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강진의보직원 일본통해 월북… 북한 방송듣고 파악

1993년 삐라에 인물등장해 뿌려지기도
1999년 평양방송 출연 “농촌 경리부분 일꾼으로 일하며 잘 있다”

90년대 북한이 만들어 날려 보낸 삐라들이다. 인기있는 연예인들을 많이 등장시켰다.
북한의 핵실험과 장거리미사일발사, 개성공단 폐쇄로 어느때 보다 남북관계가 경색된 상황이다. 90년대 강진에서도 갑작스런 북한소식에 술렁일 때가 있었다. 1991년 1월 28일 일본 도쿄에서 청취된 북한관영중앙통신에 짤막한 보도하나가 나왔다.

‘28일 남한의 전남 강진군 출신 의료보험회사 직원 강00(29)씨가 월북했다. 강씨가 남한사회는 완전한 미국의 식민지로서 빈부의 격차가 전보다 더 심해지고 있는데 환멸을 느껴 수년 동안 북한으로의 탈출 방법을 모색해 왔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주로 도쿄에서 청취된 북한 중앙통신을 통해 북한내 소식이 외부에 알려질 때다. 국내 언론은 ‘일본 동경에서 청취된 북한관영중앙통신에 따르면’이란 표현을 자주 썼다.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이 1월 29일 중앙통신의 보도를 인용해 강씨의 월북사실을 짧게 보도했다. 강씨는 일본을 경유해 평양으로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강씨의 월북사실은 강진사람들에게 충격이었다. 월북이라면 강원도 사람들의 일 정도로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바로 이웃주민이, 그것도 가족까지 있는 사람이 북한으로 넘어간 것은 예삿일이 아니였다. 정보과 형사들이 강씨가 살던 집을 수색하고 난리가 났다. 그러나 북한관련 책자나 불온유인물 같은 것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강씨는 의료보험조합에 다니면서 보험료를 수금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전에는 장흥교도소에서 교도관으로 근무했다. 지금은 보험료 수납을 청구서가 나가고 조합원이 은행에 돈을 입금하는 방법이지만 당시에는 각 지역별로 담당 수금사원이 있어서 현금을 주고 받았다.

도박을 좋아하던 강씨가 현금에 손을 댔다. 이래저래 빚이 늘어났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크고 작은 돈을 많이 빌려썼다. 생활도 갈수록 어려워졌다. 월북하기 며칠전에는 신전면사무소에 들려 극빈자에게 나눠주는 쌀을 받아가기도 했다. 그러다가 강씨가 며칠 보이지 않았고, 느닷없이 월북소식이 전해져 온 것이었다. 가족들은 몇 년 후 강진을 떠났다.

1993년 경, 강씨는 홀연 강진사람들 앞에 나타난다. 삐라를 통해서였다. 우연의 일이었다. 신전의 한 주민이 경기도 파주에서 막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작업장에서 삐라를 한 장 주웠다. 삐라에는 강씨의 사진과 함께 월북해서 잘 살고 있다는 내용이 쓰여져 있었다. 화들짝 놀란 신전의 주민이 삐라를 챙겼다. 강씨를 평소에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 주민은 일이 끝나고 강진으로 내려오면서 삐라를 마을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신전면사무소에 근무중이던 양학승 현 부면장도 그것을 구경했다. 강씨가 월북하기 며칠전 집에 쌀이 없다고 찾아왔을 때 쌀을 준 담당자였다.

양 부면장은 “그 때 강씨가 찾아왔을 때 이젠 정신 좀 차리고 살라고 웃으면서 한마디 한 것 같다”고 회고했다. 양 부면장은 삐라를 도암지서에 신고했다. 강씨는 강진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졌다. 가족들은 강진을 떠났다. 그런데 월북한지 9년을 앞두고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목소리를 통해서였다.

1999년 5월 30일 강씨가 평양방송에 출연했다. 이 방송은 국가정보기관이 수신해 공개됐다. 평양방송에 등장한 강씨는 자신의 고향이 전남 강진군이라고 밝히고 ‘의거’ 전 강진군 의료보험조합에서 근무했다고 또박또박 말했다. 이날 방송은 강씨의 육성으로 진행됐다. 그는 현재 북한에서 “농촌경리부문 일꾼(간부)으로 일하고 있다”고 자신의 근황을 소개했다.

그는 그러나 직책과 북한생활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그후로 15년 이상이 지났다. 강씨는 지금 북한에서 잘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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