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어려운 사람돕고 지역과 교육 발전위해 헌신‘귀감’

재산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가족밖에 모르는 경우 많지만
항상 어려운 사람들과 강진의 발전을 생각하는 모습

김한식 강진향교 전교가 강진읍 목리의 천석꾼이었던 유재의씨에 대해 회고하고 있다.
나는 대구면 사당리 당전마을에서 태어났다. 내가 17살이 되던 해에 강진읍 목리로 이사와 오늘 날까지 70년동안 살고 있다. 현재 강진향교 전교를 맡고 있으며 강진군노인회장,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 사무국장, 강진라이온스 회장 등 다양한 직책을 맡아 활동해왔다. 내가 지역발전을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주셨던 강진읍 목리 유재의 사장님을 나는 늘 잊을 수 없다.

우리세대는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가난을 몸으로 겪은 세대였다. 당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어려웠지만 나 역시도 집안형편이 어려워 밥 3끼 먹는 것이 어려울 정도였다. 17살 때 강진읍으로 이사를 왔지만 집안에 먹을 것이 없을 때는 나무껍질을 벗겨 먹었다. 이렇게 가난했던 나에게 한줌의 빛이 찾아온 것은 22살 되던 해였다. 당시에 강진읍 목리에서 천석꾼으로 소문난 유재의 사장님과 알고 지냈던 친척의 소개로 목재 제재소에서 사무원으로 일을 하게 된 것이었다.

가난함에 찌들어 살았던 나에게 제재소에 취업한 것은 생명줄과 같이 기쁜 일이었다. 바로 그곳에서 유재의 사장님을 처음 만났다. 내가 22살 때 유 사장님은 60대 중반이었기 때문에 40살 이상 나이 차가 나는 상황이었다. 나와 먼 친척관계가 되긴 했지만 평소에는 만날 기회가 없었고 제재소에 취업하면서 처음 그 분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 분의 첫 인상은 정갈한 한복을 입고 있어서 기품있는 모습이었고 강진에서 손꼽을 만큼 부자였지만 거만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어 존경심이 우러나왔던 기억이 난다. 유 사장님과 나는 친척관계였기 때문에 평소에는 “아재” “아저씨”라고 불렀다. 사장과 직원의 관계였지만 그 분은 직원들 한명, 한명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다. 항상 만나는 사람들을 모두 존중하고 하나의 인격체로 대해주는 모습을 옆에서 보고 나이를 떠나 정말 존경할 만한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됐다.

또 그 분은 강진읍 목리에서 정미소, 목재 제재소, 주물공장 등 여러개의 사업체를 운영하며 강진의 부자로 유명한 김충식 선생과 함께 강진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다. 많은 재산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과 가족들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분은 항상 어려운 사람들과 강진의 발전을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특히 후배들을 교육시키는 학교에 관심이 많았다. 1937년 강진농고가 설립될 당시 김충식 선생과 함께 유 사장님은 지금의 작천 까치내재에 있는 산 21만8천340평을 기증해 학교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강진농고·세무서 설립위해 사재털고
늘 어려운 사람위해 베푸는 모습
항상 겸손하고 교육발전 위해 노력

유재의 선생
또 1934년 강진세무서를 유치할 당시 김충식, 차종채, 김안식씨와 함께 유치전에 적극 참여하며 세무서 유치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유 사장님과 김충식, 차종채, 김안식씨는 당시 도지사와 면담을 통해 강진에서 땅을 기증해 장흥으로 가기로 확정됐던 세무서가 강진으로 올 수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유 사장님은 현재 성요셉여고의 전신인 금릉중학교의 기성회장을 맡아 모금활동을 펼치며 지역의 젊은 인재들이 걱정없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왔다.

강진군과 지역의 교육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항상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고 나도 성공하게 되면 유 사장님과 같이 지역발전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안타까운 사고도 있었다. 내가 제재소에서 근무한 지 5~6년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내가 20대 후반이었는데 당시에 서울대를 다니며 집안의 기둥으로 여겨졌던 유 사장님의 차남이었던 유우종씨가 방학을 맞아 강진에 내려왔다가 아버지가 운영하는 제재소 들렀다.

일을 돕다가 발이 미끄러지면서 목재를 자르기 위해 회전하는 둥근 톱에 발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발바닥의 절반만 절단돼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현재 중앙의원 자리에 있었던 창재병원으로 급히 옮겼다. 당시 의료기술로 접합이 불가능해 안타까움을 더했던 기억이 난다. 이 때 아들의 사고로 충격을 받은 유 사장님이 제재소를 비롯한 사업을 모두 정리하고 직원들도 퇴직을 하게 됐다.

유 사장님은 직원들이 일자리를 잃어버린 것을 안타까워했고 나도 그 분의 소개로 강진농고 서무과에 다시 취직을 할 수 있었다. 강진농고에서 근무를 하면서 첫 월급으로 8천원을 받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 때부터 교육공무원 생활을 시작해 35년동안 근무하고 56세 되던 해에 장흥여고에서 퇴임했다. 퇴임이후에는 유 사장님이 했던 것처럼 지역발전을 위해 다양한 봉사단체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90살이 다되어가는 나이에도 여전히 유재의 사장님이 말하고 실천했던 자신보다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지역발전을 위해 자신의 사재까지 털어가며 노력하는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유 사장님이 했던 정신과 가르침을 지역의 젊은 후배들이 항상 기억하고 실천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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