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일제 철로노선 조사때 강진포함

‘남철제이기선 손진기성회’결성 철도유치운동

일제강점기인 1923년 11월, 조선총독부는 남해안지역에 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총독부소속 철도공무과장을 필두로 철도선로 조사를 시작한다. 일행들은 경성을 출발해 배를 타고 마산에 도착한 다음 남해안 일대를 차근차근 돌았다.

이들은 마산에서 시작해 진주, 하동, 순천, 벌교, 보성까지 온 다음 화순의 능주로 올라가 화순까지 둘러봤다. 조사단은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보성에서부터 장흥, 수문포, 강진, 영산포, 용당, 목포까지 잇는 지역을 조사하고 총독부로 복귀했다. 당시 동아일보 1923년 12월 2일자 기사에는 이들이 11월 25일부터 12월 13일까지 한달여 동안 선로조사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이 순천~보성~강진~목포로 이어지는 철도의 구상이 시작된 첫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록을 보면 일제는 이미 1923년경에 순천~보성~장흥~강진~목포 철도를 구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의 대자본으로 설립된 남조선철도주식회사는 1928년 자신들이 이미 건설한 여수신항과 내륙거점인 광주를 연결하는 철도 노선 광주∼여수선 신설공사를 시작했다.

여수~순천~보성~능주~화순~광주에 이르는 160㎞의 철도였다. 이 철도의 이름은 남철선이였다. 남철선은 기공한지 1년 10개월만에 완공된 초스피드 공사였다. 당시 신문에는 이처럼 빠른 준공이유에 대해 시공회사인 남철회사의 풍부한 자본금과 일본의 손꼽히는 재벌인 근진사장이란 사람이 자금을 지속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공사현장에는 중국인들이 투입된 기록도 보인다. 당시 기차는 시속 50㎞ 정도의 속력으로 달렸다. 순천에서 보성까지 52㎞인데, 이곳을 달리는 시간이 두 시간이 조금 못걸렸다고 한다. 지금으로서는 느린 속도지만 당시에는 엄청난 속도였다.

1945년 철도설계, 작천 지선설치 계획도
2003년 사업재개했으나 2007년 사업중단
2015년 역사적 사업재개 주민들 큰 기대
“2020년까지 차질 없이 완공되길…”

1930년 남철선 개통 당시 보성에서 장흥~강진을 잇는 철도를 건설하겠다는 일제의 계획은 확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1년 5월 동아일보는 ‘남철연선 100마일’이란 기획기사를 8회나 연재한 적이 있는데 그때 보성역을 지나며 ‘남조선철도주식회사가 계획한 장흥, 강진선의 분기점이 보성역에서 부터라고 하니 보성도 앞으로 세갈레로 철로가 놓일 곳이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후 보성~장흥~강진으로 이어지는 남철이기선(南鐵二期線)사업은 지지부진하게 된다. 아마도 일제는 보성~장흥~강진~목포를 잇는 철도건설이 경제성이 떨어진다고 분석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남부 지역에서 일본으로 쌀을 유출하기 위해서는 배편이 더 편리하다고 봐서 이 철로에 예산을 투입하는 것을 꺼려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목적 달성까지 맹렬히 운동하자’

그러나 여수~보성~광주 철도 개설이후 개벽천지하고 있는 상황을 보며 강진, 장흥, 영산포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보성으로 연결하는 철도를 빨리 개설해 달라는 것이였다. 1935년 7월 31일 강진과 목포, 해남, 영산포 지역 인사 60여명이 장흥공회당에 모여 오랜시간 협의한 끝에 ‘남철제이기선 손진기성회’를 조직하고 ‘목적을 달성하기 까지 맹렬히 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속진기성회라 하면 오늘날 표현으로 조기추진위원회 정도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보성~장흥~강진~목포 철도가 ‘남조선 일류산업지대의 다년의 현안’이라며 조속한 착공을 주장했다.

하지만 강진을 잇는 철도사업은 계속 지지부진 했다. 아마도 일제는 보성~장흥~강진~목포를 잇는 철도건설이 경제성이 떨어진다고 분석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남부 지역에서 일본으로 쌀을 유출하기 위해서는 배편이 더 편리하다고 봐서 이 철로에 예산을 투입하는 것을 꺼려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후로 해방되기까지 일제가 남철이기선 사업을 어떻게 추진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일부 주민들의 구전에 의하면 해방직전에 이 사업이 추진됐다는 설이 많다. 일제가 1945년경 보성~강진~목포 철도를 설계하면서 작천의 부흥리 뒷산에 있는 광산에서 석탄을 실어가기 위해 철도로 연결되는 인입철도를 설치하기 위해 측량까지 했다는 구전도 있다. 그 계획은 해방과 함께 중단됐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 주민들 사이에서는 역설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해방이 조금 더 늦게 됐더라면 강진에 진즉 철도가 지나갔을 것”이라고 말하는 주민들도 있다.

□ 2003년 재개, 2007년 전면 중단

보성~장흥~강진~목포 임성리 철도사업은 해방후 오랫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역사의 무대로 돌아온게 2003년이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이였다. 기본설계가 이미 마무리됐고 교통환경영향평가 등을 거쳐 2003년말부터 장흥 장동쪽에서 공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2004년 초에는 강진군민회관에서 철도가 통과하는 강진읍, 군동, 도암 전 주민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개최했다. 완공 시기는 2012년 말이였다.

그러나 2007년 이 사업이 정부의 투자속도조절사업으로 분류되면서 매년 100억원 정도씩 지원되던 공사비가 2008년 예산부터 7억으로 급감했다. 7억원의 예산은 공사진행은 하지 못하고 현장 관리 정도를 할 수 있는 돈이였다.

이에따라 1공구인 보성~장흥 장동 구간의 경우 2003년말부터 토지보상이 이뤄지고 부분적으로 공사가 진행됐으나 2008년초부터 공사가 전면 중단됐다. 감리회사만 남겨두고 시공회사도 현장에서 철수했다. 당시까지 투입된 예산은 약 660억원으로 대부분 토지를 매입하는데 사용됐다. 당시까지 공정률은 16%. 1공구의 경우 장흥 북교터널와 장동터널 등 2개 터널에 대해 착공했으나 북교터널은 고작 600m, 장동터널은 1km 정도를 굴착하고 공사가 중단됐다.

이낙연 도지사는 지난 12일 해남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착공식에서 “남해안철도 건설이 오랜 세월을 허송한 만큼 이제부터라도 속도를 내 2020년까지 차질 없이 완공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많은 주민들의 똑같은 바램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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