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해양문학의 백미‘표해록’은 강진~제주 뱃길에서 비롯됐다

각종 표류로 인해 해양 문학탄생 계기
제주 장한철의 사건이 표류기 탄생

표류해서 일본에 도달했던 조선인의 묘를 찾아 올라가는 길에서 바라본 일본 오지카정 해변의 모습.
다음날 아침 일찍 섬의 서쪽 해변으로 갔다.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곧장 올라가면 강진이 나온다. 반대로 강진쪽에서 바람을 타고 표류하면 곧바로 이곳으로 떠내려 온다.

인터넷 검색프로그램인 구글어스에서 길이를 측정해 보니 직선거리로 276㎞이다. 육지로 따져 보면 강진~충남 천안 정도의 거리다.

하멜이 1666년 9월 4일 밤 여수를 탈출해 오도열도에 도착한 시점이 이틀 후인 것을 감안하면 한반도 서남부에서 이곳 오도열도까지 표류하는데 2~3일이 걸렸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해변은 영락없는 제주도의 그것이었다. 날카롭고 시커먼 현무암들이 해변에 꽉차 있었다. 해변에 부딪치는 파도소리가 마치 유리가 깨지는 소리 같았다. 안전하게 이곳에 도착한다 해도 배는 해변에서 언제라도 박살날 일이었다.

해변은 길었다. 남쪽으로 오도열도가 줄지어 펼쳐져 있었다. 오지카는 오도열도 150여 개의 크고 작은 섬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전날 밤 여관에서 저녁밥을 먹는데 현지 지방방송 텔레비전 뉴스에서 “한반도에서 떠내려오고 있는 표류 물질이 오도열도의 큰 골치덩이가 되고 있다”고 했다. 화면에서는 어깨띠를 두른 민간인들이 해변에서 한국어 상표가 붙은 각종 쓰레기를 줍고 있는 모습이 방영되고 있었다. 표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다.

오지카의 서쪽 해변을 빠져 나오며 바닷가로 갔다. 칠성사이다 병, 해표식용유 병, 각종 생수 병이 이곳저곳에 널려 있었다. 한반도에서 해류를 따라 이곳 오지카까지 떠내려 온 빈병들이었다. 오도열도 주민들에게는 골칫덩이였지만, 필자에게는 너무도 반가운 ‘쓰레기’였다.

수억만년 전 지구가 탄생하면서 표류는 시작됐을 것이다. 지구상에 바닷물이 있고 사시사철 불어대는 바람이 존재하는 한 표류는 계속될 것이다. 2007년 11월 18일 오전 10시 배를 타고 오지카섬을 빠져 나왔다.
격렬했던 표류사건은 표류기라는 해양문학을 낳았다. 해양문학은 바다가 무대다.
 
잘 알려진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라든가 J.베른의 ‘해저 2만리’ 등이 해양문학의 고전에 속한다. 우리나라에서 해양 고전문학의 백미로 꼽는 책 중에 장한철의 ‘표해록’이란 책이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 책을 잘 모른다. 또 우리나라 해양문학의 효시로 꼽히는 이 책의 내용이 강진~제주간 뱃길에서 일어난 기록이라는 사실 또한 마찬가지다. 강진과 제주사이의 뱃길에서 1770년도에 우리 해양문학의 대사건이 있었다.

표해록은 1770년 12월 제주의 장한철이란 사람이 서울에 과거를 보러가기 위해 제주항에서 29명의 일행과 함께 배를 타고 강진의 남당포(지금의 남포마을)마을로 항해 하다가 표류한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전 해양문학이 강진~제주간 뱃길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오지카섬의 해변에는 지금도 한국에서 쓰레기가 ‘표류’해온다.
일본까지 흘러갔다 남당포로 돌아와
20여일만에 귀환… 1959년 학계등장

표해록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자. 장한철은 1770년 12월 25일 일행과 함께 제주항을 떠나 그날 오후 지금의 완도 소안도 인근에서 갑자기 폭풍우를 만나 서쪽으로 밀려 표류하기 시작한다. 배는 흑산도 인근까지 밀려갔다.

배는 다시 서남풍을 만나 동쪽으로 밀려갔다. 제주를 출발해 3일 동안 표류한 끝에 12월 28일 새벽 유구열도, 지금의 나가사키의 무인도 호산도(虎山島)에 표착했다. 그곳에서 음력 정월 초하룻날 일본 해적단의 공격을 받아 죽을 고비를 넘기고, 정월 초 이튿날 안남(베트남)의 상선의 구조를 받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장한철 일행이 제주사람인 것을 파악한 안남상선은 정월 초닷새 날(표류 12일째) 아침에 작은 배를 내주며 이들을 제주도 동남쪽 망망대해에 내려놓고 가버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행 29명은 모두 살아 있었다.

배는 다시 비바람을 만나 서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시 흑산도 앞바다였다. 배에는 돛대도 없었다. 다음날 밤(표류 13일째. 음력 정월 초 엿새) 배가 처음 표류했던 소안도 인근 노어도 서북지역으로 밀려 들었다. 이 일대는 바위투성이인 작은 무인도들이 많아 험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모두들 죽는다고 통곡을 했다. 승선자들의 자포자기 속에 배는 그날밤 모도를 지나 청산도의 어느 해안으로 밀려갔다. 배는 바위에 부딛쳐 산산히 부서졌다. 정월 초엿새날 한밤중이었다.

육지에 오른 사람은 겨우 10명이었다. 나머지는 배가 부서지면서 모두 실종됐다. 청산도에 오른 10명 중에 두 명은 산길을 따라 마을을 찾아가다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고 만다. 제주에서 출발한 29명 중 단지 8명만이 살아남았을 뿐이다. 이 정도면 우리나라 표류사중 가장 처절했던 해난사고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다.

살아남은 8명은 일주일 동안 청산도 주민들의 극진한 간호를 받고 회복한다. 그들은 정월 13일 아침 청산도를 출발해 지금의 신지도로 가서 하룻밤을 잔 후 다시 고금도를 거쳐 지금의 마량인 마두진에서 다시 숙식을 했다. 장한철 일행 8명이 마량을 떠나 칠량을 거쳐 남당포에 도착한 것은 정월 15일 밤중이었다. 제주도를 출발한지 20일만이자, 동행인 21명을 바다에서 잃은 후였다.

장한철의 원고는 1959년 8월 당시 서울대학교 정병욱교수가 제주도에서 학술조사를 벌일 당시 애월상업고등학교 교장이던 장응선씨란 분으로부터 원고를 입수하면서 학계에 처음 보고됐다. 이후 정교수가 1979년 번역본을 출간하면서 강진~제주 뱃길에서 일어났던 이 기구한 사연이 세상에 알려졌다. ‘처절한 해난사고’가 있은지 189년만의 일이다.

장한철은 당시 남당포에 도착해 한양으로 올라가 당초 목표대로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그는 4년 후 다시 과거에 도전해 영조 51년 과거에 합격, 제주의 대정현감과 강원도의 취곡현령을 지낸 것으로 전해온다.

장한철의 ‘표해록’이 가지고 있는 내용의 역동성과 문학성에도 불구하고 표해록은 지금까지도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나 제주~강진뱃길에서 비롯된 이같은 사실(史實)이 해당지역에서 조차도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 해양문학사는 물론, 해당지역의 해양사(海洋史)를 다루는데 크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드라마 세트장을 지어놔도 관광지가 되고, 고전의 무대가 세계적인 명소가 되고 있는 현실에서 장한철의 표해록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역사의 현장이 아무 가치없이 방치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장한철 표해록의 무대는 바다와 돛단배 이지만 육지의 무대는 완도 청산도와 남당포(지금의 남포마을)이다.

그중에서 청산도의 위치는 단연 빛난다. 청산도는 인근 해역에서 장한철 일행 29명중 21명이 사망한 곳이자 장한철이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설화같은 만남을 가진 곳이다.

우리나라 해양문학의 효시였던 소설의 무대가 바로 청산도였던 셈이다. 많은 환경이 변했지만 청산도는 그대로 살아 움직이고 있다. 청산도에 가면 영화 ‘서편제’의 촬령지가 유명한 관광지로 소개돼 있고, 영화 ‘봄의 왈츠’ 세트장이 지금도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이곳이 장한철 표해록의 중심무대라는 안내판은 어디에도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구사일생으로 청산도에서 살아남은 장한철 일행 8명은 청산도 주민들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며 청산도에 머무르게 된다. }

장한철은 청산도 주민들이 돌아가면서 자신들의 음식을 챙겨주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어느날 장한철은 마을의 당집에 들린다. 그곳에서 소복을 입고 엄마의 일을 거드는 무녀의 딸을 만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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