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일보
기획특집심층취재
강진과 바다, 고대항로를 다시본다 <10> 영원한 바닷길 강진~제주도천개가 넘은 옹기가 햇볕을 받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주희춘 기자  |  ju@nsori.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6.07.14  13:28:34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네이버밴드

마을 공터가 주로 생옹기 건조장
마을 곳곳이 건조장 아닌 곳 없어

   
70년대 중반 칠량 봉황마을에서 주민들이 옹기를 만들고 있는 모습이다.
도공의 손을 거쳐 모양이 막 잡힌 옹기를 ‘생옹기’라고 불렀다. 생옹기가 나오면 다음 단계로 건조 작업이 필요했다. 건조과정은 옹기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단계 중의 하나였다. 건조가 잘못된 옹기는 가마속에서 영락없이 모양이 뒤틀리거나 깨지곤 했다. 

건조장은 주로 마을 공터였다.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반을 전후해서는 봉황마을 이곳저곳이 건조장이 아닌 곳이 없었다. 직사광선을 쬐면 생옹기에 금이 갔기 때문에 볏짚을 골고루 덮어주었다. 천개가 넘은 크고 작은 옹기가 햇볕을 받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가마에 옹기를 넣기 2~3일 전에 건조작업이 진행됐는데, 이때부터 선주나 동막쪽 사람들은 잠을 자지 못했다. 혹시 비라도 내리면 말 그대로 다된 밥에 재를 뿌린 격이 되기 때문이다. 밤에는 이슬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마람을 수북히 덮어 주었다.

어쩌다가 밤중에 비가 갑자기 내릴 때가 있었다. 비가 오면 온동네 사람들이 새벽에도 총출동을 했다. 널려있는 생옹기를 음지로 들이기 위해서였다. 밤중에 동네사람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은 봉황마을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었다. 봉황마을에는 그런 진풍경이 일년에 수차례씩 있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한 여름이었는데, 한 주민이 동네 공터에서 생옹기를 말리고 있었다. 동네사람들 대부분이 밖에 외출 중이었고, 이 주민은 영동마을 쪽으로 흙을 구하러 가고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영동쪽은 햇볕이 쨍쨍한데 봉황마을만 내린 국지적 소나기였다.

생옹기는 어떻게 해보지도 못하고 모두 망가져 버렸다. 이틀 후면 가마에 들어갈 생옹기가 엉망진창이 됐으니 옹기주인은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때돈 5~6만원이면 논을 여섯마지기 정도 살돈이다. 마침 옹기주인은 가난하게 살다가 어떻게 목돈을 마련해 보려고 재산을 모두 털어 옹기를 준비한 처지였다.

옹기주인의 처지를 불쌍하게 생각한 마을주민들이 뜻을 모으기로 했다. 돈을 모으는게 아니었다. 각 동막에서 옹기주인을 위해 생옹기를 갹출한 것이었다. 주민들의 갹출 덕분에 이 옹기주인은 가마에 생옹기를 어느 정도 채울 수 있었고, 몇일 후 때깔좋게 잘 익은 옹기를 받아볼 수 있었다. 

옹기 건조가 끝나면 이제 옹기를 가마에 넣는 일이 남았다. 옹기 물주나 도공이나 모두 긴장하는 시간이 된 것이다. 가마의 길이는 50여m에 달했다. 넓이는 3~4m, 높이는 2m 정도였다. 가마안에서 어른 여자가 옹기를 머리에 이고 이리저리 움직여도 부족함이 없는 공간이었다.   

옹기를 가마에 넣는데 보통 20여 명의 인부가 필요했고, 이들이 옹기를 가마에 차곡차곡 넣는 시간도 2~3일이 소요됐다. 가마에 옹기가 들어가고, 황토를 이용해 이곳저곳을 봉합하고 나면 본격적으로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3일 밤낮으로 불을 지폈다. 불은 작은 불과 큰 불이 있었다. 작은 불은 작게 때는 불이고, 큰 불은 말 그대로 불이 세차게 탈 때다. 처음에는 천천히 불을 지피다가 이틀째부터는 엄청난 화력이 가마안을 채웠다. 이때는 가마안의 온도가 1천300도까지 올라갔다.

큰 불이 시작되면 제사를 준비한다. 제사는 불을 처음 땔 때 드리지 않고, 이렇게 작은 불에서 큰 불이 시작돼 옹기가 익어갈 시기에 올렸다.

   
80년대 초반까지 옹기배가 드나들던 봉황앞바다는 요즘 조용한 어촌이 됐다.
음식은 몸이 깨끗한 아주머니들이 준비했다. 명태와 돼지머리는 기본이었다. 아주머니들이 머리를 단정히 하고 밥을 해서 한밤중에 가마로 왔다. 상은 옹기가마 가운데에 마련됐다. 조용한 시간에 선주가 절을 했다. 가마에는 항상 먹거리가 준비돼 있어야 했다. 불 때는 기술자들이 밤낮으로 대기해야 하기 때문에 술과 고기가 떨어질 날이 없었다.

가마에는 옆구리에 50여 개의 구멍이 있었다. 큰 불이 시작되면 화구에서 태우는 밑불은 줄이고 이 구멍으로 직접 장작을 던져 넣어 불을 조절했다. 이때부터 불 때는 기술자가 모든 권한을 쥐고 움직였다. 옹기의 익어가는 정도를 눈으로 보아가며 나무를 적절하게 던져넣어야 했다.

넉자(한자는 30㎝) 정도의 장작을 하나하나 던져 넣으면 불구멍으로 칼날같은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불 지피는 일은 3일이면 마무리됐다. 그러나 갑자기 비라도 내리면 비상대책이 필요했다. 당시 가마는 비가림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비가 내리면 그대로 가마 위에 쏟아졌다.
 
그대로 두면 흙벽돌로 만들어진 가마에 물이 스며들었고, 그렇게 되면 가마 내부에 온도 변화가 생겨 한참 익어가는 옹기에 나쁜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주민들은 미리 가마 주변에 이엉을 준비해 두었다가 비가 내리면 마람으로 가마를 겹겹이 둘러싸 주었다.

3일 동안 불을 지폈던 가마는 다시 그 상태로 3일 동안 쉬게 된다. 내부의 온도가 자연스럽게 내려갈 동안 기다리는 것이다. 그때 불구멍으로 가마안을 들여다보면 화기가 이글거리는 모습을 환히 볼 수 있었다. 붉은 홍시같은 화기가 검붉은 옹기를 감싸며 마치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가 바닷가를 천천히 뛰어다니듯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가마에서 옹기가 익어갈 시기가 되면 선주는 배를 몰고 갈 사람을 이미 확보하고 있었다. 엄청난 자금이 투입된 일이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옹기를 현금화 해야 했기 때문이다.

또 옹기를 꺼낼 시기가 되면 가마를 사용할 다음 순번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마가 완전히 식기 전에 옹기를 넣어야 땔감이 절약되기 때문에 한 굴(한 가마)이 나오면 다른 사람이 옹기를 만들어서 가마에 넣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옹기가마는 이런식으로 끊임없이 가동됐다. 가마에 옹기를 넣으려면 몇일 전에 건조를 마쳐야 하는 일정이 오래전에 잡혀야 했고, 일정에 맞게 건조를 하려면 생옹기를 제작해야 하는 일정이 나와야 가장 정확한 시간에 최적의 건조된 옹기를 가마에 넣을 수 있었다.

한가마를 만드는 비용은 70년대 초반을 기준으로 20만원 정도가 소요됐다. 당시 논 한마지기 값은 7~8천 원 수준이었다.

우선 나무값이 4~5만 정도 들어갔다. 흙값은 2만원, 도공을 포함한 옹기 만드는 잡부들의 인건비가 5만원, 건조비가 1만원, 유약값이 5천 원, 흙을 반죽하는 비용 5천 원, 불 때는 비용 5천 원, 옹기꺼내는 비용이 5천 원 정도 들어갔다. 

봉황마을에는 일제강점기 때에 4개의 가마가 있었다. 중간에 가마가 두개로 줄었다가 70년대 중반들어 다시 4개의 가마가 옹기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70년대 중반에 마을이장을 했던 신일봉(84)옹은 당시 봉황마을 가구수가 정확히 105호였다고 했다. 마을주민은 625명이었다. 옹기제작에 관련된 사람은 400여 명이 넘었다.

마을사람들이 가마 4개를 놓고, 순번을 돌아가며 옹기를 구웠다. 연초가 되면 시기별로 일정한 순번이 정해졌고, 땔감 준비와 흙 준비, 도공, 인부 운용계획들이 어느 정도 나와 모든 과정이 톱니바퀴 처럼 질서있게 돌아갔다.

한참때는 한 가마에서 연간 ‘30~40굴’을 했다. 4개의 가마가 함께 돌아갔던 70년대 중반에는 봉황마을에서 연간 160굴을 했다. 한굴에서 평균 1천여 개의 옹기가 나왔다고 계산했을 때 한가마에서 일년 동안 4만여 개의 옹기를 생산했고, 4개의 가마에서 14만여 개를 토해냈던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큰 옹기를 새는 것이고 작은 뚜껑이나 툭시발 등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봉황마을에서 엄청난 양의 옹기가 생산됐던 것이다. 완제품으로 옹기가 나오면 도매가격으로 넘겨도 40만원을 벌 수 있었다. 무조건 배 장사였다.

현금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은 옹기 곁에 가지도 못했다. 가마채로 옹기를 사겠다고 선금을 들이대는 도매상들이 줄을 설 정도였으니 외상거래라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쉴새없이 굴이 돌아가는 동안 마을에는 쉴새없이 잔치가 열렸다. 하루에 소주 대병이 수십 병씩 소비됐고, 마을 구판장에서 팔리는 막걸리는 그 양조차 헤아리기 힘들었다. 매월 2, 6일에 장이 섰던 칠량장은 봉황사람들이 나오지 않으면 장이 되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주머니에 현금이 많았다.

강진에서는 ‘봉황부락이 돈부락’이라고 소문이 났고, 한참 장사가 잘 될 때는 옹기배의 선장격인 사공이 강진군수보다 낫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그래서 마을에서 농담으로 “너 강진군수 할래, 여그서 옹구배 사공할래”라고 물으면 “백이면 백명이 옹구배 사공할라요”했다고 한다. 그 정도로 봉황마을에 돈이 풍성했다. 

이렇게 생산된 옹기는 70년대 중반 40여 척에 이르던 옹기배에 실려 제주, 부산, 통영, 삼천포 등 우리나라 서남해안 곳곳으로 팔려나갔다. 흙벽돌을 준비하면서 기초공사를 시작했다. 우선 땅을 다섯자(150㎝) 정도 깊이로 파서 가마의 기초를 닦았다. 넓이는 4m 정도로 팠다.

30명의 인부가 달라들어 한달 정도 땅을 파서 기초공사가 완료됐다. 그 후에는 흙벽돌을 차곡차곡 쌓는 일이 진행됐다. 땅을 파서 땅속으로 들어가는 부분이 150㎝, 땅위로 올라오는 부분이 120㎝ 정도 됐다. 

기초 부위와 옆부분은 그렇게 어렵지 않게 진행됐지만, 반달모양의 지붕쪽을 만들 때는 상당한 기술이 필요했다. 지붕에 올라가는 흙벽돌은 마늘모양으로 따로 만들어서 양쪽에서 하나하나 올려 제일 꼭대기에서 서로 만나게 했다. 가마를 만드는 기간은 3개월 정도가 소요됐다. 신일봉옹은 이 일을 직접했다고 자랑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마는 적당한 비가림만 해주면 수명이 따로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사용했다. 봉황마을의 가마는 중간에 철거를 했기 때문에 사라졌지, 수명이 다해서 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제주도에 들어가는 옹기상인들은 가장 먼저 옹기를 확보해야 했다. 옹기를 제작한 사람들이 따로 있었는데 60년대 후반 봉황마을은 총 123가구가 살았는데 옹기를 만드는 집이 40곳이 넘었다. 선주들은 일종의 유통을 담당했던 셈이다.

배가 한번 출항하려면 약 500여 개의 크고 작은 옹기를 배에 실었다. 종류도 20여 가지가 넘었다. 옹기는 전국에서 인기를 독차지 하고 있던 때라 물건을 확보하려면 현금을 먼저 지불해야 했다. 1960년대 중반에 옹기를 확보하는 선수금이 자그마치 100만원을 상회했다.

당시 논 한마지기가 7천 원 정도였기 때문에 옹기를 대량 확보하기 위한 비용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직하게 한다. 선수금을 주고 옹기를 확보하면 그 다음은 옹기를 배에 싣는 일이 필요했다. 옹기배가 출발하기 전날에는 봉황 선창에 옹기가 장사진을 쳤다.

지금은 봉황마을 서쪽으로 부두가 나 있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지금의 마을회관 자리가 부두였다. 부두라고 해서 별다른 게 아니라 배가 바닷가에 정박하는 식이었다. 옹기배는 수심이 1m만 되도 움직이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마을 앞이 정박지가 되곤 했다.

큰독, 중독, 오죽독, 조쟁이항아리, 대구철한
동구꼿동, 동우, 옴막지… 이름도 수십가지

옹기의 이름도 가지가지였다. 큰독, 중독, 오죽독, 조쟁이항아리, 대구철한, 동구꼿동, 동우, 옴막지, 꼭종사구, 도롬박지, 오가리 등 지금 사람들이 들으면 다른 나라 말을 듣는 듯한 이름이 많다. 독은 큰 것이 여자 어른 키만한 것도 수두룩했다.

옹기는 기술자가 실었다. 배주인이 인부를 사서 기술자에게 붙여주었다. 그러면 인부들이 옹기를 나르고 기술자들이 배안에 옹기를 차곡차곡 적재해 갔다.

옹기를 나르는 일은 대부분 여자가 했다. 남자들은 옹기를 만들거나 팔러다니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한참 옹기가 잘 팔릴 때라 남자들이 ‘한가하게’ 옹기나 나를 틈이 없었던 것이다.

배안은 이물에 해당하는 앞쪽은 좁고 고물이라 불리는 뒤쪽은 넓었다. 좁은 데는 적은 옹기를 쌓았고, 넓은 데는 큰 옹기를 넣었다. 기술자들은 어느 장소에 어떤 옹기를 적재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우선 작은 옹기들이 배로 올려져 짐칸으로 들어갔다. 배의 바닥부분에 작은 옹기를 빽빽이 깔았다. 공간이 있으면 옹기가 깨질 확률이 그만큼 높았기 때문에 옹기를 빼꼭히 저장하는게 큰 기술이었다.

이어 조금 더 큰 항아아리가 그 위에 포개지기를 반복하면서 2m가 넘는 배 실내는 옹기로 빽빽하게 들어찼다. 배로 싣고갈 옹기의 80% 정도가 짐칸에 자리를 잡았다. 배의 위쪽 상단의 타락이란 부분에는 가장 큰 옹기들이 가지런히 자리 잡았다.

옛날 사진을 보면 대형옹기들이 가지런히 실려있는 모습을 볼수 있는데 바로 타락 위에 대형 옹기를 실어놓은 장면이다. 타락 위의 항아리들은 운항중에 파도가 많이 치면 바다로 빠지거나 파손되는 경우도 있었다. 20여 명의 인부가 붙으면 한 배를 싣는 시간이 약 세시간 정도 걸렸다.

옹기 선적이 끝나면 항해도중 필요한 물건들이 올라왔다. 식곰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배주인이 챙겼다. 쌀에서부터 나무와 솥단지, 이불, 기본 반찬 등 선원들이 제주까지 오가며 필요한 모든 물건들이 올라왔다. 순풍이 불어주면 배는 하룻만에 제주에 도착하지만 중간에 일기라도 불순하면 언제 어디서 얼마동안 피항을 해야할지 모를 일이었다.

이 때문에 배에 올리는 식량과 반찬거리는 양을 항상 넉넉히 했다. 가장 중요한 쌀은 세사람이 두달 정도 먹을 양이 실렸다. 지금으로 애기하면 80㎏짜리 한가마 정도다.

땔감도 중요했다. 나무는 50㎝정도로 잘게 썰어서 최대한 강하게 묶었다. 부피를 줄이기 위해서다. 묶여진 나무는 큰 독에 차곡차곡 넣었다. 그렇게 하면 땔감이 배에서 다른 공간을 차지하지 않았다. 항해가 시작되면 큰 독안에 든 땔감을 하나하나 빼서 사용하고 제주에 도착해서는 독을 팔면 그만이었다. 물도 옹기독에 담아 실었다. 팔러다니던 옹기가 선원들의 생필품을 저장하는 이동창고였던 셈이다.  

배에는 항상 세 사람이 탔다. 한사람은 선장역을 하는 사공이라 불렀고, 조수역인 한사람은 조동무, 배에서 밥을 하는 사람을 화장이라고 불렀다. 배위에서 사공의 권위는 막강했다. 조동무들은 사공이 죽으라하면 죽는 시늉까지 내야할 정도로 규율이 엄했다.

풍선이 바다로 나가 돌발상황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앞쪽에 두사람, 뒤쪽에 한사람의 일손이 반드시 필요했다. 닻줄을 당길 때도 앞쪽에 두사람, 뒤쪽에서 한사람이 배치돼야 했다.

한 배에 세사람이 타는 또 한가지 이유는 제주에 도착해서의 일이었다. 옹기는 배 위에서 모두 팔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리어커나 지게에 지고 마을로 돌아다녀야 했다. 그런 때면 두사람이 장사를 나가고 한사람은 배를 지켜야 했다. 그래서 제주도행은 꼭 세사람이 탑승했다.<계속>

< 저작권자 © 강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주희춘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네이버밴드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가장 많이 본 기사
1
[향우업소 소개]서울 대치동 남도한정식 보리수
2
읍 목리마을 고택이 되살아 난다
3
“드라이버 스윙 재정비로 슬럼프 벗어났죠”
4
요즘 제철 ‘갯장어’…10만원은 줘야한다?
5
“서로 추억 회고하는 소중한 시간이죠”
6
[강진인문기행]최초 신식학교의 출발
7
사과처럼 작은 ‘소형 수박’을 아시나요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 · 이메일무단수집거부
전남 강진군 강진읍 영랑로 35 강진버스여객터미널 2층 강진일보  |  대표전화 : 061)434-8788
사업자등록번호 : 415-81-43025  |  발행인 : 황민홍  |  정보관리 책임자 : 주희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주희춘
Copyright © 2011 강진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nsor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