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민들은 순풍이 불면 대마도를 거쳐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지볼트 강진사람들 만남 소감 글로 남겨
지적수준이 높다 등 긍정적 평가 대부분

일본 나가사키항은 조선시대 표류민의 임시 수용시설이 있던 곳으로 1627년부터 1888년까지 1017건의 표류기록이 남아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거쳐갔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시 지볼트의 기록으로 돌아와 이제 강진사람들을 만나보자.

■ 김치윤(金致潤)
지볼트는 김치윤이 학자이면서 진정한 한국민족의 골상(骨相)을 지닌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김치윤은 지볼트가 일행 중에서 누가 가장 서민적인 모습이냐고 묻자 스스로를 꼽으면서도 자신이 신분이 높은 계급의 전형이라고 뽐내는 자신감을 잃지 않는다. 지볼트는 김치윤이 학자이면서 선생(훈장)이어서 꽤 꼼꼼하게 보인다고 했다.
김치윤은 지볼트에게 천자문을 선물하고 한시를 적어주었다. 한시 옆에는 한글을 적어 지볼트가 한국문자를 연구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 허사첨(許士瞻)
상인(商人)이다. 지볼트는 허사첨이 오늘의 불행을 깡그리 잊어버린 듯 쾌활하면서 진지한 태도를 보여주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허사첨은 자신이 상인이지만 지체가 낮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지볼트에게 보여주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 허사첨도 지볼트에게 한시와 함께 옆에 한글을 적어 선물했다. 외국인에게 한시를 적어 선물할 정도였다면 허사첨의 주장대로 그는 상인이었지만 지체가 낮은 사람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그의 한시 끝에는 ‘됴션국 젼나도 강진현 허사담 씀’이란 글귀가 선명하다.

■ 의기잃은 상인
허사첨과 함께 두 명의 상인 중의 한명이다. 이름은 나와 있지 않다. 지볼트에 따르면 이 상인은 정신이 나갔다고 할 정도로 시무룩해 있었다. 그는 표류 중에 자기의 소지품을 모두 잃어버렸으며 배가 난파당했을 때 부상까지 입었다고 털어놓았다.

■ 선장(船將)
나이가 60세로 소개된 강진사람이다. 지볼트는 선장을 통해 한국인의 머리, 이마, 턱, 뺨의 전형을 보려고 했다.

■ 선원(船員)
지볼트는 이 선원이 한국인의 대표적인 얼굴 모습을 가진 것으로 보고 있다. 나이는 23세이고 앉은 키는 5피트7인치로 기록돼 있다. 백인종과 몽고족의 중간형으로 관찰하고 있다.

■ 견습선원(見習船員)
나이는 나와 있지 않다. 지볼트는 이 견습선원이 전형적인 몽고족의 모습을 지닌 것으로 파악했다.

지볼트는 강진사람들을 만난 후 다음과 같은 느낌들을 적었다. “약간 어리둥절한 눈빛이 서서히 빛나기 시작했다” “일본인보다 더 아시아적이다” “쾌활하고 명랑하다” “한국인은 지적 수준이 일본인보다 낫다”
대단히 긍정적인 느낌들이다. 지볼트를 만난 강진사람들은 나중에 귀국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당시 표류민 귀환은 조선과 일본 사이에 매우 긴밀하게 이뤄졌던 만큼, 관례에 따르면 일본인 안내원이 그해 4~5월께 남동풍을 등에 업고 일련의 표류민들을 인솔해 부산으로 건너와 조선당국에 이들을 인계하면, 이들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그동안 있었던 일을 심문받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80여 년 전의 일이다. 이들의 후손들 중에 아직 강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없으라는 법이 없다. 그들이 보고 싶다.

일본의 남쪽 도시 나가사키(長崎)현 나가사키시 데지마마치 6-1 시내 거리. 우리의 광주은행격인 나가사키의 지방은행 주하치은행의 본사 건물이 9층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주변에는 바닷물이 좁게 운하처럼 흐르고 있어 근처가 나가사키항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이곳이 바로 조선시대 때 일본으로 표류해 온 조선사람들의 임시 수용소가 있었던 자리다. 1627년부터 1888년까지의 기록으로만 1017건이나 보고되고 있는 조선사람들의 일본 표류 사건. 과연 여기를 거쳐간 사람들은 얼마나 많을까.

필자는 2007년 11월 안내원과 함께 나가사키의 조선표류인 수용소 자리를 찾기 위해 현지를 찾았으나 이곳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전 약속을 해놓고 찾아간 나가사키 역사문화박물관 관계자도 마찬가지 였다.

역사문화박물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나가사키시 관광부 관광추진과 소속 타테이시구미여씨는 “나가사키가 일본으로 표류한 사람들의 총 집결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 구체적인 장소가 어디인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했다.

대신 나가사키 역사박물관측은 소장중인 표류관련 기록들을 공개해 주었다. 한꺼번에 사진을 찍되 낱권씩 촬영은 금지라는 전제 조건을 달았다. 표류인들을 심문했던 일종의 진술자료였다.

일본에 표류한 조선인들은 이곳 나가사키로 보내져 당국의 심문을 받았다. 어디에서 온 누구이며, 언제, 어떻게 몇 명이 표류했느냐고 질문해서 기록하는 것이다.

초서로 내려 쓴 한자를 해독하기 어려웠으나 조선이란 글자는 곳곳에서 보였다. 심문을 마친 표류인들은 단체수용소로 옮겨 고향으로 가는 북서풍이 불기를 기다렸다.

기록에 따르면 많게는 3개월에서 6개월까지 대기한 사람들도 있었다. 순풍이 불면 대마도를 거쳐 부산에 도착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취재를 마치고 이동할 때 박물관측에서 가이드에게 전화가 왔다. 자료를 찾아 본 결과 집단수용시설이 있었던 곳은 항구 남쪽으로 추정된다는 전갈이었다. 반가움에 사로잡혀 남쪽항으로 향하고 있는데 잠시 후 또 전화가 왔다.

항구 남쪽의 고대지명에 대마번(對馬藩 : 일종의 대마도 출장소)이라는 곳이 있는데 현지 사학가에게 확인한 결과 대마번에 수용시설이 있었고 정확한 위치는 데지마 섬 건너편에 있는 지금의 주하치은행 본사건물 자리라는 것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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