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제주간 뱃길은 풍랑에 배가 뒤집히기 일쑤였다

강진 피난민들 3개월간 거문도 생활
차종채씨 피난민들에게 식량 나눠줘

완도에서 제주로 가는 뱃길에 맑은 햇볕이 바다 수면위로 쏟아지고 있다.
한참을 그러고 있을 때 멀리서 청산도를 지키는 경비선이 다가왔다. 우리 배에 태극기가 펄럭이는 것을 보고 구하러 왔던 것이다. 그날밤 다행히 인명피해 없이 배는 청산도 대서리 포구로 다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청산도에서 닻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인민군이 곧 청산도로 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다음날 바다가 잔잔해지자 피난선은 간단한 수선을 끝낸 후 다시 거문도를 향해야 했다. 피난민들은 극도의 공포에 떨기 시작했다. 어차피 청산도에 남아도 죽을 몸이어서 다른 곳으로 피난을 해야 하지만, 하루 전 생사를 넘나 들었던 곳으로 다시 간다는 생각에 말문이 막혀 있었다.

다행히 태풍은 불지 않았다. 청산도를 아침에 출발해 오후 3시경에 거문도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차종채씨 일행은 거문도가 위태로울 경우 제주도로 들어갈 계획이었다.

거문도는 피난민들로 인산인해였다. 거문도는 육지와 멀리 있고 뱃길이 험하기로 이름난 곳이어서 피난민들이 가장 안전하게 생각하는 곳이었다. 그중에는 차종채씨 일행처럼 곡식을 가득 싣고 들어오는 사람도 있었지만, 몸만 달랑 가지고 도망 온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차종채씨는 그 사람들에게 약간의 식량을 나누어 주었다. ‘강진의 피난민’들은 거문도에서 3개월 피난생활을 한 후 강진으로 돌아왔다. 차종채씨는 강진으로 되돌아와서 정옹 덕분에 생명을 건졌다며 각별한 애정을 보여주었다.

정옹은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1952년 말에 군대를 갔다. 3년 근무를 마치고 나오면서 배를 다시는 타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제대 후에 집에 있다는 소문이 났는지 여기저기서 배를 타러 오라고 사람을 보내왔다. 제대 후 집에 있으려니 바다가 그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마음은 이미 배를 타고 부산, 제주를 오가고 있었다.

정옹은 다시 배를 탔다. 유재희씨 배였다. 그리고 45세 때까지 이배 저배에서 사공 노릇을 하다가 배에서 내려왔다.

칠량 봉황에서 제주간 뱃길로 거래
풍랑만나면 일본까지 표류하기도

1980년 초 어느날 칠량 봉황마을에 관속에 넣은 시신 한구가 자동차에 실려 도착했다. 일본에서 비행기로 운구돼 부산 김해공항에 도착한 관을 봉황마을 유가족들이 찾아 온 것이었다. 관은 일본측에서 최고급으로 꾸며 놔서 깨끗하고 말끔했다.

그런데 마을에서 관 뚜껑을 열어 본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당초 이 마을 이수성(당시 52)씨의 시신이 온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관을 열어보니 이 마을 김박순(당시 51)씨의 시신이었다.

청산도 주민들이 그물을 끌어올리고 있다.
우리 정부와 일본정부간 연락과정에서 김박순씨의 시신이 이수성씨의 시신으로 잘못 통보됐던 것이다. 유족들도 마을사람들도 모두 대성통곡을 했다. 이들은 제주에서 옹기를 팔고 봉황마을로 돌아오다가 중간에 태풍을 만나 일본쪽으로 표류한 사람들이었다.

선주였던 이수성씨를 비롯해 김박순씨, 신길남(당시 52세)씨 등 3명이 돛배에 옹기를 가득 싣고 제주도로 향한 것은 1979년 10월 중순이었다. 가던 길은 좋았다. 배는 무사히 제주에 도착해 평소처럼 두 달여에 걸쳐 옹기를 모두 팔았다.

그러나 오는 길이 문제였다. 바람이 좋은 날을 택해 제주에서 출발했으나 제주와 추자도 사이에서 갑자기 태풍을 만났다. 사고 당일 완도 청산도에서 부부가 배를 타고 봉황마을로 돌아오던 길이었다는 고태랑(2006년 현재 68세·봉황마을 주민)씨는 지금도 당시 기억이 생생하다.

“마을 선착장에 막 도착하는데 갑자기 남쪽에서 시커먼 먹구름이 다가오고 천둥 번개와 함께 비바람이 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으로 직감했다”

당시 고씨의 배가 청산도에서 봉황마을로 오고 있을 때 이수성씨의 배는 제주에서 청산도를 향해 망망대해를 건너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수성씨의 배는 그뒤로 봉황마을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한달 후인 12월 어느날. 일본정부로부터 우리 정부를 통해 봉황마을로 연락이 왔다. 규슈지방의 한 어촌에 옹기배가 난파했는데 배안에는 시신 한 구가 실려 있다는 것이다. 이수성씨의 배가 태풍에 난파해 일본 규슈지방으로 표류한 것이었다.

세 사람 중에 두 사람은 풍랑속에 어디론가 실종되어 버리고 한  구의 시신만 배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시신은 그후로 발견되지 않았다.

일본정부는 훗날 유족들이 원하면 난파선도 보내주겠다는 의향을 밝혀왔지만 주민들은 고개를 저었다. 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배를 가져올 생각도 없었고, 그 안의 옹기도 보기 싫었다. 지금은 사진속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있는 옹기실은 풍선의 전설은 그렇게 비통한 역사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뱃길을 버리지 않았다. 이웃사람을 삼켜버린 바다였지만 봉황사람들은 다시 돛배에 옹기를 싣고 바다로 나갔다. 칠량 봉황~제주간 옹기뱃길은 이후에도 계속돼 80년대 중반까지 유지됐다.

지금은 육로가 운송수단의 대부분을 점령했지만 예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닷길을 이용했다. 삼국시대부터 중국이나 일본으로 교역하는 나라가 있었는가 하면, 동시대에 멀리 아라비아상인들이 배를 타고 신라나 고구려와 상거래를 했다는 기록들이 많이 존재한다.

이후 통일신라시대들어 완도를 중심으로 한 장보고의 활약상이나, 조선시대 때 이순신장군이 왜구와의 해전에서 대대적인 승리를 거둔 것도 모두 항해술 덕분이다. 넓은 바다를 무대로 한 항해기술이 번성했다는 것은 연안항해에서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항해술이 있었다는 뜻이다.

남해안지역 사람들은 뱃길이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였다. 육지와 섬을 오고가는 길에서부터, 섬과 섬을 연결하는 해로(海路), 육지에서 배를 타고 다른 육지로 오가는 길까지 섬사람이든 육지사람이든 뱃길에 의지해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뱃길은 편한 길이 아니었다. 순풍에 돛을 달면 무사히 목적지에 도달했지만 순풍에 돛을 달아도 중간에 돌풍을 만나면 배가 침몰하거나 망망대해로 밀려가기 일쑤였다.

망망대해라는 게 저 건너 바다가 아니다. 보이는 것이라곤 하늘밖에 없는 바다 위를 며칠 씩 밀려 다녔다. 그러다가 어느 이름모를 섬에 도착하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바다 한 가운데에서 배가 뒤짚혀 고기밥이 된 사람들이 부지기수이고, 무사히 육지에 도착해도 해적이나 도적을 만나면 무참히 살해된 경우도 있었다.

60, 70년대 옹기배를 타고 남해안 일대를 두루 섭렵했던 칠량 봉황마을 신일봉옹은 “옹기배를 타고 다니다 보면 바다에 떠다니는 송장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대부분 해난사고를 당해 죽은 사람들이었다. 그럴 경우 뱃사람들은 송장을 반드시 거두어서 가까운 육지로 가서 묻어주곤 했다”고 말했다. 1770년, 과거를 보러가기 위해 제주에서 강진 남포를 향해 항해하다가 태풍을 만나 일행 29명과 일본쪽으로 표류했던 장한철이 남긴 기록을 보자.

‘큰 물결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구치고, 회오리바람은 바다를 체질하듯 들까불어 댄다. 뱃사람들은 모두 울부짖으며 죽음을 기다릴 지경이다. 속장(束裝)을 하는 사람들이 늘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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