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기다렸다… 북풍이 불면 배를 띄웠다

옹기배는 큰 재산, 배 한척이 논 30마지기 가격
장보고 선단 조선술 이어받았던 큰 기술로 제작

칠량 봉황 옹기배가 남해안 지역으로 출항하면서 완도항에 들러 생필품을 사서 다시 배를 띠우고 있다.<사진=경향신문>
옹기배는 다른 배와는 달랐다. 고깃배가 바다를 빠르게 헤쳐나가기 위해 날씬하고 긴 모양을 하고 있는 반면 옹기배는 많은 옹기를 실어야 했기 때문에 모양도 길었고 폭이 넓었다. 장시간 항해를 해야했기 때문에 배안에 침실과 부엌이 모두 갖춰진 전천후 풍선이었다.

옹기배는 크게 2~3가지 정도가 있었다. 가장 큰 배가 15톤 정도로 길이가 13m정도였다. 조금 작은 배는 10톤 정도로 길이가 10m가 되지 못했다. 풍선은 크기에 상관없이 돛이 3개였다. 15톤 정도의 배는 큰 돛의 길이가 9m에 달했다. 제일 앞쪽에 있는 돛이 제일 작았고, 제일 뒤쪽의 돛이 가장 길었다.

그래야 뒷바람이 배를 밀면 앞쪽 이물이 약간 들리면서 배가 잘 나갔다. 봉황마을 신일봉옹은 1958년도에 15톤짜리 중고 돛배를 여수에서 사왔다. 당시에 봉황마을에서 가장 큰 배였다. ‘영력호’라는 배였는데 소금장수들이 소금을 실어나르던 배였다. 마침 배의 구조가 옹기를 싣기에 딱 좋아서 배 가격을 깍지도 않고 현금을 건네줬다. 배의 가격은 16만2천500원. 당시에 논 30마지기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15톤이면 옹기 두가마씩을 실을 수 있었다. 도매가격으로 치면 12만원어치였다. 12만원어치를 15톤 배에 가득 싣고 부산, 마산, 진해 등을 샅샅히 훑고 다녔다. 보름이면 배는 빈배가 됐다. 그러나 호주머니에는 현금이 가득쌓였다. 12만원어치 옹기를 가져다 팔면 40만원까지 벌 수 있었다. 자그마치 세배 장사였다.

얼마되지 않아 마을사람들은 신일봉옹을 벼락부자가 됐다고 부러워했다. 이렇게 중고배를 사면 여수나 목포에서 사왔고, 배를 새로 만들때에는 봉황마을에서 직접 만들기도 했다. 봉황마을 고태랑씨는 60여 년 전인 15세 때부터 옹기배를 만들었다. 부친 고봉수씨(작고)로부터 옹기배 제작기술을 배웠다. 부친은 칠량 구로마을의 한 목수로부터 옹기배 제작 기술을 전수받았다고 전해들었다.

이렇게 볼 때 강진에서는 오래전부터 옹기배를 제작하는 기술이 전해오고 있었다고 봐도 될 듯싶다. 옹기배는 다른 지역에서 소비가 많지 않았고 우리나라 서남해안에서는 강진에서만 필요했기 때문에 강진에 자체적인 조선 건조술이 대대로 내려왔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정도의 추정에 이르러서는 통일신라시대까지 완도(당시에는 완도와 칠량은 같은 강진이었다)를 근거로 중국과 일본해상을 오가며 무역선을 띄웠던 장보고 선단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19세기에 우리나라 서남해안 뱃길을 샅샅히 파고들었던 봉황의 옹기배가 장보고 선단의 항해술과 조선술을 이어받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배의 가격은 아마도 배의 크기와 건조시기에 따라 다양한 차이가 있었다. 50년대 중반 16만원이면 구입했던 15톤 규모의 배는 60년대 중반 50만원 정도에 거래됐다. 풍선을 만든 경험이 있는 고태랑씨는 60년대 중반에 새로 배를 만들면 15~20t을 기준으로 150만~200만원까지 받았다고 했다. 지금 시세로 하면 4천~5천만원 정도다.

고씨의 설명을 들으며 옹기배 위로 올라가 보자. 15t 정도의 옹기배는 길이가 20m(50~60자)에 달했다. 이 정도면 배의 넒이는 8~9m가 됐다. 길이에 비례해 폭이 충분히 확보된 배였다. 옹기배는 크게 3개 부위로 나뉘었다. 제일 앞쪽에 투시라고 불리는 공간이 있었다.

투시는 밥을 하는 일종의 부엌이면서 식당이었다. 중간 부분이 짐칸이었다. 배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는 공간으로 옹기를 싣는 곳이다. 제일 뒤쪽은 막간이라고 불렀다. 노를 젓거나 닻을 조정하는 공간이다. 선원들이 잠을 자는 침실은 이곳 막간에 있었다.

배를 만드는 나무는 삼나무와 소나무였다. 이 나무들은 주로 부산이나 여수에서 구입하여 배를 이용해 봉황마을까지 운송한 다음 목수들이 손질을 했다.

배의 제일 아래쪽과 바깥쪽은 삼나무가 들어갔다. 바닥부분에 들어가는 삼나무의 두께는 20㎝에 달했다. 파도에 견뎌내려면 풍선의 바닥이 강해야 했기 때문이다. 삼나무는 가볍고 습기에 강하기 때문에 원시적인 떼배에도 삼나무가 사용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단 외부 모양이 만들어지면 안쪽은 소나무가 들어갔다. 배의 바깥부분에 들어가는 삼나무는 스물다섯개의 대형 판자가 들어가고 나머지 안쪽에 대는 소나무는 소형트럭으로 3~4대 분량에 해당하는 이런저런 크기의 판자와 통나무가 들어갔다. 여기에 사용하는 공구가 150여 가지가 넘었다.

배의 모양이 잡히면 바닥에서 상단까지의 길이(선삼)의 높이가 2m에 달했다. 여기에서 지붕처럼 부자리라는 것을 씌우면 옹기를 싣는 짐칸의 천정 높이가 2m50㎝ 가까이 올라갔다. 20m짜리 풍선을 기준으로 했을 때 짐칸의 길이는 13m, 짐칸의 넓이는 5m였다, 이 크기에 천정의 높이가 3m가 가까웠으니 얼마나 많은 옹기를 실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배의 상단에는 타락이라고 해서 상단을 바깥쪽으로 비스듬하게 넓히는 장치가 설치됐다. 이렇게 하면 부자리 위에 옹기를 실을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졌다.   

배가 완성되면 좌우를 고정시키기 위해 멍애란 장치를 4개 설치했다. 제일 앞쪽 멍애는 닻멍애, 중간은 이물멍애, 그다음을 허리멍애, 제일 뒤쪽은 끝멍애라 불렀다.  멍애가 설치되면 돛대가 3개 세워졌다. 제일 앞쪽은 나아가리 돛, 중간 돛대는 이물돛, 제일 뒤쪽은 허리돛이라고 불렀다.

배의 바닥과 멍애에 이중으로 돛대를 고정시키면 돛대는 어떤 바람에도 끄떡없는 강도를 자랑했다. 돛대는 중간 돛이 가장 높았고 앞뒤로 그보다 적은 돛이 세워졌다. 가운데 돛의 크기는 배의 길이와 똑같았다. 배는 광목으로 된 돛을 설치하면 언제라도 바다로 나갈 수 있는 풍선으로 태어났다. 배가 완성되기까지는 3~4명의 목수들이 동시에 일을 하면 3~4개월 정도가 소요됐다.  

이렇게 완성된 배는 수명이 40~50년은 됐다. 돛은 시속 30~40㎞의 바람에도 끄떡 없었고, 파도는 2~3m까지 견뎌낼 수 있었다. 태풍만 피해 다니면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구조물 중의 하나였다. 부친으로부터 조선술을 전수받은 고태랑씨는 70년대 중반까지 유명한 목수였다. 예전에는 목수가 두 종류가 있었다. 집을 짓는 집목수가 있고, 배를 만드는 배목수가 있었다. 지금은 집목수는 한옥을 지으며 인기를 유지하고 있지만, 배목수는 FRP선의 등장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두 종류의 목수를 비교하는 간단한 말이 있다. 집목수는 집만 지을 수 있고 배를 만들지 못하지만 배목수는 배도 만들고 집도 지을 수 있었다. 배목수의 나무 다루는 실력이 월등하다는 뜻이다. 노동의 강도도 배목수가 몇 배는 강했다. 집목수는 그늘에서도 작업을 하지만 배목수의 일터는 바닷가였다. 바닷가 공터에서 나무를 다듬고 배를 만들었다.

그래서 집목수의 하루 품삯이 1만5천 원이라면 배 목수는 2만5천 원을 받았다. 배목수의 기술을 그만큼 높이 샀던 것이다. 배목수들 중에 고태랑씨는 유명했다. 부산과 제주 선주들 사이에서 고목수가 만든 배가 가장 튼실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고목수의 얼굴을 몰라도 고목수가 만든 배는 알아본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 또한 강진의 풍선 제조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다. 고목수가 만든 배는 지금 바다에 없지만 70년대 초반 찍었던 사진이 강진수협 강진읍 사무실에 걸려 있다.

제주가는 배는 완도읍 들러 생필품사고 청산도로
청산도에서 바람 기다리며 배띠울 시간 기다려

예전에 칠량 봉황마을의 옹기배들이 쉬어갔던 청산항에 고깃배들이 많이 정박해 있다.
옹기배는 주로 아침시간에 출발했다. 출항은 일상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행사는 없었다. 풍선의 가장 큰 장점은 배가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디젤엔진처럼 소란스럽게 하지도 않았고, 기계가 돌아가면서 배가 떨리지도 않았다. 팽팽하게 바람을 받은 돛이 소리없이 배를 남쪽으로 밀고 갔다.
 
이 때문에 큰 풍랑만 만나지 않으면 항해도중 옹기가 깨지는 일이 거의 없었다. 봉황포구를 빠져나온 풍선은 북풍을 타고 곧장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가우도를 지나 내려가기 시작했다. 봉황마을에서 바라볼 때 배는 가우도의 왼쪽을 통과해 나아갔다. 배가 사초 앞바다를 지나고 완도해역인 고마도와 사후도를 지나면 장도가 코 앞에 들어왔다.

선원들은 이 지점으로 들어서면 날씨를 보아가면서 몇 가지 결정을 해야했다. 봉황마을에서는 멀쩡하던 바다가 완도 장도를 지나 넓은 곳으로 접어들면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바람이 불순하면 완도항으로 들어가 피항을 했다가 다시 뱃길로 들어서야 했고, 바람이 견딜만 하면 곧바로 청산도까지 내려갈 수가 있었다. 봉황에서 완도부둣가까지는 3~4시간이 걸렸다.

바람이 좋더라도 완도부둣가에 들르는 배는 많았다. 완도는 제주도를 오가며 사용하는 잡다한 생활용품을 구입하는 장소였다. 약간의 술과 담배, 고기류를 완도에서 구입해 배를 띄웠다.

완도에서 잠시 쉰 배들은 청산도로 향했다. 완도항~청산도까지는 1시간 30분정도가 소요됐다. 봉황에서 출발한 모든 배들은 일단 청산도로 들어갔다. 청산도는 제주도뱃길로 접어드는 길목에 있는 마지막 큰 섬이었다. 풍선들은 청산도 도청리 선착장에 배를 대고 좋은 바람을 기다리거나 봉황마을에서 뒤늦게 출발해 뒤따라오는 배를 기다렸다. 2~3척이 함께 출발해서 제주도로 가기 위해서였다.

봉황마을 선원들의 말에 따르면 선원들은 청산도에서 북풍이나 북동풍이 불기를 기다렸다. 북풍이 제대로 불면 청산도에서 제주도까지는 8시간이면 당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람은 선원들의 뜻대로 불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렇게되면 청산도에서 좋은 바람이 불 때까지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3~4일 동안 청산도에서 대기하는 것은 다반사였고, 보름이 넘게 청산도에서 발목이 잡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청산도에서 바람을 기다리는 시작은 무료했다. 선원들은 낮에는 인근 선창가에서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하고, 배에 앉아 종종 찾아오는 옹기손님을 맞기도 했다. 당시 도청리는 대단히 큰 선창이어서 크고 작은 선술집들이 30여 곳이 넘었다.

선원들은 낮에는 섬을 구경하다가 밤이되면 다시 배로 돌아와 밥을 해먹고 배안에서 잠을 자곤 했다. 먹고자는 모든 것을 배안에서 해결했기 때문에 다른 체류비는 거의 들지 않았다. 청산도 사람들은 뱃길을 떠나지 못하고 발이 묶여 있는 강진사람들을 늘 안스럽게 생각했다. 정박해 있는 동안 현지주민과 선원들이 말다툼 한번 하지 않았다고 생존자들은 증언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바람이 불어왔다. 배가 떠나기 좋은 날이었다. 선원들은 아침을 먹고 서둘러 돛을 올렸다. 배가 서서히 선창을 빠져나갔다. 날씨가 좋으면 청산도에서도 한라산이 손에 잡힐 듯했다. 바람도 좋았고, 선원들의 마음도 하늘을 날 것 같았다. 도청항에서 출발해 2시간30분~3시간 정도를 가면 청산면에 속해있는 여호섬을 지났다. 이곳에서 다시 4~5시간을 가면 제주의 어느 항에 도착해서 옹기를 팔기 시작하면 됐다.

서순선씨는 사공들이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하늘을 보았다고 했다. 한참을 하늘을 주시하던 사공은 조용히 말했다. “오늘은 일 나가지 말세”하면 그날은 십중팔구 날씨가 좋지 않았다. 서씨는 “사공들이 날씨를 삼일은 내다봤다”고 했다.  

그러나 바닷일은 아무도 몰랐다. 날이 아무리 청명하고 바람이 적당히 불다가도 바다는 언제 돌변할 지 몰랐다. 봉황마을 김우식(83)씨는 50대 초반의 나이였던 70년도 초에 청산도에서 날씨만 믿고 출발했다가 죽을 고비를 겪었다. 늦가을이었다. 그날 날씨는 맑았다. 북쪽에서 바람이 불어와 돛을 남쪽으로 팽팽하게 밀었다. 적당히 방향을 잡아주면 배는 소리없이 제주로 향할 터였다. 배 세척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출발한 시간은 아침 8시께였다.

여호섬을 지나 한참을 내려가는데 맑은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위험을 직감한 김옹은 청산도로 되돌아가거나 우측의 소안도로 피항하려고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었다. 뒤따라 오던 배 두척은 먹구름을 피해 소안도로 들어가고 있었다.

김옹의 배는 제주쪽으로 내달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비바람이 몰아치고 파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배가 일순간 춤을 추기 시작했다. 바람이 강해지면서 앞뒤의 돛을 내렸으나 파도는 4~5m까지 높아지기 시작했다. 당시 제일 컸던 20t 정도의 배였지만 견딜 수 있는 파도는 2~3m가 전부였다. 선상으로 파도가 쳐들어오기 시작했다. 옹기가 바람과 파도에 휩쓸려 바다로 날라갔다.

함께 탔던 조동무들은 아침에 먹은 음식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배위의 항아리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서로 부딛쳐 깨지고, 그러다 파편들이 바다로 떨어졌다. 파도는 점점 사나워졌다. 언제 배가 파도에 휩쓸릴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돛은 완전히 기능을 상실해 버렸다. 배가 파도를 따라 밀려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밀리면 배가 뒤집힐 수도 있고, 일본쪽으로 떠내려가 좌초할 수도 있었다.

조동무들의 얼굴이 샛노래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30대 초반의 젊은이들로 배를 탄 지 얼마되지 않았었다. 그들은 배 한켠을 붙잡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김옹은 지금도 조동무가 울며 “어머니”를 외쳐대던 목소리가 귀에 선하다. 사공이었던 김옹은 동요해서는 안되는 위치였다. 김옹이 흔들리면 조동무들은 이제 완전히 생명을 포기할 지경이었다. 김옹은 조동무들을 끝까지 다독거렸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모두 지쳐 쓰러져 있는데 바람이 수그러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남쪽을 바라보자 한라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배가 파도에 밀려 제주도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사람은 부둥켜 안고 다시 엉엉 울었다. 제주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5시께. 오후 두시면 도착할 시간이 4시간을 더 바다에서 표류한 것이었다.

이런 경우 뱃사람들은 천운이라고 했다. 그 정도의 바람에 그 정도의 파도였다면 옹기배는 파도가 삼켜버리거나 먼바다로 떠내려가야 맞았다. 김옹의 배는 다행히도 제주쪽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6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칠량~제주를 오간 옹기배가 30척이 넘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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