 도자 전문가였다. 훗날 광주광역시 지방문화재 제5호로 지정됐으며 일본과 국내의 도요지를 누비며 평생을 고려청자 재현과 강진청자사업소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그의 강연 제목은 ‘고려청자와 강진’이였다. 그의 연설중에 강진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한 대목이 있었다. ‘일본이 임진란때에 우리나라 도공들을 납치해서 시작한 일본의 도자기산업이 오늘날 세계 제1의 요지생산국으로 군림하고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10년전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도자부분만의 수출액이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을 상회했다’

이 말은 강진의 청자요지가 발굴되어 전국적인 뉴스가 되고 하는 것을 보며 막연히 고려청자를 선망해 온던 강진사람들의 가슴을 흔들었다. 당시 강연회장에는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정채균 군수도 앉아 있었다. 600년전 강진의 조상들이 세계인이 갈망하는 비색청자를 만들어 ‘민족의 슬기와 국위를 널리 선양했던 강진도요지에서 반드시 고려청자를 재현하여 다시한번 한국인의 예술성을 전 세계에 자랑하고자 하는 굳은 결심’이 지역내에 확산되기 시작했다.

우리의 청자 기술을 뺏어간 일본도 하는데 장구한 역사의 청자기술을 가지고 있는 우리 강진이 왜 못하겠느냐는 경쟁심도 나왔다. 우리 강진도 일본의 유명한 도자기촌 ‘사쓰마야끼’나 ‘새도야끼’ ‘구다니야끼’같은 전문 도자기를 생산해서 경제적으로 잘사는 지역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일본에서 고려시대 강진의 관요을 심도있게 연구하고 있다는 것도 큰 자극제가 되었다. 1978년에 발행된 ‘강진향토지’를 보면 ‘일본에서는 고려청자에 대한 연구가 무수하게 이루어져 있고, 특히 관요였던 대구요가 국영기업처럼 운됐다는 것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으나 우리는 그동안 문화재를 경제적 부로 연계하는데 부족했다“고 한탄해 했다.

그러면서 주민들은 600년전 우리 조상들이 세계인이 선망하는 비색청자를 재현해서 다시 한번 한국인의 도예술을 전세계에 자랑하고자 굳게 결심했다. 1976년말의 큰 깨우침은 당장 청자재현 일을 강진군정의 특수시책사업으로 부각시켰다. 1977년 1월이 일이다. 이때부터 청자재현사업은 엄청난 속도로 진행됐다.
 
강진군은 우선 예산도 500만원을 확보했다. 청자재현을 시험하기 위한 가마구축과 각종 기계시설을 설치하기 위해서였다. 청자재현을 주도한 사람들이 필요했다. 기능자는 조기정 선생과 이용희 선생 두사람으로 하기로 쉽게 의견들이 모아졌다. 그게 6월 15일의 일이였다.

김성진 문화공보부장관(중간)등이 기공식을 마치고 주변 가마터를 둘러보고 있다. 아이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강진일보 자료사진>
조기정 선생은 광주에서 이미 청자재현 작업을 상당히 진행중인 사람이였고, 이용희 선생은 64년에 바로 자신의 집에서 청자가마터가 발견된 당사자였으며, 자신소유 논에서 청자가마터가 발굴된 이후 직접 가마터 발굴에 참여하면서 청자에 상당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용희 선생은 그 전부터 청자재현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64년 처음으로 자신의 집터에서 청자기와가 발굴됐을 때 그는 막 군대에서 제대한 청년이였다. 1976년 동아일보 12월 1일자에는 대구 사당리 주민들이 고려청자에 3년째 도전하고 있다는 기사를 구체적으로 게재하고 있다.

‘이용희(38)씨등 마을 주민들은 3년전인 1973년부터 조상들의 솜씨를 다시 익혀 청자를 만들자는데 뜻을 모았다. 주민들은 마을에서 생산되는 고령토와 화목, 그리고 유휴노동력을 이용하기로 하고 전문서적을 구입해 지식을 넓혔고, 마을을 찾는 많은 연구진과 학계인사들의 호응도 받았다. 또 도요지로 이름난 경기도 이천과 광주를 찾아가 제작과정을 익히기도 했다.
 
주민들은 드디어 미완성 작품이지만 습작의 정도를 넘어서는 예술작품까지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양각과 음각이 조화를 이루어 채도 운치가 있는 상감청자까지 이들의 손에 의해 제작되고 있다. 그러나 가마와 완벽한 분쇄 및 정토시설이 없어 경기도 이천까지 가서 초벌구이를 구워오고 있다.

이같은 시설 부족으로 조상의 기술을 계승해 보자는 뜻이 벽에 부딪치자 주민들은 시설비의 지원을 전남도에 지원을 건의하고 있다. 지원요청은 공장시설용대지 구입비 60만원, 가마 구축비 100만원, 분쇄 및 정토시설비 600만원등 2천294만원이였다. 주민들은 이같은 시설이 갖춰질 경우 한달에 세차례 소성작업만 해도 90점을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기사를 요약해 보면 청자재현추진위원회가 출범하기 이전에 사당리 일대 주민들을 중심으로 청자를 다시 만들어 보자는 시도가 꾸준히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수 있다. 또 조기정 선생이 광주에서 17년 동안 연구를 했다면, 이용희 선생도 강진에서 재현기술을 꾸준히 습득해 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감청자 형태까지 이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 졌다는 것은 상당한 기술력이 이미 강진에 있었다는 말이다.

이런 주민들의 오랜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청자재현사업은 날개를 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77년 초 청자재현사업이 정채균군수의 특수시책사업으로 선정된 후 곧바로 이어진게 주관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청자재현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6월 17일이였다.  당연직 위원장은 군수가 맡기로 했다.

위원들의 면면은 짱짱했다. 고문은 길전식 공화당사무총장과 황호동 국회의원, 고건 전남도지사, 최순우 국립박물관장, 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 수석학예연구관, 최몽룡 전남대교수등이 포진했다. 최순우와 정양모 선생은 60년대 초반부터 사당리 일대 청자를 발굴한 주인공이였다. 청자재현사업의 안정적인 추진을 위해 정관계의 유력인사들을 대거 영입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부위원장에는 김창식 당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맡았고, 위원은 조기정씨와 유수현 전 국회의원, 서예가 김현장 선생, 김기삼 조선대교수, 성상원 강진군청 문화공보과장이 자리를 했다. 추진위원회의 실무를 총괄하는 간사에는 이용희 선생이 중책을 맡았다. 청자재현 담당이란 직책은 앞에서 거론했듯이 조기정 선생과 이용희 선생이 나란히 임명됐다. 청자재현의 모든 실무총책은 조기정과 이용희 두사람 이였던 셈이다.

6월 17일 오후 7시 대구면 사당리 당전마을에 있는 ‘대구면 도요지 관리사무소’에서 추진위원회 첫 회의가 열렸다. 이 첫 회의의 회의록이 ‘강진향토지’에 실려 있는데, 당시 위원들의 마음가짐이 얼마 단호하고 의욕적이였는지 생생히 전해온다.

사회를 맡은 정채균 군수의 모두 발언을 들어 보자.
‘우리나라의 국위를 선양하고 있는 고려청자문화의 우수한 작품들이 우리고장 대구도요지에서 대부분 생산되었으나 조상들의 우수한 도예기능이 600여년간 끊어 진 채 계승되고 있지 못함을 오래전부터 무척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에 본인은 고려청자 재현의 필요성을 크게 인식하고 이 고장의 질좋은 토와 기후 수질연료등 자연적인 호조건과 청자 연구에 17년, 10년 이상 경력을 가지고 있는 조기정 이용희 양씨의 기능을 살리고 계승하는데 지원을 다함으로서 능히 고려청자재현의 꿈이 실현될 가능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조기정 선생은 두가지 제안을 한다. 하나는 행정기관에서는 청자재현 단계에 까지만 유도해야 하고 그이후 청자를 굽고 판매하는 일은 위원회 결정에 의해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였다. 나름대로 행정기관으로부터 독립적인 청자재현사업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는 군수의 사인을 청자에 새기자는 것이였다. 그렇게 하면 강진요에서 생산되는 청자가 고가에 팔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조기정 선생은 “앞으로 청자를 재현할 강진요에서 생산되는 청자는 10만원 단위 이하의 제품은 내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권장하기도 했다. 당시의 돈가치를 지금의 가치와 단순 비교할수 없지만 조기정 선생은 지금으로 치면 청자사업소에서는 100만원 이상의 최고급 청자만을 생산해야 된다는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해서 청자재현사업추진위원회가 발족되고, 이어 1977년 6월 18일 대구면 사당리 120번지에서 역사적인 청자요지 기공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김성진 문화공보부장관과 고건 전남도지사, 최순우 국립중앙박물관장, 김석용 문화관광부 문화재관리국장등이 참석했다. 요즘도 그렇지만 농도 강진에 문화공보부장관(지금의 문화부장관)이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77년 청자가마 기공식때 정권 실세였던 김성진 장관이 강진까지 와서 첫 삽을 뜬 것이다. 그만큼 청자재현사업은 국가적인 관심사항이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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