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에 전봇대 처음등장‘전남지역 최초’

87년만에 땅속으로, 깨끗한 거리 되찾아
1937년 강진면‘강진읍’으로 승격
읍내 아스팔트 도로도 전남최초로 생겨

전선지중화 공사가 강진읍의 풍경을 바꿔놓았다. 두 사진을 비교해 보자. 좌측은 1959년 강진읍내 중심가의 모습이다. 좌측의 건물이 지금의 파크랜드 상가가 있는 곳 주변으로 광주고속 터미널이 있었다. 버스 한 대가 보인다. 멀리 군동의 비파산 선이 보인다. 우측으로 전봇대 좌측으로 전화선이 설치돼 있는게 보인다. 최근 같은 지점에서 찍은 사진이다. 극장통 앞 4거리까지 지중화 공사가 진행돼 시가지가 바뀌었다.
강진읍 버스터미널~동광당~극장통~ 경찰서앞 전기줄이 깨끗이 땅속으로 들어갔다. 전기줄뿐만 아니라 전화줄이나 기타 통신케이블도 전기줄을 따라서 지하로 몸을 숨겼다. 덕분에 강진읍 해당 구간이 아주 깨끗한 모습이 됐다.

또 한가지 눈여겨 볼것은 거리의 시야가 시원하게 뚫렸다는 것이다. 우리서점앞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멀리 군동의 비파산 곡선이 아스라이 들어온다. 복잡한 전봇대와 전기줄이 있을 때도 조금은 보였지만 지중화 공사후에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새로 덧씌운 검은 아스팔트 도로 역시 옛 추억을 되살리게 한다.

이번에 강진읍내 중심가에서 전기줄이 사라진 것은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30년초 부자들이 많았던 강진은 문물혜택을 다른 지역보다 비교적 빨리 받았다. 인근지역을 통틀어 전기가 가장 먼저 들어왔고, 강진면이 강진읍으로 승격된 것도 빨랐다. 포장도로가 생긴것도 전남군단위 지역에서 처음이었다.

김충식 선생은 1929년 자본금 50만원을 투자해 강진에 소화전기주식회사라는 전력회사를 창립해 대주주로 참여한다. 지금의 강진읍 목리(행정구역은 강진읍 동성리) 한전강진지사가 있는 자리다. 소화전기는 디젤엔진 120㎾의 화력발전소를 설치해서 초창기에는 소수 가정에만 전기를 공급했다. 초기 수혜자들이 강진의 갑부들이었던 것은 물론이다. 

전기수요는 갈수록 늘어났다. 군동 백금포와 목리 등에 산재해 있던 정미업자들로부터 전력공급 요청이 늘어났던 것이다. 소화전기는 당시 자매회사던 목포전등(주)에 전력공급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목포전등은 1919년 6월에 창립된 전기회사로 목포일대와 함평 일부지역에 전기를 공급하는 회사였다. 목포전등은 강진에 전기를 보내기 위해 목포 건너편인 영암군 용당에 발전소를 신설하고 목포에서 강진에 이르는 송전선로를 건설하게 된다. 1934년의 일이다.

목포전등이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발전소 신설과 송전선로 건설에 응한 것을 두고 볼 때 당시 강진을 중심으로 전기수요가 폭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목포전등은 강진선로 건설에 충당한 비용을 위해 50만원의 자본금 증자까지 진행했다. 용당에서 강진으로 송전선로가 건설되던 이때에 선로가 지나가는 성전면에서도 처음으로 전기를 사용하게 됐다.
 
목포 강진간 선로공사는 1935년 7월 강진변전탑이 완료돼 소화전기는 목포에서 120㎾의 전기를 더 공급받게 됐다. 기존 공급 용량에서 배가 더 늘어난 것이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강진읍과 성전면에 이어 병영면에도 전기가 공급되게 된다. 강진면은 1937년 7월 1일 강진읍으로 승격됐다. 해남면이 읍으로 승격된게 1957년, 영암읍이 읍으로 승격된게 1973년인 것을 감안할 때 강진읍이 얼마나 빨리 읍으로 승격됐는지 짐작할 수 있다.

강진읍은 읍승격과 함께 얼마되지 않아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등장했다. 지금의 강진읍 동성리 강진의원앞에서 강진읍을 가로질러 강진읍 서성리 영당3거리에 이르는 구간이었다. 이 포장도로는 관에서 한게 아니라 김충식 선생이 사재를 희사해서 등장한 것이었다.

일설에는 포장도로가 강진의원에서부터 김충식 생가 구간에 먼저 생기고, 곧바로 강진읍내 도로가 포장됐다는 말도 있다. 포장도로가 들어선 곳은 광주, 목포, 순천, 여수등 지금의 시단위를 제외하고는 강진읍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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