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5월~1934년 4월 문단에 시 12편 발표

1934년 분가, 강진읍사무소 취직해 직장생활
경제적 어려움 큰 짐… 전업작가 되지 못해
경제력 바탕 왕성한 활동한 영랑과 큰 대비

동해의 어느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제일 윗쪽이 현구이고, 앞쪽 흰 수건을 두른 이가 영랑이다. 옛날에는 관광지에 가면 이렇게 특정 무대에 올라가서 사진을 찍는게 유행이었다. <사진=현구 김현구 전집>
그럼 현구는 강진에서 살면서 어떻게 서울에서 발행되는 ‘시문학2호’에 4편의 시를 발표하게 됐을까. 두가지 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현구선생이 시문학 1호를 보고서 자발적인 투고를 해서 게재됐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시문학 창간을 주도했던 영랑선생의 추천으로 이뤄졌다는 시각이 있다.

시문학 2호의 편집후기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원고를 보내주신 분들은 많지만 시라는 형식이 가장 쓰기 쉬운 것이니 써 본다는 태도에 가까운 것은 서운일 일이었습니다. 이번에 현구씨의 작품을 처음 실게된 것은 대단한 깃븜으로 녁입니다’

시문학 2호 478페이지 편집후기에 나온 글이다. 이 편집후기의 전체적인 맥락은 시문학 1호가 나간 후 원고를 보내준 사람들이 많았으나 시의 형식 조차 갖추지 못한 것들이 많았고, 이와달리 현구의 시는 대단히 좋아서 이를 싣게된 것을 큰 기쁨으로 생각한 것이다. 현구의 시가 처음 시문학 2호에 실린 것은 현구가 독자적으로 투고를 해서 이뤘다고 말하는 사람(유윤식의 논문등)들은 바로 이 편집후기를 근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김선태 교수는 그의 논문 ‘현구시 연구’등을 통해 그런 주장은 여러 가지 미흡한 부분이 없지 않다고 한다. 대신 그는 일차적으로 영랑의 천거에 의한 가능성이 더 짙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서 김선태교수는 영랑과 현구는 같은 강진출신으로 오래 전부터 강진에서 ‘청구’란 동인생활을 하면서 서로 문학적 교감이 많았고, 현구 또한 시문학이 창간되기 이전부터 편집방향등을 영랑을 통해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제시했다.
 
또 시문학지의 편집주간을 맡은 용아가 시문학이 창간되기 이전부터 영랑을 만나기 위해 수시로 강진을 오갔던 것을 감안할 때 이미 세 사람은 서로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추측케 한다는 것이다. 이에따라 현구에 대한 원고청탁은 영랑을 통해 이뤄졌으며, 편집주간으로서의 용아가 현구의 작품에 높은 신뢰감을 가지고 게재를 결정했을 것이라고 김교수는 설명했다.<김선태 논문 43페이지 참조>

아무튼 현구는 시문학2호에 ‘님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렀습니다’를 비롯해 4편의 시를 발표한 후 왕성한 시작활동을 개시한다. 1931년 10월에 발간된 시문학3호에 ‘풀우에 누워’를, 31년 11월에 발간된 ‘문학’ 창간호에 ‘내 마음 사는 곧’등 모두 12편을 잇따라 문학지에 게재했다. 1930년 5월 시문학2호를 시작으로 1934년 4월 문학호지까지 거의 4년 동안에 이뤄진 일이였다. 이들 잡지는 모두 영랑과 가까웠던 용아 박용철 시인이 주재한 것들이였다.

그 와중에 현구선생은 1934년 강진읍 서성리 179번지 생가에서 100여m 떨어진 서성리 214번지로 분가한다. 2녀 금희씨가 태어난 다음해였다. 이 시기에 현구선생은 강진읍사무소에 들어가 공무원생활을 시작한다. 2녀가 태어나고 분가를 했으며, 새로운 직장을 가졌던 것이다. 이때 현구의 나이가 30세였다. 지금으로서는 많은 나이가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새 직장을 가진 나이로는 대단히 많은 나이였다고 할 수 있다.
 
현구선생은 직장을 가지고 경제적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어려운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영랑 선생이 풍부한 재력을 바탕으로 자유로운 시작활동을 하던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다. 그는 전업작가로서 하룻네 시만 쓰고 살기에는 너무나 많은 짐을 지고 살았던 것이다. 고독을 즐겼다는 그의 삶의 방식도 이런 주변 환경과 적지 않은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1934년 4월 ‘문학3호’에 ‘산 비둘기 같은’을 발표한 후 현구선생의 시단활동은 완전히 끝을 맺게 된다. 이때까지 현구선생이 문단에 발표한 시는 모두 12편이였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문단에 시를 발표하지 않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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