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같이 펼쳐져 있는 강진만… 그곳에 노래가 있고 시가 있다

세상에 아름다운 절경이라 아니하랴
저물어 나린비에 돛단배가 돌아오네

강진읍 남포에서 한참을 내려가면 만나는 강진만의 유일한 유인도 가우도. 출렁다리가 들어서기전 가우도의 모습이다.
도암 백련사에서 바라다보이는 강진만은 절경 그 자체이다. 그 좋은 바다를 막아 버렸으니 많은 것을 잃어 버렸다. 만덕 간척지 끝 지점에 죽섬이 있다. 우리말로 대섬이라 불리는 무인도이다. 배가 죽도 주변에 당도하자 이 곳이 바다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바닷물의 색깔이 검푸르게 반짝이고, 바다의 중심에서 육지까지 아주 먼 거리라는 것을 느낀다.

바다 한가운데가 여기다. 뒤를 돌아보면 재미있는 광경이 펼쳐져 있다. 좌측의 해창과 우측의 국사봉이 강진만을 보호하는 커다란 수문구실을 하고 있는 광경이었다. 그 주변으로 펼쳐져 있는 아기자기한 산들이 무수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대섬은 봄에 봐야 제맛이 난다. 빽빽한 상록수 틈으로 하얀 벚꽃이 꽃망울을 터뜨리면 마치 푸른 도화지에 하얀 물감을 뿌려놓은 것처럼 섬이 채색된다. 벚나무가 커가면서 매년 꽃의 규모도 커지고 있다. 죽섬은 원래 대나무가 많은 곳이었다. 조선시대 때 활을 만드는 대나무를 이곳에서 조달했다고 한다. 강진의 대표적인 한학자이자 시인이였던 경회(景晦) 김영근(金永根, 1865〜1934)선생은 ‘금릉팔경’이란 그의 한시에 죽도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한줌의 작은섬이 대숲으로 푸르는데
한가한 갈매기들 짝을지어 날아드니
세상에 아름다운 절경이라 아니하랴
저물어 나린비에 돛단배가 돌아오네

죽도 주변에는 천혜의 수산어장이 많이 형성돼 있다. 유명한 강진만의 바지락이 대부분 죽도 주변에서 나온다. 여름철이 되면 죽도주변은 바지락을 채취하는 어민들의 울긋불긋한 옷으로 장관을 이룬다. 죽도 건너편에 도암면 송학리에 농어바우라는 곳이 있다. 다산선생이 초당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자주 찾았던 곳이다.

대학자 다산 정약용선생은 강진에서 18년 유배생활을 하면서 초당의 골방에 앉아 경전연구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강진의 다양한 풍광을 섭렵했다. 그는 강진의 서민들과 자주 접촉하고 그들의 삶에 무한한 애정을 가졌다.

그래서 다산의 학문세계는 주역을 통달하고 목민관이 지켜야 할 도리, 행정개혁 등 무거운 주제를 다루기도 하지만, 강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다양한 모습을 기록해 조선후기 강진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몇 안되는 자료로 활용되기도 한다.

다산이 남긴 ‘탐진촌요(耽津村謠)’, ‘탐진어가(耽津漁歌)’, ‘탐진농가(耽津農歌)’ 등은 이같은 다산의 삶이 녹아든 한시들이다. 모두 강진의 풍경과 서민들의 고통, 서민생활의 정겨움 등이 한시의 주제였다. 탐진어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어촌의 사람들은 복어만 좋다하고
농어는 몽땅 털어 술과 바꿔 마신다네.

가우도의 내부 모습이다.
당시 강진만 주변의 어촌생활을 표현하고 있다. 복어는 옛날에도 인기있는 어종이었던 듯 싶다. 역시 요즘에도 고급 횟감으로 통하는 농어는 당시에는 술과 바꿔마실 정도로 흔했던 바닷고기였던 것 같다.

농어바위가 있는 곳의 옛 지명은 노어기다. 농어를 많이 낚아 올린 곳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농어낚시터란 말이다. 다산선생은 귤동마을 뒷산 초당을 나와 해변으로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 이곳까지 산책을 즐겼고, 이곳에서 배를 타고 건너편 칠량 장계리, 대구 등으로 제자들을 만나러 갔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농어바위는 지금도 그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농어바위에서 동쪽으로 보이는 산이 아기자기하다. 대구쪽 산이 아기자기하고 뒤쪽으로 장흥의 천관산이 정상을 드러내고 있다. 남쪽으로는 가우도를 지척에 두고 바다가 시원하게 열려 있다.

죽도를 지나면 이제 강진의 유일한 유인도인 가우도(駕牛島)로 향한다. 강진에도 섬이 여럿 있다. 여덟 개나 되는데 강진만 위쪽부터 내려가보면 맨위에 죽도(대섬), 그 다음이 유인도인 가우도이다. 가우도 밑으로 비래도(비라도), 내호도와 외호도(내호도와 외호도는 대구면 남호마을 앞에 있다.), 또 마량 앞바다로 떠있는 2개의 섬인 까막섬, 사초리 앞바다에 있는 복섬까지 강진에 속해 있는 섬이다. 사초리 앞 홀애비섬은 방파제와 물양장을 만들어서 육지와 연결돼 섬이라는 표현이 사라져 버렸다.

도암면 행정소속인 가우도는 작은 섬이지만 물이 좋다. 사람이 살려면 첫째 조건이 물, 물이 좋으니 사람이 정착하는 것은 당연지사. 실제 마을을 찾아 확인한 결과 마을에 샘이 세 군데나 있었다. 물맛도 좋았다.

‘소의 멍에’라는 뜻을 가진 섬 가우도(駕牛島)는 약 7만평의 면적(주민들의 얘기로는 9만평이 넘는다고 함)에 마을 동남쪽에 최고봉인 상산봉 아래 서쪽으로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마을에서는 상산봉 반대편 강진읍쪽 높은 부분을 ‘고라시’라 부른다. 동네에서 상산봉으로 이어지는 골짜기가 있어 샘이 몰려 있는데 이곳은 ‘샘기미골창’이다. 가우도 마을은 지난 2005년 11월 독립마을이 되었다. 그 전에는 도암 망호마을에 딸린 마을이었다.

벚꽃이 만개한 죽도 전경.
지금 14가구 30여명밖에 없지만 이곳 섬에도 60년대말 사람들이 많이 살 때는 17세대에 100명이 넘는 주민들이 살았다. 가우도에는 배가 곧 자가용이다. 그래서 혼자 사는 노인들을 제외하고 전부 다 배를 1~2척씩은 갖고 있다.

가우도 선착장에 들어서니 서너명이 있었다. 한쪽에는 배를 고치고 있고 또 부부로 보이는 사람은 볼 일을 보러 뭍으로 가려는지 배에 올라타고 있었다. 가우도 선착장에는 최근 유료낙시터와 마을식당이 들어섰다. 출렁다리를 타고 건너오는 관광객들을 맞이하기 위해서다. 선착장에 있는 동네분들과 얘기를 몇 마디 나눈 뒤 마을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곳에서 한 번쯤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들과 파도소리를 들으며 별을 감상하며 밤을 새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 학교터에는 팬션이 들어서 있다. 한 나절가량의 시간에 마을을 이해한다는게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일단 섬을 한바퀴 둘러보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가우도는 북쪽과 남쪽으로 강진만의 방향을 따라 길다. 북쪽과 남쪽은 방파제처럼 버티고 있는 바위가 많고 섬 동쪽과 서쪽으로는 군데군데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다. 작은 모래사장들과 조개껍질 언덕을 지나니 저쪽 10여 미터 앞에서 전어인 듯 보이는 물고기가 ‘나 여기있네’라는 듯 두어 번 물밖으로 튀어 올랐다. 섬을 돌면서 보니 물이 깨끗한 편이었다. 섬 군데군데에는 물에 떠밀려와 얹힌 듯 사람들이 내다버린 쓰레기들이 눈에 띄기도 했다. 강진만이 유달리 커 보였다.

섬을 일주하는데 빠른 걸음으로 한 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으니 차분하게 가우도의 운치를 느끼면서 걸으면 서너 시간 잡고 걸어보는 것도 좋을 듯했다. 섬을 한바퀴 돌고 나서 다시 후박나무가 있는 샘가를 지나 동네로 들어서니 마침 동네사람이 나오길래 잘 됐다 싶어 마을일을 잘 아시는 분을 뵙자고 청했더니 바로 앞집에 있다며 안내해 주었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가우도는 1910년대 이전에는 완도군 군외면에 속해 있었다고 한다. 이후 강진군 부암면 가우(牛)도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현재 가우도에는 경주김씨가 자작일촌을 이루고 있는데 약 400년 전에 경주김씨의 선조가 고금도에 유배를 갔다 올라오다 정착했다고 한다. 마을에 제주 고씨의 무덤이 있어 경주김씨 이전에는 제주 고씨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강진만이 제주를 오가는 교통로였으니 제주도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가우도에서 정착해 살았다는 것이 충분한 설득력을 갖는다고 하겠다. 가우도에는 논은 10여 마지기 정도지만 300마지기 정도의 밭이 있다. 대부분 바지락, 꼬막, 낙지주낙, 전어, 돔 등을 잡는 바닷일로 먹고 사는데 요즘은 그 바다마저도 형편이 좋지 못하다고 한다.

가우도는 작은 섬마을이지만 전국에 알려진 역사가 있다. 가우도가 전국에 알려진 데는 가우도 분교의 역할이 컸다. 80년대 초반 이 학교 학생이던 김국현씨와 김금숙씨가 밀물과 썰물을 관찰 발표해 대통령상을 받게 된 것이 계기가 돼 전국방송을 타면서 이 곳 가우도라는 이름이 전국에 알려졌었다.

마을이 같은 집안으로 이루어진데다 작아 단합이 잘된다. 마을에 대소사가 있으면 수시로 모여서 동계를 치룬다. 또 5월이면 어버이날 위안잔치와 마을회초(일종의 단합대회)가 1년에 한번씩 있다. 마을에서는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상산봉 밑에 있는 사당에서 정월대보름이면 당제를 지내곤 했다고 한다.

당시 제사를 주관하는 제주는 한 달 동안 부인과 따로 기거하면서 몸을 깨끗이 해야 한다. 마을에 산고나 초상이 있으면 안지냈으며 제주는 한 달 동안 말도 않고 풍어와 복을 빌었다고 한다.

가우도를 나와 다시 배에 올랐다. 가우도 동쪽 건너편에 있는 대구 저두 앞바다는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저두에서 남쪽으로 멀리 보이는 하저마을 앞바다가 시선을 더 강하게 유혹한다. 그러다 보니 저두마을은 인근에 가우도 횟집이나 찾아갈 때 종종 구경하는 곳이다. 가우도를 오가는 배도 대부분 하저마을 부두를 이용한다.

하저마을 부두는 배가 닿기 좋고, 가우도쪽 선착장으로 가는 길도 편하다. 그러나 중저 앞바다를 곰곰이 살펴보면 여러 가지 아름다움이 많다. 역사적인 이야기 하나를 해보자. 옛날 강진만을 오가던 돛배들이 어떤 항로를 이용했을까.

가우도와 도암 신기리 사이의 넓은 바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중저와 가우도 사이의 좁은 바다를 이용했다. 옛날 옹기를 돛단배에 싣고 팔러 다니던 칠량 봉황마을 사공들에 따르면 봉황마을을 출발한 배가 바다 한 가운데로 나가지 않고 해변을 따라 내려가 저두 앞바다를 지나갔다.

저두 앞바다가 파도가 적고 물의 흐름이 좋았다. 다른 어선들도 마찬가지였다. 발통선이 등장한 후 뱃길의 범위가 종횡무진해졌지만 대구 저두는 강진만 교통의 핵심 요지였다. 풍경도 좋다. 가우도횟집에서 북쪽으로 논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 보면 숨은 비경이 많다.

갈대밭 사이로 바닷물이 사각거리는 소리하며, 파도라도 치면 금방이라도 바닷물이 넘어올 듯한 논들이 정겹다. 조금 더 올라가면 논가에 서있는 나무들이 바다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그 위쪽으로는 험하지 않은 바위들이 파도와 아기자기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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