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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림 내년부터 일부구역 일반에 개방장흥 우드랜드 보다 30배 규모 숲을 경영한다는 말이 있다. 숲을 경영한다는 말은 나무를 경영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그럼 나무를 경영한다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말일까. 나무를 심어서 키우고, 그렇게 커서 자라면 나무를 활용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숲을 경영한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숲을 경영한다는 것은 세월을 경영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나무는 결코 빨리 크지 않는다. 숲속에서 나무는 보통 50년은 묵어야 나무대접을 받는다. 나무가 큰다고 무조건 돈이 되는 것도 아니다. 나무라는게 잘 자라다가 서리 한방이면 폭삭 할 때가 많다. 큰 나무는 서리를 견뎌내기도 한다. 그러나 태풍 볼라벤과 같은 한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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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4.08.26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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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인들은 이제 제주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됐습니다” 송영남 재 제주호남향우회장은 호남인들의 역할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럴만도 하다. 제주특별자치도 도민이 60만명인데 이중 20만명 이상이 호남사람들이다. 예전부터 호남이란 표현을 해서 그렇지 그중의 대부분은 전라남도 사람들이고, 또 그중의 대부분은 해남, 강진, 진도, 완도, 보성, 고흥등 전남도 서남부지역 사람들이 다수다. 송회장은 고흥 출신이다.이같은 호남인들의 규모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제주도에서 영향력있는 집단으로 통용되게 한다. 매년 5월에 열리는 호남인의 날 행사에는 제주의 정치 경제계인사들이 빼지 않고 참석하는 축제로 유명하다. 지난 5월 25일 ‘세월호 희생자를 위한 추모’를 주제로 제주종합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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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4.08.26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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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엽 할머니 감귤장수 → 중국집 → 한식당제주시 건입동 해남촌에서 살다가 그곳에 조금 떨어진 곳에 새 집을 지어 이사를 해 살고 있는 이방엽(80) 할머니는 제주에 건너온 전남 사람들이 제주에서 어떤 경제생활을 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분이다. 이 할머니는 29세때, 그러니까 1964년 고향인 해남군 황산면 호동마을을 떠나 가야호를 타고 남편과 함께 바다를 건너왔다. 이미 이웃마을등에서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로 들어간 상태였기 때문에 제주도에 가면 일자리가 있다는 소문이 온마을에 퍼져 있었다. 정확한 규모는 잊어버렸지만 논이 적지 않게 있었으나 매년 치르는 혹독한 가뭄 때문에 농사를 지을 희망이 없었다. 아이 둘의 손을 잡고 부부는 바다를 훌쩍 건너왔다.해남 삼지원에서 배를 건너 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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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4.08.26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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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명량’의 역사인물 4명이 한자리 강진읍 영파리 차경동 금강사라는 사당에는 색깔이 서로 다른 동상이 두 개 서 있다. 한분은 이순신 장군이고 한분은 김억추 장군이다. 우측의 김억추 장군의 동상은 일반적인 색깔을 하고 있지만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금빛을 띠고 있다. 이순신의 존재를 눈에 띠게 부각시킨 것이다. 두 분을 함께 사당에 모시고 있는 그의 후손들은 이순신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키면서 그와 한 시대를 함께 했던 김억추 장군을 기리고 있다.이순신 장군은 수군통제사로, 김억추 장군은 전라우도수군절도사 신분으로 정유재란을 치렀다. 수군통제사는 경상·전라·충청도 등 삼도의 수군을 지휘하는 삼남 지방의 수군 총사령관이다. 삼남 지방의 수군은 5도, 다시말해 충청도·전라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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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4.08.26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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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오줌값과 상쇄하는 의미 오랜전통으로 뿌리내려 지난 24일 강진우시장. 추석을 앞두고 290마리의 소가 쏟아져 나와 명절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실감케 했다. 이날 소값은 비육우의 경우 1㎏당 평균 가격이 7천500원이였다. 이날 하룻 동안 강진우시장에서만 250마리의 소가 거래됐다.강진우시장도 그렇지만 전국 우시장에는 재미있는 전통이 한가지 있다. 소값 꼬리떼기가 그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1㎏당 7천500원에 거래된다면 550㎏ 나가는 소는 412만5천원이 된다. 그러나 소를 구입하는 사람이 지불해서 소 파는 사람 통장으로 들어가는 돈은 412만원이다. 5,000원은 계산되지 않고 떼는 것이다. 24일 강진우시장에서도 이 같은 관행은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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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4.08.26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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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이후 자연스럽게 지워질 듯영화 ‘명량’의 인기에 힘입어 영원히 우리들의 기억속에서 지워야 할 일이 하나 생겨났다. ‘철쇄설(鐵鎖說)’이 그것이다. 철쇄설은 명량해전 당시 쇠사슬을 걸어서 적선 수백 척을 깨뜨렸다는 설이다. 울돌목 양쪽에서 철쇄를 설치해서 왜선이 밀려오자 김억추 장군등이 이를 양쪽에서 당겨 왜선을 격파했다는 내용이다. 기록을 보면, 1751년 이중환의 ‘택리지’ 팔도총론 전라도편을 보면 바다위에 머물러 쇠줄을 돌위에 가로질러 걸고서 적을 기다렸다고 적고 있다. 김억추가 자신의 행적을 직접 기록한 1799년 간행된 ‘호남절의록’과 그 뒤 그의 후손들에 의해 20세기에 재편집된 ‘현무공실기’에는 가장 폭이 좁은 곳에다 철쇄를 설치하여 적선을 걸리게 했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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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2014.08.19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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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천 박산 출신, 전술놓고 이순신과 마찰난중일기속 김억추장군 평가 편견 있을수도 영화 ‘명량’이 우리나라 영화사를 다시 쓰고 있다. 지난 17일자로 1천400만명을 넘어선데 이어 벌써부터 2천만명을 예측하는 사람도 있다. 가히 명량 신드롬이라 할 만하다. 세월호참사이후 진정한 리더십에 목말라 하고 있는 국민들이 이순신을 보며 열광하고 있다.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이렇듯 오늘날 우리의 가슴을 뛰게하는 살아있는 생물이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12척의 병선으로 340척의 왜선에 맞선 그의 용맹함은 리더십의 화신이다.영화 ‘명량’속에서 많은 인물들이 이순신과 대비된다. 이순신과 함께 끝까지 적과 맞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이순신의 전략과 전술에 동조한 사람과 그렇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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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4.08.19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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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에서 제주배 타려면 영암 용당에서 철선타일제강점기 들어 제주 길목은 벽파진과 목포 강진에서 벽파진까지 이어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지금은 포장도로를 타고 해남을 거쳐 진도대교를 건너면 벽파진이 금방 나오지만 70년대까지만 해도 상황은 달랐다. 강진사람들이 벽파진에 와서 제주행 배를 타기위해서는 두가지 방법이 있었다.하나는 육로를 이용해 벽파진까지 오는 방법이다. 광원여객이나 금성여객을 타고 해남을 거쳐 도착하는 곳은 해남군 황산면 성산리 삼지원이란 포구였다. 성산리 주민 윤종식(58)씨는 삼지원이란 이름은 정확한 시대는 알 수 없지만 임금님이 내려와 벽파진을 가려고 하는데 풍랑이 너무 강해 세 번을 되돌아와서 붙은 이름이라고 설명했다.삼지원은 벽파진으로 건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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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4.08.05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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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까지 이어지는 1만5천㎞ 해양실크로드와 연결도자문화는 바다를 건너 다녔다. 우리나라는 중국에서 청자제작기술이 넘어왔고, 일본은 우리나라로부터 이를 전수받았다는게 정설이다. 모두 뱃길을 통한 문화의 전파였다. 또 이 뱃길은 청자의 제작 기술 뿐 아니라 생산된 청자가 무역을 위해 왕래한 곳이기도 하다. 한국과 중국, 일본은 좁은 바다를 끼고 있으면서 다양한 문화가 소통된 지역이며, 이중 강진과 중국 용천, 일본 하사미정은 고대뱃길의 핵심지역으로서 청자가 집중적으로 발전한 곳이다.대체로 세 지역의 도자기 교류는 통일신라 말, 그러니까 8세기 후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8세기 완도 청해진을 중심으로 중국과 일본을 상대로 국제 삼각무역을 하던 장보고의 선단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것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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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4.08.05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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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천시: 도자업체 500개, 종사자 1만명. 연간 판매액 2,487억하사미정: 도자업체 150개, 종사자 3천명 축제 매출 860억 강진군: 도자업체 29개, 종사자 100여명, 축제 매출 최대 10억이번 청자축제는 한중일 도자문화 축제와 함께 열리면서 어느때 보다 의미있는 축제가 됐다. 행사를 ‘한중일 도자문화 축제’라고 이름 붙힐 정도의 다양한 행사는 부족했지만 세나라 도자문화 축제의 첫 단추란 점에서 관심이 컸다. 특히 그동안 중국과 일본의 작품 청자는 종종 강진에서도 함께 전시된 적은 있었지만 이번에 생활자기가 전시판매된 것은 처음이여서 관광객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중국과 일본의 생활자기는 청자 명품관 판매부스 바로 입구에 판매대를 비치해 관광객들이 첫눈에 접하게 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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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4.08.05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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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오랫동안 출륙금지령자연재해 수시로 섬 강타4.3사건으로 남자 절반이상 죽어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6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강진을 비롯한 전남지방은 살인적인 가뭄을 수차례 겪으며 온 지역이 초토화 됐다. 먹고 살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고향을 버리고 어딘가로 떠나야 했다. 그들은 서울로 부산으로, 제주도로 떠나갔다. 제주도의 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그럼 당시 제주도는 어떤 형편이였을까. 총 면적 1,847.78㎢의 제주도. 전라남도(12045.82㎢) 땅의 6분 1정도의 크기다. 대한민국의 최남단에 위치하며 한국, 중국, 일본 등 극동지역의 중앙부에 자리잡고 있다. 제주해협을 사이에 두고 목포와는 154㎞, 부산과는 304㎞, 완도와는 104㎞ 떨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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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4.07.15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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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학교가더니 오후에 전장터로강진읍 목리 송채섭(79)씨는 1950년 7월 딱 이맘때쯤을 잊지 못한다. 자신은 중앙초등학교 6학년에 다니고 있었고, 큰형님은 강진농고에 다니고 있었다. 대낮에 학교에서 돌아오자 어머님이 허둥대며 어디론가 뛰어가고 있었다.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송씨는 불안한 마음에 어머니의 뒤를 따라 그냥 뛰어갔다.강진읍내 시장 부근이였다. 군용트럭 6대가 시동을 켜고 지원병들을 차에 싣고 있었다. “대섭아, 대섭아”어머니가 큰형님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다. 그때 트럭 한켠에서 교복을 입은 형님의 얼굴이 보였다. 어머니가 소리쳤다.“니가 왜 거기에 있냐. 빨리 내려온나. 학생이 공부해야제 군대는 무슨 군대냐. 대섭아 빨리 내려온나. 빨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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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4.07.15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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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영향 장기결석 강진의 중학생 619명가뭄 또 가뭄에 장사가 없었다보은산에서 기우제 지냈으나 헛탕그럼 60년대 중반부터 계속된 가뭄이 강진에서는 어떤 형태로 진행됐을까. 경향신문 1967년 9월 14일자 1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전남 강진군 도암면 수양리의 경우 가뭄에 지쳐 살길을 찾아 이농하는 농민이 속출하고 있는데, 이마을 217명의 청장년중 임영일씨(22)등 92명이 8월 하순부터 9월 13일 사이에 마을을 떠났다’67년 가뭄은 5월 27일부터 6월 21일까지 26일간 비가오지 않았고, 중간에 비가 조금 내렸으나 다시 7월 28일부터 17일간 가뭄이 계속됐다. 68년 한해는 7월에 25㎜의 비가 내렸을 뿐 8월 15일까지 비한방울 내리지 않았다. 68년 가뭄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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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4.07.08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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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밭에서도 교묘히 발자욱 감춰몇 년전 성전 수암산에서 사냥개들과 멧돼지를 쫒던 야생생물관리협회 강진군지부 윤현묵 회장(사진)은 깜짝 놀란적이 있다. 사냥개들에게 쫒기던 어미 맷돼지가 산을 반바퀴쯤 돌며 쫒기더니 어느 지점에서 오줌을 여기 저기에 갈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반대편으로 방향을 잡았다. 쫒아오던 사냥개들이 멧돼지 오줌냄새를 맡고 그 지점에서만 이리저리 날뛰며 난리를 피웠다. 주변에 멧돼지가 있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그때 멧돼지는 빠른 걸음으로 도망가지도 않고 천천히 작은 능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멧돼지가 여유있게 사냥개들을 따돌렸던 것이다.최근의 경험이다. 눈이 많이 내린날 병영 수인산 기슭에서 멧돼지를 쫓고 있는데 하얀 눈위에 선명하게 찍혀 있던 발자욱이 갑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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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4.07.08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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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 칠흙같은 어둠속‘공격 개시’조심조심 멧돼지 앞 30m 까지 접근‘꽝’지난 2일 새벽 3시 경 강진읍 신천마을 뒤쪽 고구마밭. 산으로 둘러쌓인 들녘은 칠흑같은 어둠에 휩쌓여 정막감만 흐르고 있었다. 그때 조용히 이 곳을 향해 발길을 재촉하는 사람 셋이 있었다. 이들은 야생생물관리협회 강진지회 소속 이종기(60. 신전면)씨를 비롯한 3명의 엽사들이였다. 긴 엽총에는 탄환이 장전돼 방아쇠만 당기면 언제든지 치명적인 총알이 날아갈 수 있는 상태였다. 이들은 고구마밭으로 최대한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 이쪽에서 고구마밭을 향해 써치라이트가 갑자기 켰졌다. 써치라이트는 고구마밭 중간을 향했다. 그곳에는 큰 멧돼지 한 마리가 고구마밭을 파헤치고 있었다. 인적을 느낀 멧돼지가 본능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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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4.07.08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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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포기하고 그들은 제주도로 갔다여객선이 제주도에서 식수 실어오기도1968년 8월 1일부터는 제주도에서 물을 실어오는 초유의 공수작전도 벌어진다. 전남일보 8월 3자에는 목포~제주간을 오가는 여객선 가야호가 8월 1일부터 물을 하루 20리터(120드럼)씩 싣고와 목포시의 급수차량으로 고지대의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전남일보 8월 6일자에는 ‘일군 땅이 쇠떵이처럼 굳으면서 이농자가 속출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2년째 계속되는 가뭄으로 영암군 시종면의 경우 1만6천여명의 농민들이 하늘을 원망할 기력도 잃어버렸다.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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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4.07.01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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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에서 백도행 유람선을 운항하는 황해연 선장은 강진에서 가져간 족발을 무척 맛있게 먹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젊었을 적에 남포를 수시로 드나들었다고 했다. 어선에서 돈을 벌던 시절, 거문도 일대에서 잡은 고기를 싣고 곧바로 남포로 직행을 했다. 60년대 이야기이다. 남포에 오면 여러 가지 물품이 넘쳐났다. 섬에는 귀한 쌀을 구할 수 있었고, 야채를 구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것들이 남포에 있던 중간상인들을 통해 이뤄졌다. 굳이 강진장에 가지 않더라도 배를 정박하고 남포의 여러 술집에서 몇날을 방잡고 있으면 중간상인들이 고기를 사주었고, 배위에 쌀과 채소를 올려 주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당시 남포마을에서 중간상인을 하던 주민들의 이름을 술술 외었다. 남포마을에만 술집이 다섯군데가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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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4.07.01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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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에서 거문도로 가는 가장 빠른배가 출항하는 고흥군 봉래면 축정리 나로도항은 고흥반도의 동남쪽 끝지점에 있다. 지금은 고흥반도에서 다리를 두 개씩이나 놓아 이곳이 육지와 연결됐지만 예전에는 내륙과 연결되기가 어려운 곳이어서 대부분의 생필품 수급을 뱃길에 의존했다. 축정리 해안에는 장이 크게 섰고, 이 일대를 강진옹기배가 수시로 드나들었다. 축정리는 규모가 큰 면소재지다. 이곳에서 뱃길로 산을 하나 돌면 나로우주센터가 있고, 가까운 부두에서는 하루에 두 번씩 거문도행 쾌속선이 출발하고 있었다. 특히 이 일대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지역이라 유람선이 정박해 있었다.주민들은 “강진 옹기배가 축정장은 물론 건너편 내발 등에도 내집 드나들듯 댕겨갔다”고 했다. 내발은 고흥군 도화면에 속해 있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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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일보
2014.07.01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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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우리땅’쐐기 박을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강진과 거문도 지역, 울릉도에 더 많은 관심가져야” 고흥군 나로도항에서 쾌속선을 타고 1시간 20분 거리에 있는 거문도는 조선시대 유난히 울릉도와 왕래가 깊었던 곳이다. 1882년 이규원 감찰사 일행이 울릉도에서 조선인들과 일본인들 간에 마찰이 있다는 보고가 올라와 고종의 명을 받고 감찰하러 온 적이 있었다. 그가 남긴 ‘감찰일기’를 보면 울릉도에서 140명의 조선인을 만났고 이 중 115명이 전라도 출신이었다. 이들은 울릉도에서 배를 건조하고 있었다.일본과 독도 영유권 분쟁을 놓고 논쟁을 벌이고 있는 한국 학자들은 특별한 옛 기록이 없는 처지에서 조선시대 전라도 사람들이 울릉도와 왕래하고 그곳과 가까운 독도를 오갔다는 증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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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4.07.01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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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마지막 강진읍 장날인 지난 29일 오전 11시 50분. 장 한 귀퉁이에서 마늘을 팔고 있는 이연재(69. 신전면 논정리 벌정마을)씨 부부는 파장이 가까워졌지만 아직도 좌판에 마늘이 수북했다. 부부는 새벽 5시에 아침밥을 먹고 조그만 트럭에 마늘을 싣고 장에 나와 자리를 잡았다. “마늘이 조금 팔리기는 하지만 가격이 워낙 떨어졌어요. 가격이 싸서 그런지 사가는 사람도 줄어드는 것 같고...” 이씨 부부는 가격이 조금 낮아도 빨리 팔아버리고 집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최근 마늘 가격은 시중에서 한접에 1만3,000원 정도에 거래되고 있다. 지난해에는 2만5,000원에서 3만원까지 판매하던 것들이다. 중간상인들이 마을에서 사가는 가격은 ㎏당 2,200원선이다. 한접 무게가 5㎏이므로 중간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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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4.07.01 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