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인구 1965년 12만7,878명으로 최고… 90년대 후반 5만명대로 감소

면단위 인구감소 20%대, 면단위 상권 붕괴
자동차는 1970년 43대, 2013년 9,320대‘급증’

90년대 초반 강진읍내 모습이다. 고층 아파트는 오른쪽에 대아아파트가 유일하게 보인다. 90년대는 면단위 경제의 급격한 붕괴가 뚜렷하게 나타난 시기였다.<사진=강진군정 50년사>
광복 70주년 동안 강진의 변화과정을 기술하면서 인구의 변화를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인구는 그 지역의 변화를 가장 정확하게 표시할 수 있는 수치중의 하나다. 해방 직후인 1945년 강진인구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현존하고 있는 각종 자료에서 강진의 인구가 가장 먼저 보이는 시기는 1955년이다. 이때 강진인구가 10만4천748명으로 나온다. 이후 강진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세를 보인다. 그러다가 1960년에 11만명을 넘어선데 이어 1963년에는 12만4천명으로 12만명대를 넘어서고 65년 12만7천878명을 최고조로 67년도에는 12만7천170명을 유지하는등 60년대 후반에 최고수준을 유지한다.

해방과 6.25를 거치고 60년대 혹독한 자연재해를 겪었지만 강진의 인구는 지속적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이후 68년도부터 인구 감소가 시작되더니 강진인구는 지속적으로 줄어들기 시작한다. 강진인구 12만명대는 69년까지 이어지다가 1970년들어 11만명대로 떨어졌다.

60년대 후반 강진의 인구가 급격히 감소한 것은 67년과 68년 연속 겪었던 큰 가뭄과 연관이 많은 것으로 추정됐다. 가뭄 때문에 도저히 농사를 짓지 못한 사람들이 집과 농토를 버리고 대도시나 제주도로 떠나갔던 것이다. 이후 서서히 도시의 공업화가 열리면서 이농은 지속적으로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강진통계연보등을 통해 강진의 인구변화를 보면 강진은 크게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인구감소가 있었다. 보통 강진인구는 1년에 1천~2천명 정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74년에서 75년 사이에는 거의 1만명에 가까운 인구가 감소했고, 1999년에서 2000년 사이에는 9천명이 넘는 인구가 줄어들었다. 당시 인구가 급감한 원인을 정확하게 분석하기 어렵지만 한해동안 인구가 1만명씩 빠져나간 것은 마치 바닷물이 썰물 처럼 빠져나가 모습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허탈한 광경이었다.

결국 강진인구는 1981년에 10만명대가 무너졌고, 1997년에 5만명대가 와해 됐으며, 현재는 4만명대가 무너져 내린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 90년후반들어 강진인구은 5만명대를 맴돌았다. 60년대 후반과 비교하면 7만명 이상이 감소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인구의 40%는 강진읍에 집중돼 있고, 나머지 인구가 면단위에 분산돼 살고 있는 형편이었다.
 
면단위 경제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면단위 경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면소재지가 급격히 붕괴됐다. 교통의 발달로 강진읍을 왕래하는 시간이 짧아졌고, 가정마다 자동차를 소유한 가정이 늘어나면서 주요 상권이 강진읍에 집중적으로 형성됐다.

특히 강진읍과 가까운 면소재지는 급격한 변화를 면치 못했다. 군동면소재지를 비롯해 칠량면소재지, 도암면소재지, 작천면소재지등이 그런 곳의 대표적인 곳으로 꼽힌다. 교통이 발달하면서 거의 모든 생활권이 강진읍으로 집중됐다. 강진읍과 가장 가까운 지역에 위치한 군동면 소재지의 경우 그런 변화를 가장 먼저, 가장 크게 겪은 곳이었다.

군동면 소재지의 한 주민은 “예전부터 군동면소재지는 강진읍과 가까웠으나 군동의 각 마을에 주민들이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에 식당과 다방등 나름대로 필요한 상권이 꾸준히 유지돼 왔으나 인구가 급감하면서 90년대들어 완전히 와해되다시피 했다”고 말했다.

인구 지표를 보면 면단위의 인구붕괴 속에 강진읍은 마지막까지 사람들이 집중했던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990년 들어 강진인구가 70년대 초반에 비해 5만명 가까이 줄어들었는데, 강진읍은 70년에 비해 90년 인구가 2,169명 줄어드는데 그쳤다. 그러나 면단위인 도암과 신전은 이 기간 동안 10만436명이 감소했고 군동면은 8,147명이 줄어들었다.
 
이 기간 동안 인구가 20% 이상 감소한 곳이 군동을 비롯해 도암 신전, 작천, 성전, 병영등 거의 모든 면단위의 인구가 자전거 바퀴속에서 바람빠져 나가듯 빠져나갔다. 이를 보면 이 기간 동안 인구 감소가 농촌지역의 이농에 따른 결과였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속에서 강진읍은 90년대 중반까지는 나름대로 짱짱한 상권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매주 정기적으로 서울 동대문시장에서 도매 의류를 구입해 오기 위해 출발하는 관광차량이 있어서 강진읍의 상인들이 합동으로 옷을 구입해 왔다. 그만큼 의류 상가들이 유지가 되던 시기였고, 이에따른 연관 상업이 함께 번성하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같은 인구감소 속에 확실하게 늘어난게 있었다면 자동차였다. 1970년에 강진의 승용차는 43대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1980년에 173대로 늘었던 것이 1990년에는 1,061대로 급격하게 늘었다. 2013년 말 강진의 승용차 수는 9,320대에 이르고 있다. 전국적인 현상이겠지만 이같은 자동차의 증가는 가위 혁명적인 증가가 아닐 수 없었다.

이를 종합해 보면 70년~90년대까지 가장 큰 감소를 인구라고 하면 반면에 가장 많이 늘어난 것은 바로 자동차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조차 사라졌지만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용달차라는 운송사업체들이 있었다. 지역에 소규모 물동량이 늘어나면서 강진에서만 한때 22개의 용달화물회사가 운영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강진읍을 중심으로 거의 모든 면단위에 용달차가 상시 대기하고 있을 정도였다.

90년대 들어 강진읍의 상권이 결정적으로 타격을 입은 것은 90년대 후반들어 급격히 보급되기 시작한 전자상거래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전국적인 택배산업이 급격히 발달하면서 소규모로 운영되던 용달차 사업도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인터넷을 통한 전자상거래의 급격한 발달은 그나마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 오던 강진읍의 상권을 급격히 붕괴시켰다. 주민들이 도시에서 상품을 구입하려면 직접 대도시에 가서 사는게 1년에 몇차례 있을 정도였던 것이 인터넷 전자상거래의 발달로 수시로 외지에서 물품을 구입할 수 있는 구조가 됐다.

전자상거래의 파급은 의료나 신발등 공산품에서 두드러 졌다. 엊그저께까지만 해도 강진읍내 상가를 기웃거리며 옷이나 신발을 샀던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간단한 주문만으로 며칠 후 집에서 택배차량을 이용해 물건을 받아 봤다. 강진읍에서 정기적으로 서울 동대문 시장으로 출발하던 의류구입 관광차량도 사라졌고, 강진읍에는 택배회사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후 전자상거래는 2000년대 초반에 초고속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그야말로 초고속 성장을 하게 된다. 그만큼 지역상권은 위축되어 가고 있었다.

90년대 들어 가장 큰 행정의 변화중의 하나는 사회복지의 개념이 서서히 정립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회복지는 광복이후 6.25를 거치면서 구호사업에 집중되고 있었고, 1961년에 생활보호법이 제정됐으나 국가재정난 때문에 전면 실시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80년대 들어서야 생활보호 대상자들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이들의 자녀들을 교육보호로 규정하는등 생활보호 대상자에 대한 기본제도가 확립되었다.

그러다가 90년대 들어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세부 법 규정들이 정비되고, 노인복지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는등 체계적인 사회복지 개념이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1990년 강진군의 생활보호대상자는 3,733가구의 1만2,646명에 달했다. 1979년 생활보호 대상자가 2,068가구 7,277명이었으니까 인구는 급감한 가운데 생활보호 대상자는 크게 늘어난 상황이었다. 생활보호대상자를 지정하는 기준이 시대적으로 달랐겠지만, 갈수록 생활보호대상자가 늘어나고 있는 힘겨운 상황은 계속되고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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