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후반 대구 사당리 일대 모습이다. 현재는 개인요들이 빽빽히 들어서 모습이 완전히 바뀌었다.
800년 동안 숨죽인 청자요지... 일제강점기 공식적으로
청자가치 몰랐던 주민들 헐값에 넘기고
일본인들, ‘개경· 강화서 발견된 청자 강진이 본산지’ 정확한 분석
1964년 7월 역사적 첫 발굴 시작

우리역사상 최고의 발굴성과로 꼽히는 공주 무녕왕릉 발굴은 1971년 6월 29일 배수로 공사를 하던 인부가 삽끝으로 작은 돌을 하나 들춰내면서 시작됐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찬란한 신라의 문화를 자랑하는 신라금관은 일제강점기 순찰을 하던 일본인순사가 음식점 뒤뜰에서 발견한 것이였다. 신라 고분은 일제강점기 전까지만 해도 조그마한 동산쯤으로 취급받았다.

멀리 갈 것도 없을 것 같다. 2007년 5월 전국을 떠들썩 하게 했던 ‘고려청자 보물선’이 태안앞바다에서 발견된 것은 쭈꾸미가 붙잡고 올라온 작은 청자때문이었다.

수백년 또는 수천년 동안 땅속이나 바닷속에 숨어 있었던 유물과 유적들은 이처럼 우연과 필연이 교차하며 우리 눈앞에 그 찬연한 모습을 드러낸다.

유물과 유적이 ‘우연히’ 발견되는 것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졌기 때문이다. 신라의 고분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오면서 그것이 무덤인 것 조차 역사속에서 지워져 버렸다. 모든게 그런식이다.

그래서 어느날 문뜩 다가오는 문화재의 모습은 감동과 희열을 준다. 1996년 충남 부여군 능산리 옛 절터의 한 구덩이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됐을 때 전국의 국민들이 들썩거린 것도 모두 그런 이유에서 였을 것이다.

강진의 청자는 어떠 했을까. 고려청자는 12세기 후반까지 강진에서 제작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기 1100년까지 그랬다는 말이다. 그후 오랫동안, 그러니까 일제강점기때인 1916년 경성일보에 기사가 나오기 전까지는 고려청자의 존재는 외부세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거의 800년 동안 그랬던 셈이다.

경성신문은 당시 ‘1913년 봄 강진 대구면 주재소원이었던 나카시마기군이 주민들의 제보를 받아 청자가마터를 발견해 보고하고 1914년 이왕직박물직원이었던 스에마시쿠마히코가 현지를 답사했다’고 보도했다. 또 다른 기록은 이왕직재산관리직원이 일왕집안의 산을 돌보기 위해 출장을 왔다가 청자편을 우연히 발견했다는 기록도 있다<1965년 10월 6일 경향신문>.

청자박물관이 들어서기 전인 1970년대 초반 사당리 모습니다. 좌측의 작은 건물 뒷쪽이 청자박물관이 세워진 곳이다.<사진제공=이용희 전 청자사업소 실장>
그럼 고려청자가 수 백년 동안 전국무대에서 사라져 있을 때 그 많은 청자를 만들어 내던 강진 대구 일대에서는 어떤일들이 벌어졌을까. 사람들이 꾸준히 살아왔다. 100년, 200년이 300년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이 최고급 청자를 만든 성지였다는 사실은 잊혀졌지만, 그곳 그 터에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살아왔다.

마당에 수북히 쌓여 있는 청자조각이 그 옛날 고려청자의 살아있는 역사라는 사실은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사람들은 그 위에 집을 짓고, 그위에 밭을 만들어 가족을 꾸리고 자식을 키우며 그렇게 수백년을 살아왔다.

일제강점기들어 청자의 맛을 안 일본인들이 수시로 대구로 찾아들어 청자에 눈독을 들였지만 그때까지도 현지 주민들은 청자의 중요성을 몰랐던 것 같다.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는 구전이 있다. 강진문화원이  발행한 ‘강진의 민담’이란 책에는 현지주민들의 증언을 채록해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일제강점기때일이다. 일본인들이 청자의 가치를 알고 대구 사당리 일대를 자주 드나들었다. 이들은 주민들에게 접근해 집안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청자를 싼 가격에 구입해 갔다. 주민들도 인근밭에서 나온 청자를 일본사람들에게 팔거나 고물수집가에게 헐값으로 넘기곤 했다.

또 묘지속에서 나온 청자유물은 ‘귀신이 붙은 물건’이라면서 집안에 들여놓지도 않았다. 그런 청자는 인근 밭이나 담장밑에 버려두곤 했다.

1960년대 후반사진이다. 상태가 흐릿하다. 아마도 여개산에서 찍은 사진으로 보이는데 용운리에서 흐르는 시냇물이 꽤 넓게 보인다. 멀리 강진만이 보인다.<사진=경향신문 제공>
그런데 어느날 한 농부가 묘를 이장하면서 고려청자를 한점 파냈다. ‘귀신붙은 물건’을 처리할 방법이 고민이었다. 언뜻 생각한게 읍내 일본인이었다. 마을에서는 청자를 읍내 일인들에게 가지고 가면 후하게 산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농부는 청자를 팔아 먹걸리 값이나 할 요량으로 읍내 일본인을 찾아갔다.

읍내에 도착한 농부는 일본인 집으로 가서 가져온 청자를 내려놓았다. 농부는 진귀한 청자의 가치를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일본사람이 그같은 사실을 금방 눈치챘다. 그는 청자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태연하게 “청자를 다시 지게에 지고 대구까지 간다면 다리만 아플 것이니 그냥 놔두고 막걸리 값이나 하소”라고 말하면서 봉투를 한 장 건네주었다.

농부는 동전 한푼도 고마운데 봉투까지 넣어서 주는 것을 보고 감지덕지하고는 주막에 와 막걸리나 한잔할 생각으로 봉투를 꺼내보았다. 농민은 깜짝 놀랐다. 봉투안에는 종이돈이 몇장 들어있었다. 종이돈 한 장(10원)이면 밭한마지기를 살 수 있는 돈이였다.

경색한 농민은 일본사람이 돈을 잘 못 넣은 것으로 알고 막걸리고 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아 나살려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 농부는 집에 도착해서도 방문을 잠그고 누가 돈을 다시 찾으러 오지 않나 전전 긍긍했다고 한다. 아마도 농민이 가지고간 청자는 지전 수백장을 받아도 부족한 보물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현지 주민들에 따르면 일제강점기때 지서순경이나 마을이장들이 지서장에게 청자를 가져다 주면 지서장은 그것을 좋아하면서 허리에 ‘달랑달랑’ 차고 다녔다는 말도 전해 온다.

일본인들이 청자에 쏟은 관심은 대단했다. 이왕직 박물직원이었던 스에마시쿠마히코는 1914년 대구를 답사하고 나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대구에 당도한 나는 즉시 청자파편이 산재한 곳을 찾아 각처에서 파편을 수집하여 이를 시험했다. 그 결과 많은 파편들이 개성과 강화등지에서 발견한 것과 동일한 것임을 알았다. 나는 고려 고도요의 도기장이 바로 이곳이요, 명성을 세계에 떨친 고려청자의 원산지가 바로 이곳이었다는 점에 확신을 얻었다’

일본사람들은 이미 개성과 강화도에서 청자파편들을 수거해 분석하고 있었고, 그 생산지가 강진이라는 것을 정확히 파악했던 것이다. 1925년에는 현지 지표조사를 통해 가마분포도도 개략적으로 정리했다. 또 1939년에는 조선총독부가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을 근거로 대구 일대를 고적 제107호로 지정했다. 나름대로 청자요지를 체계적으로 관리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러다가 해방이되면서 일본인들의 역할은 끝나게 된다. 대한민국정부는 1959년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들을 파견해 대구 일대를 조사했다. 이때 조사를 위한 기초자료는 일본인들이 남긴 것이였을 것으로 보인다.

1963년 문교부 고시에 따라 대구일대 100여기의 청자요지와 주변 부지가 국가사적 86호로 지정됐다. 최근까지 파악된 요지가 188기인 것을 감안하면 당시에는 전체요지의 50% 정도를 파악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때까지 정부나 관련학자들이 파악했던 것은 일본인들이 조사해 놓은 자료를 바탕으로 강진 대구면이 청자를 생산하던 본거지였고, 현지에는 청자요지와 파편들이 많다는 것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해, 그러니까 1964년 9월 대구에서 그해 대한민국 문화예술계의 최대 수확으로 평가받았던 사당리 발굴이 시작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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