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파진항은 제주로 향하는 배들에게 없어서 안되는 항구였다

목포~제주 노선 1955년 첫 취항
가야호, 안성호 등 여러 척 배 운행

제주로 가는 길목인 진도군 벽파진항은 목포~제주간 뱃길에서 배들이 들렀다가 가는 길목이었다. 여전히 벽파진항에는 오래된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다.
제주상공회의소가 지난 2000년 발행한 ‘제주상의 육십오전사’에는 당시 목포~제주노선에 투입된 배의 이름과 사진들이 실려있다.

가장 먼저 취항한 것은 1955년 1월 8일부터 항해를 시작한 황영호였다. 그 다음으로는 1958년 9월 6일 화양호가 운항을 시작했다. 제주일보 58년 9월 5일자에는 화양호가 제주~목포간을 취항한다는 기사가 게재돼 있다.

또 역시 제주상공회의소 자료에는 63년 8월 13일에 가야호가 선을 보였다. 지금 제주에 생존해 있는 전남사람들은 가야호란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60년대 중반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되면서 상당수 전남사람들이 이 배를 타고 제주도로 들어왔다.

제주지방 해운항만청 자료에는 가야호의 톤수는 554톤이었고 71년 11월에 취항했다고 했으나 주민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제주상공회의소 자료가 더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은 가야호가 700톤은 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뒤 1968년 4월 8일에는 안성호가 처녀항해를 시작했다. 407톤급 안성호는 당시 첨단장비를 탑재하고 있었다. 당시 제주일보에는 안성호가 무선 전신전화와 레이더 시설를 탑재한 호화여객선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당시에는 무선 전신전화와 레이더 시설도 첨단시설이었던 것이다.

이어 1969년 5월에는 삼화호가 취항해 전남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이밖에도 청룡호와 황룡호 등이 제주를 운항하는 등 70년대말까지 벽파진을 거쳐 목포~제주를 항해한 선박이 7~8대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배들은 철선이라는 위엄을 자랑했지만 내부시설이 형편 없었다. 퇴역 직전의 해군함정이나 화물선이 약간 개조돼 페인트를 새로 칠한 다음 민간인 수송을 맡은 경우가 많았다.

뱃길의 사연도 많다. 목포~벽파까지는 두시간 정도가 걸렸다. 목포에서는 종종 전문 노름꾼들이 배에 올랐다. 처음에는 자신들끼리 화투를 하는 척 하다가 분위기를 돋우면서 제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화투판으로 끌어들였다.

낯선땅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무료한 항해시간을 달래기 위해 화투판을 기웃거리기 십상이었다. 그렇게 걸려든 사람들은 십중팔구 노름꾼들에게 돈을 털리고 말았다. 제주에 들어가 며칠간 생활비라도 하기 위해 꼬깃꼬깃 준비해간 돈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날려버렸다.

전문 노름꾼들은 목포~벽파까지 두어 시간동안 일을 끝내고는 벽파항에서 내려버렸다. 배는 제주도를 향해 계속 움직였고, 화투판에서 돈을 잃은 사람들은 텅빈 호주머니를 가지고 그 배 안에 몸을 싣고 있었다.

벽파진에서 승객을 실을 때 안성호나 삼화호와 같은 작은 배는 부두에 직접 닿았지만 규모가 컸던 가야호는 부두에서 200여m 떨어진 곳에 닻을 내리고 작은 배가 그곳으로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당시 가야호를 탔던 사람들은 “물이 썰물이면 우수영에서 내려오는 바닷물이 쇳소리를 낼 정도였기 때문에 바다 가운데서 배를 옮겨타는 것은 보통 위험한 일이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어려운 뱃길이지만 해방후 사고드물어
벽파진항에는 여관, 식당 등 상권형성

벽파에서 제주까지는 여덟시간 정도가 소요됐다. 낮시간에 출발하는 배가 그랬다. 그러나 밤에 출발하는 배는 한두 시간이 더 소요됐다. 똑같은 항로였지만 밤길을 안내하는 첨단장치가 없는 시절이라 항속은 훨씬 느렸다. 밤에 출발하는 배는 삼화호 같은 소규모 배였다.

파도는 밤에 더 심했다. 밤배를 탄 사람치고 배멀미를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추자도가 가까워져 파도가 강해지면 배안에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물건들이 뒤엉키고 아비규환이 될 때가 다반사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뱃길이었지만 해방 후 목포~제주간 항로는 큰 안전사고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서귀포~부산간 항로에서는 1970년 12월 15일 전남 여수시 남쪽 소리도 앞바다에서 365t규모의 정기여객선 남영호가 침몰해 310명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사고 원인은 화물적재량을 3배나 초과해서 실었기 때문으로 밝혀졌다.

당시 피해를 본 사람들은 대부분 서귀포에서 부산으로 해산물을 팔러간 사람이거나 서귀포에서 팔기 위해 부산으로 공산품을 사러간 사람들이었다. 이중에는 호남사람들도 포함돼 있었다.

필자는 2006년 9월 벽파진 항 일대에서 당시의 배 사진을 구하려 노력했으나 아쉽게도 사진 한장 구할 수 없었지만, 나중에 제주에 들렀을 때 진도출신의 박희수씨로부터 관련 사진을 건네받을 수 있었다.

벽파진에 가면서 해남향교 전교를 역임했던 윤병진옹(2006년 현재 85세. 해남군 황산면)을 만났다. 윤옹은 목포~벽파진~제주로 이어지는 뱃길의 역사를 비교적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한때 제주로 가는 길목이었던 해남군 황산면 부곡마을.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조선시대 제주로 들어가는 주요 길목이 황산면 부곡리에 있는 황원포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곳은 벽파진에서 해남땅을 바라보면 조금 남쪽으로 내려가 있는 곳이다. 갓바위가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1900년대 이전까지 황원포는 제주, 완도, 서울로 가는 모든 배가 정박하던 곳이었다. 그러다가 근대들어 벽파진이 제주나 부산으로 가는 뱃길의 중심지가 되었다.

윤병진옹의 설명에 의하면 1950년대까지 목포~벽파진~제주 뱃길은 돛을 단 배가 왕래했다. 당시 30대였던 윤옹은 해남 황산면과 진도 고군면 사이의 해협에서 이리저리 횡단하던 돛배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몇 가지 기록들은 당시에 목포~제주를 오가던 철선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였던 1922년 목포를 출발해 제주도로 들어갔던 全南汀生이란 일본 사람은 기계배를 타가며 고생했던 기록을 생생하게 적고 있다.

이 일본인은 조선우편기선회사의 150톤급 코오마루(公州丸)를 타고 해도에 오른다. 배는 섬과 섬 사이를 지나며 큰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서 목포를 출발한 지 7시간만에 추자도 해상에 도착한다. 그러다가 추자도 인근에서 서풍을 만나 ‘아무리 대담한 선장도 항해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가 됐다.
 
아침이 되어 고깃배가 출항할 수 있을 정도의 양호한 날씨를 살피며 추자도를 출발했으나 망망대해에서 느닷없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배의 3배나 되리라고 여겨지는 큰 파도가 쿵하고 뱃전에 부딧칠 때마다 배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재빨리 기울어진다. 리베트가 빠진게 아닌가하고 생각이 들 정도로 요동이 되풀이되어서는 아무리 호방한 사나이라도 하더라도 기가 질릴 수밖에 없다.
 
특히 스쿠류의 공전으로 지독한 음향을 듣게 될 때마다 오싹하니 손에 땀을 쥐는 것이었다. 다만 눈을 감고 부처님께 기도를 올릴 뿐 이와 같이 절대적인 대자연의 놀림에 몸을 맡기는 신세가 되면 영리함과 어리석음, 아름다움과 추함도 한푼의 가치도 없고, 우여곡절에 고뇌하는 인간세계의 어리석음을 절실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혼자서 되뇌이고 있노라니까 급히 머리 위에서 기적 몇 마디가 울렸다. 우리는 5시간의 장시간을 흔들리며 또 흔들리면서 피를 토하는 고통을 맛보았던 것이다.’

제주의 항로는 조선시대 때까지 범선이 이용되어 오다 일제강점기 들어서 동력선이 등장했고, 광복 후에는 미 군용선을 개조한 화갯선 시대를 거쳐 1960년대에 철부선이 등장했고, 80년대 중반들어 카페리호가 선을 보인데 이어 요즘에는 쾌속선이 바다를 종회무진하고 있다.

이 노선은 우리나라 서남부지역 육지사람들이 제주로 들어가는 거의 유일한 뱃길이었다. 반대로 이 길은 제주사람들에게도 서울로 가는 가장 빠른 뱃길이었다. 지금은 제주~서울간 운송객의 90% 이상이 항공편을 이용하지만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상당수의 제주사람이 서울에 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목포로 나와서 기차를 탔다.  

다시 김구월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김구월할머니는 벽파진항에서 소위 큰 식당을 하고 있었다. 70년대 초반에는 밀려오는 사람들이 잠자리가 부족해서 지붕자락을 의지삼아 바닥에 자리를 깔고 그대로 누워자는 모습이 비일비재했다.

1984년 10월 벽파나루에서 직선거리로 6㎞ 떨어져 있는 서북쪽 지점에 진도 연륙대교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여인숙이 다섯 군데나 됐다. 식당도 다섯 군데 정도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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