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일보
기획특집심층취재
강진과 바다, 고대항로를 다시본다 <9>영원한 바닷길 강진~제주도거미줄 같은 남해바다에 거미줄 같은 옹기 뱃길이 열리다
주희춘 기자  |  ju@nsori.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6.07.07  11:04:18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네이버밴드

칠량 봉황마을서 배 띄우면 전국 각지로 연결
강진은 좋은 태토, 땔감, 뱃길이 연결되는 곳

   
70년대 마른 옹기를 가마에 넣고 있는 모습이다.
강진과 제주의 뱃길을 이야기하면서 옹기 뱃길을 빼놓을 수 없다. 뱃길로 가까운 사이였던 강진과 제주는 외부 그릇문화가 들어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강진에서 언제부터 옹기가 구워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문헌에는 우리나라에서 옹기가 처음 사용된 시기를 삼국시대로 본다. 빗살무늬토기와 같은 토기류들이 그릇을 만드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점점 단단하고 가벼운 도기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청자, 분청사기, 백자와 같은 새로운 도자기가 만들어 졌지만 일상생활에서 옹기는 중요한 생활그릇으로 사용되었다. 이런저런 설명을 듣다보면 생산조건적인 측면에서 강진의 옹기는 청자와 뗄 수 없는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옹기가 생산돼 온 칠량면 봉황마을은 초기 고려청자가 생산되던 칠량 삼흥리와 가까운 곳이다. 또 주변에 좋은 흙이 있고, 땔감을 구할 수 있는 울창한 산이 가깝다. 무엇보다 바닷가이다. 봉황마을에서 배를 띄우면 남해바다 물길을 따라 전국 각지로 연결된다.

강진에서 고려청자가 발전된 이유들과 거의 흡사하다. 좋은 태토와 땔감, 전국으로 운송할 수 있는 뱃길이 있었기 때문에 강진에서 좋은 청자가 많이 생산됐다는 것은 오랜 정설이다. 강진의 옹기는 청자가 생산된 동일한 조건 속에서 발전했던 것이다.

그러나 강진에서 옹기가 청자보다 이른 시기에 생산됐는지, 아니면 늦은 시기에 제작됐는지 알 수 없다. 청자의 경우 칠량과 대구에 널려있는 가마와 파편들이 역사를 말해주고 있지만 옹기는 가마가 남아 있지도 않고, 파편이 역사를 대변하지도 않는다.

칠량면 봉황마을 일대의 오래된 가마터는 철저히 파괴돼 흔적이 없다. 무엇보다 서민들이 주로 사용했던 옹기의 역사는 학계에서 그렇게 중요하게 관심을 못 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다만,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고려의 멸망 후 대구에서 생산이 중단된 것으로 알려진 청자의 맥이 과연 역사속에서 완전히 끊겼을까 하는 점이다. 강진만 주변에는 지금도 자기를 굽던 가마터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대구면과 칠량면의 바다 건너편에 있는 신전면과 도암면의 산기슭에는 청자의 후손 정도로 보이는 도기 파편들이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널려있다.

역사속에 옹기는 좋은 기록이 많지 않다. 서민들의 필수품이었을 뿐 언제 어떻게 시작됐고, 어느 지역에서 가장 많이 생산됐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다행인 것은 아직까지 신옹과 주씨 등과 같은 경험자들이 있어서 그 옛날 옹기배의 역사를 전해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봉황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봉황마을 앞바다에 정박한 풍선이 50여 척이 넘었다. 1940년대 초반의 일이다. 배도 간단한 배가 아니었다. 옹기를 팔러다니던 배는 기본적으로 돛이 3개였다. 지금 톤수로 치면 모두 10t 이상은 나가는 배들이었다. 철선 10t과 목선 10t은 크기가 완전히 다르다.

당시만 해도 봉황마을 옹기배는 제주도를 왕래하지 않고 있었다. 대신 우리나라 서쪽으로는 해남 남쪽지역, 동쪽으로는 부산 영종도 앞바다가 봉황마을 옹기배가 활보하던 곳이었다. 해남은 황산면에 옹기굽는 곳이 있었고 그 위쪽으로는 무안 몽탄과 전북 고창, 논산 등에 역시 옹기굽는 곳이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시장을 나누고 있었다.

북은 무안 몽탄, 남은 제주, 동쪽은 부산까지 활보
제주 옹기뱃길은 70년 이수성씨가 처음 열어

   
70년대 초반 어느날 봉황마을 선착장에서 옹기를 돛배에 선적하고 있다.
 <‘강진향토사’ 사진자료>
무안 몽탄에서 생산된 옹기는 주로 신안군과 진도군 일대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그러다가 이수성이란 봉황마을 주민이 추자도에 옹기를 팔러 배를 띄웠다가 풍랑을 만나 제주도로 표류하게 됐다. 그 전에는 제주도를 알고는 있었으나 바다가 무서워 함부로 배를 띄우지 못했었다.

남쪽으로는 추자도까지 옹기배가 갔으나 그곳마져 자주 가는 곳이 아니었다. 추자도 앞바다는 예부터 노도(怒濤)의 바다로 꼽혀 온 곳이다. 파도가 일렁이지 않을 때가 없고, 한번 풍랑을 잘못 만나면 영락없이 죽는다는 곳이었다.

1969~70년 이수성씨가 처음 가져간 강진옹기를 본 제주사람들의 반응이 의외로 좋았다. 뱃길도 추자도에서 그렇게 멀지 않았다. 제주도 옹기뱃길은 그렇게 열렸다. 봉황사람들은 그때부터 제주 옹기배가 여수, 부산을 비롯한 남해안 시장을 주름잡다가 제주도까지 시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이수성이란 주민은 1979년 제주에서 옹기를 팔고 강진으로 돌아오다 태풍으로 죽어 시신도 찾지 못한 사람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이수성씨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제주뱃길을 다녀오다 목숨을 잃었다며 더욱 안쓰러워했다. 강진옹기의 시장은 주로 장흥을 거쳐 완도, 고흥, 여수, 남해, 충무, 부산에 이르는 남해안지역에 형성돼 있었던 것이다.

봉황마을의 옹기제작은 제작과 판매가 뚜렷하게 구분돼 분업화가 이뤄져 있었다. 돈을 대는 물주가 있었고, 따로 옹기를 만드는 동막이 있었다. 70년대 초반을 전후해 봉황마을에는 옹기를 만드는 동막이 40여 곳에 달했다. 가마를 소유한 사람도 따로 있었다.

봉황마을에 가마가 많을 때는 4개가 있었다. 또 배를 소유한 선주가 따로 있었고, 옹기를 팔러다니는 뱃사람들이 따로 있었다. 주로 선주들이 동막에 선금을 주고 옹기를 주문했고, 동막에서는 다시 흙과 인부를 사서 정해진 날짜에 옹기를 만들어 내놓곤 했다.

가마에서 나온 옹기는 20% 정도가 주변지역에 육로를 통해 판매됐다. 나머지는 모두 배에 싣고 팔러 나갔다. 한참때 봉황마을에 돛배가 40여 척에 달했다. 

옹기를 만들려면 흙과 인부, 땔감, 가마가 필요했다. 흙은 오랫동안 봉황마을 황토를 그대로 사용했다. 마을 주변이 온통 황토여서 흙을 조달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마을의 흙이 부족하게 됐다. 1960년대 중반께부터 외부에서 흙을 조달해 와야 했다.

칠량 영동마을과 영풍리 등에서 흙을 사왔다. 그중에서 영동마을 김연희씨 집 주변 흙이 최고였다. 김연희씨 집 흙으로 만든 옹기는 모양이 잘 잡히고 가마속에서 파손되는 숫자도 적었다. 무엇보다 옹기의 때깔이 좋았다. 그 다음을 꼽으면 영풍리 김용호씨 집주변에서도 좋은 흙이 많이 나왔다.

지금의 칠량중학교 자리흙도 좋았고, 칠량 오일시장 자리도 나쁜 흙이 아니었다. 흙을 구입하는 곳이 점점 멀어져 70년대 후반들어서는 나주 산포면에서 흙을 사오기도 했다. 땔감를 준비하는 것도 큰 일이었다. 옹기를 구울 때는 3일 밤낮 불을 때야 했다. 숫자로 따지면 900~1천단의 나무가 필요했다. 옹기를 굽기위해서는 1000~1200도의 온도가 필요하다. 

여름철이면 철나무라고 해서 온 마을 사람들이 점심을 싸들고 삼흥리와 동백리 뒷산으로 ‘출퇴근’을 했다. 땔감을 할 때는 특별히 정해진 구역이 없었다. 이산저산으로 들어가 나무가 수북히 자란 곳을 차지하고 낫으로 나무를 베어놓으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벤 나무는 여름 한철 그렇게 놔두었다. 그러면 나무가 산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잘 말라갔다. 선선한 바람이 불면 나무를 묶어서 집으로 옮기는 작업이 시작됐다. 주민들에게는 나무를 하는 일보다 나무를 옮기는 작업이 더 힘들었다. 수레가 있는 집은 극소수여서 지게로 지고 오는 게 일반적인 일이었다.

60년대 중반까지는 칠량 삼흥리와 명주리에서 충분한 땔감이 나왔다. 일제강점기때에는 4㎞가 넘는 삼흥리 등에서 지게로 나무를 등에 져 날랐다. 해방 후 수레가 등장해 그나마 일손이 덜기는 했다. 그러나 삼흥리와 명주리일대 나무가 점점 줄어들었다. 당시는 모든 산의 나무가 땔감으로 쓰이는 시대였다. 그 깊은 삼흥리와 명주리일대 땔감이 바닥을 보인다는 것은 다른 지역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삼흥리와 명주리, 대구 용운리 등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강진에서 숲이 가장 우거진 곳이었다. 일본인들은 일찍이 이 산의 가치를 알고 조합을 만들었다. 주민들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엄청난 양의 나무가 봉황포구와 대구 미산포구를 통해 일본으로 빠져나갔다.

해방 후에도 엄청난 양의 나무가 목포, 부산 등지로 유출됐다. 목포로 나가는 나무는 주로 땔감용이었고, 부산으로 가는 나무는 건축용 목재였다. 부산으로 나가는 나무가 훨씬 규모가 커서 모양이 쭉쭉 뻗은 소나무였다. 

봉황마을 주민들은 목포로 가는 땔감의 경우 40~50톤은 되어보이는 거대한 목선이 하루에 한차례씩 나무를 실어갔다고 말했다. 나무가 부족해질 수밖에 없었다. 6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땔감을 확보할 다른 곳을 찾아야 했다. 결국 나무를 찾아나선 곳이 섬이었다. ‘섬나무’가 유일한 대안이었다.

인근 노화도와 청산도는 섬이 넓고 산이 많아서 땔감이 많이 있었다. 섬에서 봉황마을에 전문적으로 나무를 공급하는 중간책도 생겨났다. 노화도와 청산도의 땔감이 어느 정도 소진되자 땔감을 구하는 지역이 멀리 진도의 조도까지 넓어졌다.

당시 봉황마을에서 소비하는 나무량은 엄청난 것이어서 노화도나 청산도, 진도 벽파진 등에 나무가 수북히 쌓이면 칠량배가 금방 들어올 때가 됐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곳의 나무를 대부분 봉황마을에서 구입했던 것이다.

나무는 세 단에 약 100원 정도에 거래됐다. 당시 쌀 한되가 20원 정도였으니까 상당히 비싼 가격이었던 셈이다. 나무를 구입할 때는 현금을 주기도 했지만 대부분 옹기와 물물교환을 했다. 당시에는 섬지역에서 옹기 인기가 좋았기 때문에 옹기를 나무값으로 받은 사람들은 몇 배의 이익을 보고 현지주민들에게 되팔 수 있었다. 현금보다 옹기가 인기였던 시대다.

배에 섬나무를 가득 실으면 400~500단을 쌓을 수 있었다. 70년대 초반부터 중반을 기점으로 봉화마을 앞바다는 옹기를 가득 실은 배가 선착장에서 제주로, 부산으로, 진도로 떠나는 모습도 장관이었지만, 돛배에 땔감을 가득 싣고 봉황 선착장으로 들어오는 장면도 더할 나위가 없이 아름다웠다.

흙과 땔감이 확보되면 옹기를 만드는 일을 동막에서 담당했다. 옹기를 주문하는 선주는 옹기를 몇 개나 만들 것인지, 어떤 옹기를 많이 만들 것인지 등을 잘 계산해서 종합적인 계획을 세워 동막과 협의를 해야 했다.

먼저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은 어떤 옹기를 얼마나 주문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한 가마에는 보통 1천~1천500개의 옹기가 들어갔다. 큰 옹기가 많이 들어가면 투입되는 옹기의 숫자는 자연히 줄어들게 되고, 작은 옹기를 많이 구우면 가마속의 옹기 숫자는 크게 늘어났다.

어떤 종류의 옹기를 주문할 것인지는 계절에 따라 달랐다. 우리나라의 옹기는 종류가 거의 90가지에 이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초봄은 각 가정에서 장을 담글 때다. 이때는 큰 항아리가 집중적으로 팔려나갔다. 초봄에 가마로 들어가는 옹기는 대부분 큰 항아리였다.

여름에는 보리쌀을 많이 소비하는 시기였다. 여름철에 팔 옹기는 보리쌀을 씻는 ‘저박지’란 옹기를 많이 만들어야 했다. 가을철에는 집집마다 김장을 하는 계절이다. 이 때 장사를 잘 하기 위해서는 김장김치를 담을 ‘동우’와 ‘독아지’가 필요했다. 그래서 큰 항아리가 많으면 저박지나 독아지가 줄어들고, 저박지나 독아지가 많으면 큰 항아리 숫자가 줄어드는 식이었다.

가마에 들어갈 옹기 종류가 결정되면 동막에서 본격적으로 옹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 작업을 위해 숙련된 도공 2명이 붙었다. 여기에 곁에서 잔일을 도와주는 인부가 다섯명 정도 필요했다. 도공 2명과 인부 다섯명이 한 가마를 채울 수 있는 1천여 개의 옹기를 만드는 데에 두 달 정도가 소요됐다. 선주는 옹기제작기간을 단축하려면 웃돈을 주고 도공을 더 많이 확보하게 했다. 인부들도 많이 쓰도록 했다. 그러면 옹기나오는 날짜가 훨씬 앞당겨졌다. 

도공들과 인부는 봉황마을 사람들도 다수 있었지만 60% 이상이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전국에 산재해 있는 옹기굽는 마을을 찾아다니며 생활하는 사람들이었다.

마을에 찾아든 사람들은 적당한 집에 세들어 살며 옹기일을 할 곳을 물색했다. 이들은 항상 선금을 받고 일을 했다. 도공들의 대우는 상당히 좋은 것이여서 하루품삯이 일반 인부들의 세배에 달했다. 그러나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상당수 도공들은 씀씀이가 헤퍼서 선불을 받으면 외상값으로 날릴 때가 많았고, 그나마 남은 돈도 술값으로 탕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개중에는 선불을 챙겨 밤중에 조용히 사라지는 사람도 있었다.

60년대 말, 70년대 초반은 봉황마을에 외지에서 찾아든 도공들과 인부들이 참 많을 때였다. 그만큼 봉황옹기가 잘 팔려나갈 때였지만, 당시 엄청난 한해와 가뭄을 겪은 사람들 이 봉황마을에 가면 일거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들었다.<계속>   

< 저작권자 © 강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주희춘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네이버밴드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가장 많이 본 기사
1
“모교 폐교 막기 위해 최선 다해 노력하겠다”
2
본사 김서중 서울취재본부장, 북초 총동문회로부터 감사패 수상
3
“월출산 정기 이어받은 자랑스러운 성전인”
4
“강진 취업박람회에서 일자리 잡(JOb)아요”
5
보이스피싱에 ‘은행원도 당했다’
6
[현장르포]쓰레기매립장 얘기 듣고 관광객 ‘화들짝’
7
재경 군향우회 산악회 11월 정기산행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 · 이메일무단수집거부
전남 강진군 강진읍 영랑로 35 강진버스여객터미널 2층 강진일보  |  대표전화 : 061)434-8788
사업자등록번호 : 415-81-43025  |  발행인 : 황민홍  |  정보관리 책임자 : 주희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주희춘
Copyright © 2011 강진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nsor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