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포는 완도 남창과 넙도를 거쳐 추자도와 활발히 교류했다

옹기에 저장된 추자멸젓 뱃길 이용 거래돼
항해도중 풍랑만나 위험한 고비 넘기기 일쑤

추자도와 남포를 오가는 뱃길은 넙도를 지나 완도 남창을 거쳐가는 길이 주로 사용됐다. 추자도에서 넙도로 오가는 길목에는 자주 폭풍이 불어 위험한 순간도 많았다. 사진은 완도군 소안도 건너편에 있는 넙도의 모습.
제주와 완도 사이의 해역에서 그런 돌풍에 얼마나 많은 배들이 희생 됐을까. 바다는 아무일이 없었다는 듯 조용히 일렁거리고 있었다. 동서로 이어지는 보길도와 추자도 사이의 항로는 부산~목포, 부산~인천 등을 잇는 최단거리 지점이다.

또 소안도와 보길도를 지나 진도 앞 병풍도를 거쳐 흑산도로 빠져나가면 곧바로 중국 대련과 하루 24시간 수백척의 상선들이 통과하는 곳이다. 완도에서 3시간 동안 배를 타고 항해한 끝에 추자도에 도착했다. 그리웠던 섬이다. 이 섬에서 나오는 멸젓은 왜 그리 맛이 있었길래 망망대해 건너와 강진사람들을 사로잡았을까.

당시 강진의 남포를 오갔던 왕년의 상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섬은 생각보다 작았다. 추자항이 있는 하추자도에서 야산을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면 상추자도에 도착했다. 추자도사람들은 격랑의 추자바다를 휘저은 노련한 항해술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 먼 곳으로 멸젓을 팔러 다니고 생필품을 구하러 항해하는 일이 그렇게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추자도의 주 거래처였던 강진읍 남포마을에 가면 추자도로 시집간 사람, 추자도에서 강진으로 시집 온 사람 등이 얽혀 살고 있다.

남포마을로 가보자. 남포마을에는 지금도 10여 가구가 멸젓장수를 하고 있다. 70년대 초반까지 추자도에서 마을 앞까지 풍선이 들어올 때는 추자도에서 생멸이나 담근 멸젓이 들어왔으나 지금은 경남 남해와 충무 등에서 음력 6~7월이면 생멸을 사온다. 남포와 추자도의 멸젓 거래는 정확한 시점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됐다.

남포마을에서 멸젓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두 부류가 있었다. 9~10월에 추자도에서 배가 들어오면 포구에서 생멸을 구입해서 시장으로 팔러다니는 사람들이 있었고, 대규모로 하는 사람들은 추자도로 아예 들어가 그곳에서 생멸을 구입해 멸젓을 담궜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 젓갈이 숙성되고 육지에서 소비할 시기가 되면 추자도에서 배를 대절해 직접 남포까지 가져왔다.

남포에서 추자도를 들어갈 때는 목포로 가서 배를 탔다. 강진에서 영암 용당까지 3시간이 걸렸고, 용당에서 출발하는 철선은 20여 분이면 건너편 목포항까지 사람들을 건네다 주었다. 목포에서 배를 타고 가야호나 안성호를 타고 추자도까지 가면 7시간 정도가 소요됐다.

추자도의 한 주민이 조기를 자연풍에 건조시키고 있다.
멸젓을 담그러 가는 길은 돈길이었다. 충분한 현금을 준비해서 섬으로 들어가야 했다. 집에서 출발할 때는 항상 전대를 짱짱하니 허리에 감아야 안심했다.

추자멸젓은 물속에서 똥을 싼다고 한다. 멸이 한참 설칠 때 추자도에서 물속을 들여다 보면 멸치가 싸놓은 똥들이 붉으스럼하게 이리저리 돌아다닌다고 한다. 물속에서 똥을 싸버리고 새 수초를 먹기 때문에 막잡아 올린 멸치를 젓동우에 담그면 말그대로 맞좋은 추자멸젓이 된다는 것이다. 파시 때가 되면 추자도는 멸젓을 잡아 들어오는 배, 멸을 사러온 사람들, 멸을 팔러 육지로 나가는 배들로 장관을 이뤘다. 

남포주민들이 주로 거래한 곳은 상추자도의 대서리와 영흥리였다. 그곳에 도착하면 먼저 현지 거간꾼과 함께 물건을 고르러 다녔다. 멸치를 잡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찾았다. 멸젓을 고르고 돈을 치르면 그 다음은 현지의 사람들이 알아서 일을 진행시켜 주었다. 현지사람들의 품값도 따로 지출했다.

거래가 결정되면 미리 준비된 젓갈 옹기에 멸을 담는 과정이 시작됐다. 옹기는 모두 해남에서 들어온 것이었다. 젓동우(생멸을 담근 옹기)가 보통 800~1천개에 달했다.

옹기에 담근 멸젓은 현지에 저장해 놓아두다가 8월 추석대목이 가까워지면 육지로 가지고 나왔다. 이동수단은 물론 돛배였다. 큰 돛배에 1천여 개의 젓동우가 모두 들어갔다. 젓동우를 돛배에 넣는 기술은 전문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어서 현지에서 이 일을 해주는 사람들이 따로 있었다.

쌀이 귀했던 제주도, 강진이 중간상인 역할
백금포에 대규모 상선 드나들며 상업 발달

풍선을 타고 남포까지 오는 뱃길은 추자도에서 넙도를 지나 완도 남창을 거쳐 남포로 들어왔다. 남포와 추자도 뱃길은 보통 이 항로가 이용됐다. 오는 시간은 보통 8~10시간이 걸렸다. 풍선은 젓동우를 싣고 다니기에 안성마춤이었다. 진동이 없었기 때문에 바람만 적당히 불어주면 1천여 개의 젓동우가 하나도 실패없이 남포항에 당도했다.

주민들은 배를 타고 오면서 위험한 고비를 많이 넘겼다. 한번은 상추자도를 출발해 넙도로 넘어오는데 갑자기 하늘이 변하고 큰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두어 시간을 휘청거리면서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짐칸에 짱짱하게 가두어 놓았던 젓동우들이 깨지기 시작했다.

꽉 쟁여놓은 젓동우가 한 번 깨지기 시작하면 공간이 생기면서 주변 젓동우가 연쇄적으로 박살이 났다. 바람은 더욱 강해지고 배는 더욱 휘청거렸다. 그때 사람들은 입고 있던 무명저고리의 옷고름을 배에 묶었다. 배가 뒤집히면 송장이 배 주변에서 발견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몇 시간 동안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다행히 배는 넙도에 도착했다. 젓동우는 대부분 박살나거나 업질러져 이미 쓸모가 없었다.

제주도는 곡물이 귀한 곳이었다. 제주에서 생산되는 미곡량으로는 절대적으로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미곡을 대부분 육지에서 들어온 사상(私商)들로부터 공급받았다. 강진은 제주도로 들어가는 길목이자 쌀이 많이 생산되는 지역으로서 일찍부터 미곡 중계상들이 자리를 잡은 곳이다. 일제 말기인 1940년대 초반의 일이다.

당시 군동 백금포는 강진의 각종 산물이 전국으로 퍼져나가는 출발점이었다. 주변 해남이나 장흥, 보성 등에도 백금포만한 벼 집산지가 없었다. 강진읍 남포가 오래전부터 주로 어선들이 모여드는 중심 포구였다면 백금포는 일제시대부터 주로 상선과 같은 대규모 상업거래를 하는 배가 드나드는 포구로 발전했다.

당시에 백금포에는 창고가 100여 개가 넘었고, 50톤급 대형 풍선과 기계선(통통배) 40여 척이 들락거렸다. 정상렬옹이 10대 후반에 본 백금포의 모습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려 온 풍경이었다.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강진은 전혀 다른 상업환경을 맞이하게 된다. 일제하에서 전통적인 갑부들은 재산증식 기회가 더욱 늘어났다. 강진의 갑부 김충식의 경우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논을 전통적인 지주경영방식으로 운영해 오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된 이후 (주)호남은행(1920년), 강진창고금융(1925년), 전남도시제사(주), 소화전기, 동은농장(1929년), (주)조선거래소, 금익증권(1940년) 등 다양한 업종에 진출하며 1940년대 들어서는 화신백화점의 박흥식, 광산왕 최창학과 함께 조선의 3대 갑부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또 일본인들이 이주해 들어오면서 1920년대 초반에는 강진에만 일본인이 972명이나 살았으며, 1930년대 들어서는 50정보 이상 대지주가 5명이나 되는 등 일본인의 농지소유도 급격히 증가했다.

당시에 논 면적이 갑자기 늘어난 상황이 아니었고 결국 있는 땅이 소유자만 바뀌는 형태였기 때문에 일본인들의 농지소유 증가는 결국 한국인들의 토지소유 감소를 의미했다. 김충식씨의 경우 1930년대 땅 소유 규모가 1천215정보까지 늘어났다.

142정보를 가지고 있던 일본인‘翊田辛次郞’이란 사람은 논농장을 경영하면서 정미업을 함께 운영해 일본측 문헌에는 강진쌀의 성과를 드높힌 사람이며 강진을 개척한 선구자로 평가 받았다. 이같은 지주들의 화려한 변신과 일본인들의 토지잠식 뒤에는 서민들의 고통이 뒷따랐다. 박기환 씨의 회고록에는 당시 상황이 잘 서술돼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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