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에서 14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

“바다에서 무슨 고려청자가…” 최초 신고받은 공무원 외면하기도

1995년 10월 6일의 일이다. 무안군 해제면 바다밑에서 14세기 고려상감청자류가 무더기로 인양됐다는 소식이 나왔다. 민간 잠수부들이 이곳에서 120여 점의 유물을 찾아내면서 발굴이 시작돼 3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에서 고려후기 청자 639점을 건졌다. 청자들은 강진 대구면 사당리 가마터에서 만든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그 전에 몇차례 바다에서 청자를 인양한 사례가 있었지만 이렇게 산지가 정확하게 강진으로 분석된 곳은 사실상 무안 해제 해저유물이 처음이었다. 강진에서 생산된 청자가 개경으로 갔을 것이라는 추정은 있었지만, 고려시대에 분명한 뱃길이 있었다는 사실이 차츰 공식화되어가는 과정이 됐다.

이때 발굴된 유물은 유물의 문양으로 보아 왕실과 관청에서 쓰던 것들로 문양은 구름, 봉황, 국화, 모란, 연꽃, 버들무늬를 찍어서 표현하였다. 이러한 문양의 특징은 12세기에 절정을 이룬 고려청자가 13세기 후반의 사회적 변화와 원나라의 영향으로 새로운 기형과 문양이 등장하는 시기이다.
 
도리포 앞바다는 함평만과 가깝고 이 함평만은 무안군·영광군·함평군의 경계해역으로 과거 경인지역과 서남해안을 연결하는 중요해로였던 칠산바다가 앞에 놓여 있으며, 신안선이 발견된 곳과 15㎞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다.

도리포 발굴청자들은 고려 후기 청자의 특징과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며, 문양의 시대적 변천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조선시대 분청사기로 옮겨가는 시발점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평가받았다.
우리나라의 수중유물 발굴의 효시는 뭐니뭐니 해도 ‘신안해저발굴’이었다. 신안해저유물은 중국 유물이었지만 국민들로부터 해저유물에 대한 큰 관심을 이끌어 냈다.

1976년부터 8년간 이뤄진 신안군 해저발굴은 14세기 바다를 누비던 중국 무역선과 도자기 등 2만점이 넘는 무역품을 드러내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신안유물은 그 해 1월 어느 날 신안군 지도면 방축리 도덕도 앞에서 트롤 어선으로 고기를 잡던 어민의 그물에 뻘흙과 굴껍데기가 다닥다닥 붙은 항아리가 걸려 나온게 발굴 단초가 됐다.

당시에는 국가적인 해양유물 발굴체계가 자리잡지 못해 웃지 못할 해프닝이 많았다. 항아리를 건져올린 어민의 동생이 고려시대 청자일는지 모른다고 생각해 신안군청에 가져가 보여주었다.

그러나 문화재 일을 맡고 있던 공무원은 바다에서 고려 청자가 나올리가 없다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해당공무원은 이 어민이 어수룩한 속임수를 써서 보상금을 타려 한다고 꾸짖기까지 했다. 그런데 어디서 들었는지 서울에서 골동품 상인이 이 어민을 찾아왔다. 그는 청자를 보고는 원나라 룽취안 가마에서 만들어진 진품이라고 감정했다.

4월에는 어부 박창석이 또다시 같은 장소에서 청자와 백자를 건져 군청에 신고했다. 일이 이쯤 되자 신안 앞바다에 보물선이 가라앉아 있다는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재빠른 도굴꾼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바다에서 값비싼 도자기들을 건져올리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원나라와 고려시대의 보기 드문 명품 도자기들이 한꺼번에 여러 점씩 골동품가에 나돌거나, 일본으로 몰래 팔려나갔다.

중국과 고려의 진품 도자기가 그처럼 많이 거래된 일은 일찍이 없었다. 전국의 골동품 상인과 도굴꾼들이 알음알음으로 신안에 몰려들었다. 9월에 접어들어서야 낌새를 챈 경찰이 도굴꾼들을 붙잡아 보니, 그들의 창고에서 값을 따질 수 없는 국보급 보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문화재관리국은 일이 이쯤됐을 때야 ‘신안 해저 유물 발굴 조사단’을 만들게 되었다. 청자 한개가 어부의 그물에 걸린 지 아홉달 만에 비로소 정식 발굴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발굴 지역의 명칭을 그대로 물려받아 이름 지어진 ‘신안선’은 1323년 중국 경원에서 무역품을 가득 싣고 출발해 일본 하카다와 교토 쪽으로 향하던 국제무역선이었다. 동서간 문물교류와 사람들의 왕래가 활발했던 14세기, 신안선은 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이뤄진 교역의 모습을 증언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의미가 컸다.

또 완도군 약산면 어두리앞에서 도자기가 대량 발굴됐으나 해남 진산리에서 생산된 녹청자로 확인됐다. 1983년 12월말, 약산면 어두리앞 바다에서 키조개 채취작업을 하던 잠수사들이 몇점의 그릇을 건저올리며 발굴이 시작됐다. 이 발견은 수중유물에 대한 관심을 한껏 높여준 신안해저 발굴이 끝나 갈 무렵이어서 이목이 집중됐다. 해저에는 수 많은 유물을 가득실은 배 한척이 침몰되어 있었다. 침몰된 배는 심하게 부식된 상태였지만 3만여점의 도자기는 보존상태가 양호했다.

이 배는 10톤 규모의 돛배였으며, 11세기 중 후반경 해남 진산리에서 그릇을 싣고 항해하다가 침몰한 고려시대 장삿배였다. 완도해저발굴의 성과는 11세기 후반경 고려도자기에 대한 연구와 이해의 폭을 넓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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