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동안 억류됐던 하멜일행은 해류를 타고 일본으로 탈출했다

제주, 해남, 영암 거쳐 한양으로 압송
강진 병영면에서 억류생활하다 탈출

큰 화물선이 강진~제주간 뱃길인 완도와 추자도 사이 해역을 지나고 있다. 예전부터 강진~제주간에는 상인들의 교류가 활발해 뱃길이 자주 활용됐지만 그만큼 태풍과 강풍을 만나 일본까지 표류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 박제가와 함께 북학(北學)4가로 꼽히는 이덕무의 기록에 따르면 스페르베르호의 길이는 91m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상당히 큰 배다. 넓이는 18m에 달하고, 배의 두께는 0.6m인 1천톤급의 배였다.

놀랍게도 당시 네달란드의 다국적 무역회사 동인도회사는 이같은 배를 1천500척이나 소유하고 있었고, 하멜의 목적지였던 일본 나가사키의 데지마상관에는 1641년부터 1847년까지 606척의 동인도 선박이 도착했다는 것이다.

하멜이 제주도에 표류하기까지 제주도 남쪽 바다를 이용한 일본과 서양의 교류는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고, 스페르베르호는 이중의 한 척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멜 일행은 대정현으로 끌려가 심문을 받았고, 이후 1654년 6월 초순 한양으로 압송되기까지 11개여 월 동안 제주에서 억류생활을 했다.

하멜 일행은 제주에서 배를 타고 해남에 도착해 영암을 거쳐 한양으로 가게 된다. 한양에서 2년여 동안 생활한 하멜 일행은 1656년 3월 강진으로 내려와 병영에서 억류생활을 했다. 이후 1663년 2월말 여수의 좌수영과 순천, 남원으로 분산되기까지 7년 동안 강진 병영에서 생활했다.

이후 하멜은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한 끝에 1666년 9월 4일 밤 돛단배에 몸을 싣고 여수를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제주도에 도착할 당시 36명의 동료 중에 그동안 병사한 사람도 많았고 막판에 분산 수용돼 연락이 닫지 못한 동료들도 많아 단지 8명이 탈출선에 올랐을 뿐이었다.

여기서 관심을 끄는 것은 8명이 소형 어선을 타고 여수를 탈출해 도착한 일본의 지역이다. 하멜 일행의 탈출선은 여수의 한 지역을 떠난지 이틀만에 일본 규슈지역의 오도(五島)열도에 도착한다. 물론 바람과 물결에 의지해 떠내려 간 뱃길이었다.

오도열도는 1627년부터 1888년까지 261년 동안 일어난 조선인들의 대일 표류 사건 1017건 중에서 70% 이상이 집중된 지역이다. 우리나라 남해안에서 태풍을 만나 선박이 표류하면 대부분 오도열도로 밀려갔다.

태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해 우리나라에서 13년 동안 억류생활을 했던 하멜 일행이 다름 아닌 우리 조상들이 가장 많이 태풍에 밀려갔던 항로를 따라 탈출에 성공했던 것이다. 하멜 일행이 우리나라에 표착한 것도 바람과 해류의 영향이었고, 결국 이들의 탈출이 가능했던 것도 바람과 해류의 덕분이었던 셈이다.

우리나라가 서양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강진 병영에서 억류생활을 하던 핸드릭 하멜(H.Hamel) 일행이 1666년 9월 강진을 탈출해 저술한 ‘하멜표류기’ 때문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강진땅과 강진사람은 하멜 일행이 한국에서 13년 억류생활을 하면서 마지막 7년간을 마주했던 대상이었다.

하멜표류기에 강진에 대한 인상이 강하게 베어있는 것은 물론이고, 이같은 감촉들이 서양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전달됐을 것으로 보인다.

시간과 공간을 조금 건너 뛰어보자. 하멜의 ‘하멜표류기’가 1668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처음 발표된 이후 서양에서 ‘미지의 나라’ 한국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은 여전히 베일속에 가려진 나라였다.

우리나라의 쇄국정책은 하멜표류기가 발간된 후에도 두 세기에 걸친 1880년대 초까지 계속됐다. 서양인들은 여전히 우리나라에 공식적으로 한 발자욱도 들여 놓지 못했다. 한국을 연구하려는 사람들은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 전해듣는 ‘한 다리 걸쳐 듣는’ 정보가 전부였다.

하멜표류기는 한국에 대한 직접적 관찰에 토대를 두었다는 장점이 있는 가운데 한 선원이 작성한 견문기 수준을 넘지 못해 한국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는 여러 가지 부족함이 많았다는게 일반적인 평가였다. 그러다가 한국이 서양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반부터였다.

하멜표류기로 유럽에 처음 한국 알려져
폰 지볼트, 일본서 표류한 강진사람과 만나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파견원 폰 지볼트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고영근 명예교수는 1989년 교수시절 발표한 그의 논문 ‘폰 지볼트(Fr. von Siebold)의 한국기록 연구’에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파견원 지볼트란 사람이 7년간의 일본활동을 하면서 저술한 ‘일본’이란 책을 통해 한국이 서양에 총체적으로 소개됐으며, 지볼트는 당시 전남 강진에서 일본으로 표류한 강진사람들의 말을 듣고 언어, 민속적인 판단 자료를 얻었다”고 밝히고 있다.

바람에 떠밀려가 일본에 표착한 강진사람들이 독일 의학자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사실은 이렇게 역사 앞에 등장했다.

지볼트는 독일의 의학자이자 자연과학자였으며, 네덜란드 국왕 시의(侍醫 : 왕족의 진료를 맡은 의사)의 추천으로 1823년부터 1830년 사이에 네덜란드가 교역하고 있었던 일본의 나가사키현(長崎) 데지마(出島 : 나가사키 남쪽에 있는 작은 인공섬)에서 활동하며 일본에 서양의술을 보급하고 있었다.

부산과 가장 가까운 지역이었던 나가사키에는 일본의 서남부 각 지역으로 표류해 온 한국인들을 수용하는 시설이 있었는데, 지볼트는 평소에 “이들을 관찰할 수 있는” 정도의 기회만 갖고 있었다. 일본정부가 한국인들과의 접촉을 제한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지볼트는 1828년 3월 17일 ‘그들의 태도가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일련의 한국인들과 접촉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전남 강진에서 표류해 온 36명의 주민들이었다. 지볼트는 일본관리의 도움으로 이들 중 네사람과 직접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지볼트는 강진사람들과 접촉한 후 한국에 관한 서술을 종합하는 자리에서 한국인의 성격상이 이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우호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는 지볼트가 강진사람들을 직접 관찰한데서 얻어진 결론이지만 서양인들의 한국관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하멜표류기가 세상에 알려진 후 서양인들의 한국관은 반기독교적인 야만인으로 알려져 왔었다.

지볼트는 강진사람들로부터 전해들은 말과 일본에서 취합한 자료를 근거로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산업, 사회, 문화의 각 방면에 걸친 내용을 그의 저서 ‘일본’의 마지막 장에 삽입한 형태로 1932~1851년 사이에 발간했다.

당시 지볼트가 소개한 한국관련 자료는 서양에서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러시아에서는 1854년 번역본이 발간됐다. 프랑스에서는 지볼트의 저서를 근거로 1864년에 ‘한국어 문법’이 나오는 등 여러 분야의 연구에서 지볼트의 한국기술이 인용되고 참고됐다.

강진에서 탈출한 하멜이 ‘하멜표류기’를 발간한 지 180여 년만에, 일본에 표류한 강진사람들이 한 독일인 학자에게 구술한 말들이 책으로 발간돼 한국을 서양에 알리는 본격적인 계기가 됐다는 것은 상당한 역사적 우연이 아닐 수 없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를 최초로 서양에 알린 하멜 일행이 마지막 7년 동안 만났던 사람들이 강진사람들이었으며, 그 후 우리나라를 서양에 구체적이고 학문적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들도 강진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게 표류라는 바다 위 돌출사건과 맥을 함께 하고 있는 것도 큰 공통점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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