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균 목사/ 광주-전남 평통사 상임의장

예술의 궁극을 향한 미래를 투사하는 열정이 그의 화폭에 응축되어 있다

강렬한 원색과 거칠고도 대담한 붓칠은 가히 역동적
1938년 강진군 신전면 부춘리 태생
강진농고 재학 중 김영렬 화백에게 그림배워

1970년대 강진읍 ‘호정다방’에서 ‘응용미술전’
광주사범대학에 진학하여 미술공부에 주력
화순고교장, 전남도교육청 장학관, 나주시교육장등 역임

유근홍 화백
강진 현대사에서 그림 잘 그리는 화가를 말하라면, 단연 완향 김영렬 화백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완향선생의 수제자였던 류근홍(柳根弘, 1938-98년) 화백에 관해서 아는 분은 그다지 많지 않겠지만, 80세를 전후한 강진농고 출신이면 모르는 분이 없으리라 믿는다.

현재 강진, 광주에서는 원용호(서예가), 박병춘(재야 정치인), 박만철(교사), 김창환(곡물협회장) 선배님들, 내 연배에서는 한성수(은성철강), 박상태(법무사), 한마을 출신 윤광현(시인, 출판업)님들이 뚜렷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류근홍 화백은 1938년 강진군 신전면 부춘리 태생이다. 생존해 계신다면 우리 나이로 79세이다. 그의 노부모님은 막내아들의 학업을 위해 일찍이 강진으로 나왔다. 부친 류병권 옹은 학식이 있고, 사리에 밝은 분이었다. 강진읍 동성리 옥샘 부근에 집을 마련하고 하숙을 치면서 아들을 학교에 보냈다.

소년 류근홍은 총명하고, 성실하고, 인사성이 밝은 소년이었다. 당시 강진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던 손시철씨의 자제를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입주한다. 1957-8년 무렵 류화백이 강진농고 재학 중, 김영렬 화백에게 뎃생을 배운 것을 기억한다.

필자는 어릴 적에 류근홍 화백을 이젤 등 화구를 들고 사생하는 데를 따라다녔다. 당시 김영렬 화백은 강진 연방죽 건너 YMCA(후에 수도탕-목욕탕) 뒷방에서 살고 있었다. 시골소년인 필자는 김영렬 화백의 아뜰리에(畵室)를 겸한 신혼 살림방에서 아크립파 석고상을 처음 보았다.

모시 한복을 입고 다소곳이 앉아서 태극선을 든 잘 익은 사과처럼 생긴 부인의 전신상을 그린 유화 켄버스도 놓여 있었다. 어린 나에게는 생소하고도 딴 세상에 관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또한 필자가 중학교 시절 류근홍 화백은 사범대학 시절에 강진 ‘호정다방’에서 ‘응용미술전’을 열었다.

‘응용미술’이라함은 공예미술, 장식미술, 디자인 등을 포함하는 실용성을 목적으로 하는 미술이다. 미술학도로서 전도가 유망하다는 상당히 좋은 반응을 얻었다. 마치 그의 동창인 석향 정문석 시인이 강진농고 시절부터 시화전을 열었듯이 일찍이 천재성을 발휘했던 것이다.

필자는 어린 시절 근홍형의 작품전을 홍보하기 위해 초청장을 돌리고 다녔던 기억이 새롭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의 질과 방향이 결정된다. 류근홍 형을 만남으로 필자는 조금 더 이상적인 차원의 미래를 꿈꾸면서 자라는 소년시절을 갖게 되었다.

회항
귀명창(귀名唱)이란 말이 있다. 판소리를 직접 할 줄은 몰라도, 듣고 즐기면서 추임새를 넣을 수 있는 수준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귀명창이 없다면 판소리꾼이 어찌 신명이 나겠는가!

류근홍 화백은 전업작가가 아니었다. 1938년생인 그는 강진농고를 졸업하고, 광주교육대학의 전신인 광주사범대학에 진학하여 미술공부에 주력하였다. 장흥안양초등학교, 무안중학교, 화순고 교장, 전남도교육청 장학관, 나주시교육장 등을 역임하였다. 일선 교사로서, 교육행정가로서 전남교육계에서 평생을 봉직했다. 또한 미술교사로서 자기 세계를 창조해 치열하게 개척해 나아간 예술인이었다. 

모든 미술 작품은 인간 정신의 표현이다. 작가 자신과 환경과의 관계에서 체험한 미적 경험의 표현이다. 작품을 감상하므로 작가와 감상자가 동일시(감정이입)되었을 때,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누가  아마츄어  미술 애호가라고 인정해준다면 과분해 할 수준의 사람이다. 나는 미켈란젤로와 같은 르네상스기 거장들의 성화에도 감탄해마지 않는다.

그러나 사물의 색상이나 질감을 그대로 살려 사물파악이 눈에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소박한 사실주의자 밀레를 더 좋아한다. 현대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세쟌과 같은 분석적 후기인상주의도 마음에 와 닿는다. 꿈과 상상의 세계를 나르는 환상적인 화가 샤갈은 더욱 좋다.

그러나 나의 그림 수준은 고호나 고갱과 같은 빛의 화가들을 어느 유파보다 좋아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인상파는 색채, 색조, 질감 자체에 관심을 둔다.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을 직관적이고 자유롭게 표현하고자 했다.

필자에게 있어 아직까지 서양화가 중, ‘태양을 훔친 화가’로 불리우는 빈센트 반 고흐 그 이상 어느 누구를 더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가난한 천재화가 고흐는 생전에 2천여점의 유화를 남겼지만, 살아있는 동안 팔린 그림은 단 2점에 불과했다.

그가 살아있을 때는 누구도 그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고흐는 일생을 극심한 가난 속에서 그림에만 몰두했던 것이다. 특히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는 구름이 살아 움직이는 사이로 별빛과 달빛이 명멸하고, 짙은 하늘과 마을 교회당 첨탑은 세대의 종말을 예시하는 징표가 아닐까하는 예지가 솟구친다. 그가 목사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류근홍 화백은 소년시절 김영렬 화백에게서 뎃셍과 사실주의 화풍을 배웠다. 사범대 미술과 시절에는 주로 양수아 미술교수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학창시절에 양수아 화백에 심취해 있었다. 사실 양수아 화백은 ‘한국의 피카소’로 알려진 후기 인상파를 넘어 입체파에 가까운 화가이다.

1970년대 초반에 강진 모란다방에서 양수아 화백의 개인전이 있었다. 그의 작품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양수아 선생은 작품전시회 내내 술에 취해 있었다. 나는 양수아 화백의 그림의 가치를 알아보았으나, 가난해서 작품을 구매할 수 없었다. 류근홍의 화풍은 구상주의이다.

강렬한 원색과 거칠고도 대담한 붓칠은 가히 역동적이다. 그는 바다와 항구와 배를 주로 그렸다. 화가로서의 찐한 감수성과 화가가 추구하는 미학세계를 바다에 띄운다. 그의 예술의 궁극을 향한 미래를 투사하는 열정이 그의 화폭에 응축되어 있다. 사람은 죽어서야 올바로 평가된다.

류근홍 화백은 지금 그가 남긴 유작으로 우리에게 대화를 걸어오고 있다. 나는 그의 작품세계를 만인에게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감히 이 졸고를 쓰는 것이다. 그가 세상에 남긴 아들 류상열은 현재 개업의사이다.

대전에서 의사로서, 재활의학과병원을 수년 전에 개원해서 진료활동을 하고 있다. 필자는 소년시절부터 류근홍 화백의 영향력 안에서 성장했다. 나는 먼저 고향 신문에다 류화백의 그림을 선보이고 싶은 것이다. 

내 고향 강진의 화단(畵壇)에 완향의 수제자인 류근홍 화백의 그림이 ‘강진일보’ 지면을 통해, 예향 강진인의 눈에 연민과 열정의 감흥을 불러일으키기를 바라는 마음이 자못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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