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학에 박식했던 선생님… 성균관 통문내려오면 답통 도맡아

신창현 전 작천면유도회장이 한학에 밝았던 군동면 화방마을의 오영제씨에 대해 회고하고 있다.
항상 겸손하고 정직한 성품
마을사 자료 번역작업 큰 도움
주변사람 배려하고 늘 이해하는 마음
꼼꼼한 성품으로 공금관리에 철저
직접 담근 막걸리 맛도 일품

나는 작천면 용정마을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87년을 살아왔다. 90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면서 아직도 봄이 오는 3월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그 분은 바로 군동면 화방마을 출신인 오영제 선생님이다. 나보다 6년 선배였기 때문에 평소에 “형님”이라고 불렀고 그분의 호를 따서 “설죽(雪竹)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오 선생님이 살아생전에 외가가 용정마을이었던 탓에 군동에 살면서도 작천면을 자주 찾아왔다. 외가에서 해마다 제사가 있을 때면 마을을 찾아와 정성껏 제를 지내고 마을주민들과 교류도 하며 지냈다. 특히 선생님의 부친과 숙부님이 군동에 살고 있음에도 작천면 용정마을의 서당을 찾아와 공부를 할 정도로 작천과는 인연이 깊었다.

이에 어렸을 때부터 자주 뵀던 탓에 그 분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선생님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이 높은 한학수준을 가졌지만 항상 겸손했고 인자했다는 사실이다. 나와는 6년의 나이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처럼 대해 달라고 말할 정도로 격식과 체면을 차리지 않는 분이었다. 친구처럼 말을 높이지 말라는 요청에도 차마 말을 놓지 못하고 항상 “형님”이라고 불러 핀잔을 듣기도 했다.

또 마을사를 번역작업을 할 때 어려운 한자때문에 해석의 어려움을 겪었다. 이 때 한학에 지식이 많았던 오 선생님에게 자문을 구해 도움을 받기도 했다. 당시 오 선생님은 성균관 통문이 내려오면 항상 답통을 도맡을 정도로 한학에 밝은 분이셨다. 성균관 통문이란 일종의 공문으로 성균관에서 정기적으로 내려오는 서류였는데, 이에 답장을 하는게 답통이였다. 몽땅 한문이었으므로 보통 실력이 아니면 답통이 어려울때가 많았다.

오영제씨
청년시절부터 친분이 있었고 나 자신도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오 선생님을 아직까지도 가끔 생각날 정도로 깊은 인상을 받게 된데는 그 분의 겸손함과 정직함 때문이었다. 오 선생님은 일제시대에 철도청에 근무했으며 모두가 하루에 3끼 밥 먹는 것도 쉽지 않을 정도로 가난했던 시절에 상당히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사회‧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지위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남들 앞에서 자랑을 하거나 나서는 법이 없었다. 해방직후 철도청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군동초등학교와 군동면사무소에서 근무를 했다. 면사무소에서 근무할 당시 면장을 맡아달라는 권유도 있었지만 사양하고 군청으로 자리를 옮겨 공직생활을 하다가 박정희에 의해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후 공직생활을 그만두고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또 강진향교와 수성당에서도 전교와 당장을 맡아달라는 권유도 있었지만 모두 사양하고 평범한 회원으로서 맡은 임무에 충실했다. 이런 점만 보더라도 항상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고 이해할 줄 아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오 선생님은 꼼꼼하고 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수성당 회원과 강진향교 장의로 활동했지만 공금을 관리하는 자리를 맡아 허투루 돈을 쓰는 법이 없었다. 일부 회원들로부터 볼멘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20대부터 그 분을 겪어오면서 성품을 알게 됐고 더욱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평소에 나에게 ‘아호인계호 자안부역안’이란 말을 자주 하셨다. 이 말은 ‘내가 좋아야 남도 좋고 아들이 편안해야 부모도 또한 편안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평범한 말이지만 세상의 진리가 담겨있다며 나에게 자주 말씀하셨다. 이 말을 듣고 나서야 오 선생님의 겸손함과 남들 앞에서 나서지 않는 성품이 이해가 됐고 더욱 우러러보며 존경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됐다.

그 분을 만나면 내가 술을 마시지 못해 항상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소주, 맥주, 막걸리를 가리지 않고 좋아하셨고 특히 막걸리를 좋아하셨다. 막걸리는 주조장에서 사먹는게 아니라 집에서 직접 담근 막걸리만을 드셨다.

그 분의 처남이 여수수산센터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매년 정기적으로 다양한 종류의 생선을 박스에 담아 한가득 보내주곤 했다. 육고기보다는 생선을 즐겨드셨고 생선도 마을주민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기도 했다.

또 사람들을 만나고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셔서 지인들을 군동 화방마을에 있는 자택에도 자주 초청했다. 이 때 주로 직접 담근 막걸리를 대접하는 경우가 많았다. 비록 김치밖에 없는 안주였지만 사모님이 직접 담근 막걸리의 맛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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