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요한 투자기질 개성상인들 콧대 꺾었다

집요한 투자기질 개성상인들 콧대 꺾었다
금익증권, 명치택시 창업... 조선최고 부호 꿈꿔

동은 선생의 둘째 동생인 김정식씨가 살았던 강진읍 동성리 한옥이다. 이 집은 정식씨의 장남인 김병국씨가 1987년 천주교에 기증해 현재 교육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 병국씨는 이 건물의 원형을 변형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천주교에 기증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진에 김충식이 있었다면 영암에는 현준호란 걸쭉한 부호가 있었다. 현준호씨는 1920년 호남은행을 창립했고, 훗날 영암 서호면에 간척사업을 벌여 200만평의 학파농장을 경영하던 기업가였다. 호남은행에는 동은선생도 주요 주주로 참여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무언의 경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단 땅은 동은선생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지만 현준호씨는 은행장으로서 자본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터라 그 힘은 막강했다. 이런 구전이 있다.

한번은 현준호씨가 조선총독 면담 신청을 했다. 김충식씨의 해운회사인 금릉회조부가 목포를 중심으로 한창 세를 불리고 있을 때였다. 면담이 쉽게 성사되지 않았다.

그래서 현준호씨는 순금으로 된 명암을 준비했다. 교과서 크기의 금판을 만들어 그 위에 ‘현준호’라고 새겼다. 이것을 총독부에 건내자 총독과 면담이 성사됐다. 현준호씨의 요구는 두가지였다.

하나는 영암에서 간척사업을 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것이였다. 총독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훗날 적지 않은 사업비가 지원됐다. 또 한가지 요구는 목포에서 김충식이 혼자서 돈을 독식하고 있으니 다른 사람도 돈을 벌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였다.

당시 목포주변의 최고 황금 여객노선은 목포~용당간 철선이였다. 강진, 영암, 보성, 해남, 장흥 사람들이 목포를 가기위해서는 반드시 용당에서 철선을 타야했다. 이 노선을 김충식이 독점하고 있었다.

목포~용당 여객노선 주변땅 몽땅 구입해 확보
영암 갑부 현준호씨와 재미있는 사연도

김충식은 목포쪽 선창주변 땅과 용당쪽 주변 토지를 싹쓸이 해서 두곳에 배를 운항하고 있었다. 관계가 좋았던 기관들이 어느날 갑자기 표정이 변했다. 현준호가 총독을 면담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현준호씨의 배가 목포~용당간 운항 허가를 받아 취항을 했다. 두 회사는 경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양새에 비위가 상한 동은선생은 과감히 노선을 현준호에게 양보하고 운항을 멈춰버렸다. 현준호씨는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의 할아버지다. 1950년 9월 공비들에게 학살당하며 비운의 일생을 마감했다.  

1930년대 초반 서울로 진출한 동은선생은 명륜동에 300평 규모의 집 두채를 마련한다. 당시 강진에는 명륜동 집의 대문이 10개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만큼 호사스러운 집이라는 뜻이다. 명륜동은 종로구 창경궁 주변으로 당시 서울의 부자들이 모여사는 곳이였다. 서울의 거처지로 장안 최고 부촌을 선택했던 것이다.

1960년대 서울 을지로 2가의 모습이다. 1930년대 동은선생은 이곳에 명치택시와 금익증권을 세우고 전국 최고부호를 꿈꿨다.
동은선생은 1933년 10월 금익증권을, 1936년 3월 명치택시를 서울에 각각 설립했다. 강진과 서울을 오가며 사업을 했던 동은선생은 강진에 내려올 때면 검정색 명치택시를 타고 내려와 집 아래 차고에 세워두곤 했다.

강진읍 동성리 옛 동은선생 집터 아래에 가면 지금도 차고자리가 남아 있다. 당시 명치택시를 구경했던 한 주민은 택시의 색깔이 아주 검었고, 운전사가 하룻내 차에 윤기를 냈다고 회고했다. 동은선생은 강진에 내려오면 별장에서 동은농장 직원들로부터 보고를 받으며 생활을 했다고 한다.

명치택시와 관련해서 1936년 6월 2일자 동아일보 기사가 있다. 기사에 따르면 당시 택시요금 미터제가 도입돼 운전기사들이 부수입이 줄어들게 됐다. 이렇게 되자 6월 1일 아침부터 황금정 이정목(지금의 을지로2가) 866번지 명치택시 운전사 6명이 월급에서 십원을 올려달라며 일제히 동맹파업에 돌입했다.

명치택시는 3월 20일 김충식(48)씨가 설립한 회사로 처음에는 운전수들의 요구를 거절했으나 파업을 시작하자 김충식은 놀란 나머지 운전사들의 집을 일일이 방문해 월급 오원씩을 올려주기로 하고 문제를 해결했다고 신문은 적고 있다. 1936년 3월 서울에서 명치택시를 창립한 동은선생이 운전사들의 파업에 깜짝 놀라 월급을 올려주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운전사의 규모로 봐서 명치택시의 초창기 회사규모가 택시 10여대였고, 본사가 황금정, 요즘의 을지로2가에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을지로2가는 조선의 3대갑부에 들어갔던 박흥식이 선일지물주식회사를 운영하는등 내노라한 부자들이 조선최고 재벌을 꿈꾸며 웅비를 펴고 있을 때였다.

명륜동에 한옥을 구입하고 을지로2가에 명치택시를 설립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동은선생은 조선최고 기업인을 꿈꾸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앞서 1933년 10월 동은선생은 조선총독부로부터 당시로서는 생소한 분야인 증권회사 설립을 허가받고 자본금 20만원을 투입해 금익증권을 세웠다.

1932년 1월 서울에는 주식회사 '조선취인소'가 세워진다. 우리나라 최초의 증권거래소다. 당시 일제는 만주까지 세력을 확장하면서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우리나라 공업화를 추진하기 시작한다.

이에 필요한 자금조달의 필요성도 커지게 됐다. 하지만 당시 증권시장은 근거법령이 없어 증권자본형성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아 자금조달 기능을 원활히 수행할 수 없었다.

동은선생의 한옥 두채가 있었던 서울 명륜동에는 지금도 고풍스러운 한옥이 많다.
일제가 이같은 문제점을 해소하고 증권시장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조선취인소를 두었다. 동은 선생은 이같은 시대변화를 재빠르게 감지하고 금익증권을 설립했던 것으로 보인다.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당시 조선의 증권가는 개성부자들이 완전히 장악해서 일종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었다. 개성상인들은 다른 지역 출신들이 증권분야에 진출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동은선생의 금익증권도 그들 연합체의 농간에 휘말렸다. 그의 계속적인 투자에 결국 개성부자들이 굴복했다는 이야기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김충식은 재산 신용이 정평이 나 있다’
재산신용이 좋다는 말은 현금이 많다는 뜻

사실 우리나라 금융역사에서 개성상인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다. 한때 우리나라 5대 시중은행에 들어갔던 서울은행은 60년대 초 창립당시 은행장을 비롯한 중역들이 모두 개성사람들로 채워져 개성은행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서울은행은 2002년 하나은행에 합병됐다. 40, 50년대 서울에서 현금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던 금융가 큰손들은 대부분 개성출신 사업가들이였다.

1939년 10월의 일이다. 금익증권이 개성상인들과 경쟁하면서 한때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다. 한때 영업이 정지되기도 했다. 이 상황을 보고 잠시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나 있던 동은 선생이 사장직을 맡으며 다시 일선에 나섰다.

동아일보 1939년 10월 31일자에는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는데 금익증권의 앞날을 이렇게 전망하고 있다.
‘신경영자의 재산신용이 정평이 나 있음으로 금익증권은 옛날에 못지 않은 번성이 예고되고 있다’
신문은 동은선생의 ‘재산신용이 정평이 나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당시 재산신용이 좋다는 말은 그만큼 현금동원력이 좋다는 뜻이다.<계속>
    

 

저작권자 © 강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