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군 본영 강진 사람들이 큰 지원… 전란 극복 강진이 중요한 역할”

임진왜란 역사 난중일기에 지나치게 의존
김억추장군등 호남사람들 활약상 많이 묻혀
전남중심의 임진왜란 투쟁사 다시써야

정유재란과 호남, 그리고 강진
하태규(전북대학교 교수)

임진왜란기 호남은 적의 침략을 막아내고 지켜냄으로서 풍신수길의 조선 정복야욕을 꺾어버리고 조선을 구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전세가 불리해진 일본은 명과의 강화교섭을 통하여 조선의 남부 4도의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강화교섭이 실패로 돌아가자, 풍신수길은 정유재란을 일으켜 전라도를 빠짐없이 점령하고 나아가 조선의 충청도 경기도로 북상하고자 하였다.

재침 이후 경상도 지방에서 소극적인 활동을 보이던 왜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무너진 이후 12만 여 명을 동원하여 전라도를 향하여 공격해 왔다. 왜군의 육군 49,600명은 수군 7천 2백명과 합세하여 8월 16일 남원을 점령하고 8월 19일 전주로 들어왔고, 우군 64300명은 초계를 거쳐 황석산성의 조선군을 무너뜨리고 육십령을 넘어 전주로 들어와 좌군과 합세하였다.

전주에서 작전회의를 거친 왜군은 전라도 각지를 점령하기 위하여 병력을 분산하여 남하하기 시작하였으며, 일부 병력은 충청도와 경기를 향해 북상하였다. 그리고 수군은 섬진강을 따라 바다로 나아가 조선수군을 쫓아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통제사에 복직된 이순신은 9월 16일 명량대첩을 거둔 뒤 법성포를 거쳐 선유도로 북상하였고, 이후 왜군이 전라도 남서안 연근해 지역에 상륙하게 되었다. 

전라도 남쪽으로 내려간 소서행장은 9월 1일 순천에 도착하여 전라도 지배와 장기 주둔을 하기 위한 왜교성을 쌓기 시작하였고, 9월 20일 이후 왜군의 육군이 전라도 각 지역에 포진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10월 초순에는 해남, 강진, 영암 일대에도 왜군의 육군이 침공하여 왔다.

전라도를 점령한 왜군은 전라도 각지에서는 살육과 방화 등 만행을 자행하는 한편, 조선 사람들에게 민패을 주는 등의 방법으로 지역 주민을 회유책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이에 왜군의 회유에 넘어가 그들의 앞잡이가 되는 자도 일부 있었지만, 전라도 각 군현에서는 국가적 방어체제에 의하여 지역 장정들이 육군과 수군으로 동원되어 수령과 함께 전투에 참여하고, 향촌에서는 사족들을 중심으로 많은 향보의병이 결성되어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순절하면서 구국활동을 전개하였다.

정유재란기 호남은 왜군의 전면 공격을 받아 전 지역이 유린되는 참상을 겪게 되었고, 강진 지방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강진지방에는 명량전투를 전후로 바다를 통하여 먼저 왜군이 들어오고, 이어서 과도승무가 이끄는 왜군의 육군이 해남과 영암등지를 거쳐  10월 초순경에 침입하였다. 이에 따라 강진 지역의 주민들도 왜군의 무차별적 살육과 노략질에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일부 주민 중에는 왜군에 붙어서 앞잡이 노릇을 하는 자들도 어느 정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왜군이 강진에 침입하자, 대부분의 유력 사족들은 의병을 모아 왜군에 대항하여 사투를 전개하였다. 파주 염씨 일문의 인사들이 중심이 된 구강포전투, 안동김씨 김흥업의 남당포전투, 전몽성 김덕란을 중심으로 한 지역인사들의 밤재전투, 윤륜, 윤신 등 해남윤씨를 중심으로 한 병치전투, 경주 김씨 김응원의 도고동 전투 등이 정유재란기 강진지역 의병활동의 대표적 사례이다.

조명 연합군의 반격에 몰린 왜군은 1597년 11월 이후 대부분 순천 방면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영암, 강진, 해남 일대에 들어온 왜군도 각지에서 철수하여 순천쪽으로 이동하였다. 왜군이 철수한 강진 지역은 전라우수영 관할의 수군에 편입되어 군사와 물자를 조달하는 부담을 지며 고통을 받기도 하였다.

여기에 1598년 2월 26일 이순신이 강진의 고금도로 진영을 옮겨 전함을 건조하고 병력을 모으며 수군을 증강하였다. 이로서 고금도는 정유재란이 끝날때까지 조선 수군의 통제영이 설치되어 조선 수군의 기지가 되었다. 이순신이 고금도에 통제영을 설치한 5개월 뒤인 1598년 7월 16일에는 명의 수군을 거느린 진린이 사로병진작전을 앞에 두고 고금도에 도착하여 이순신과 합류함으로써, 이후 고금도는 조명연합군의 사로병진을 위한 수로군의 본영이 되었다.

이 때문에 조명 연합수군의 본영이 된 고금도와 인근 도서지역은 물론, 강진 지역의 주민들의 부담과 고통이 크게 가중되었으리라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특히 이순신의 조선 수군의 강화 노력에 따라 강진 지역의 주민들이 수군에 충원되고 물력이 징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금도에 본영을 둔 수군은 이후 수차에 걸쳐 고금도 인근 지역에 쳐들어온 일본 수군을 물리쳤으며, 특히, 무술년 9월부터 전개된 조명 연합군의 4로 병진에 따른 왜교성 공격에 참전하여 왜군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다. 그리고 이어진 노량해전에서 왜군의 수군을 완전히 격파함으로써 7년의 전란을 끝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유재란기 호남지방이 왜군에게 점령당하는 과정에서 강진 지방도 왜군에게 점령되는 수난을 당하였다. 그러나, 지역의 사족들을 중심으로 한 의병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왜군에 많은 손실을 입혔을 뿐만 아니라, 왜군의 강진에서 철수한 후 조선과 명의 수군이 고금도에 주둔하여 이곳을 본영으로 삼아 왜군을 격퇴하는 활동을 하였다는 점에서 강진이 전란을 극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전라우수사 김억추와 명량해전 : 기록과 전투에 대한 새로운 접근
김덕진(광주교대 교수)

金億秋(1548~1618)는 1606년에 宣武原1등에 올랐다. 전라 우수사로써 1597년에 있었던 명량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대첩 직후 전투의 최고 지휘관인 3도수군통제사 李舜臣은 본인과 김억추가 전선 13척으로 적 전선 130척과 싸워 31척을 깨뜨렸다고 조정에 啓聞(지방장관이 임금에 올리는 공문서)으로 급히 보고하였고, 이를 접한 조정은 사실을 확인한 후 그대로 明軍 지휘부에 咨文(외교문서)으로 보냈다.

김억추의 이런 공로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이 쓴 「亂中日記」에는 김억추에 대한 평가가 상반되게 서술되어 있고, 그것을 후대 연구자들은 별다른 검증 없이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실정인데, 그것은 영화 「명량」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데, 그것은 다음의 두 가지 이유에서 발생한 결과일 것이다.

첫째는 자기 중심성이 강한 일기의 속성 때문에 비롯되었을 것이다. 자기 약점을 숨기고 장점을 내세운다거나, 친한 인물을 추겨 세우고 싫은 인물을 깍아 내리는 등의 서술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더욱이나 임란(1592년) 직전에 터진 동서분당(1575년)과 기축옥사(1589년) 및 건저의(1591) 등으로 인한 당쟁은 당대인으로 하여금 합심일체로 전란에 임할 수 없게 만들었고 더더욱 공정한 기록을 가로 막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 동인계는 관군에 대거 투신하였고 반면에 서인계는 의병 활동을 주도하여 따로따로 전란에 임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동인 추천을 받은 이순신은 서인 추천을 받은 원균을 몹시 미워했다. 「난중일기」 곳곳에 ‘형편없는 짓’, ‘흉계가 우습다’, ‘참으로 음흉하다’ 등의 기록을 남겼다. 사실의 여부를 떠나 국란에 처한 상황에서 같은 장수로써 ‘극단적’이며 ‘분파적’인 표현을 구사하였음에 분명하다. 그래서 최근에 일기를 교감 완역한 노승석은 “(「난중일기」는) 개인적이고 가족적인 내용을 위주로 적은 것이다.

특히 상관과 동료에 대한 불만과 감정을 직접적으로 토로한 내용들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이순신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 해 준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그것을 무조건 배척해서는 안되고 잘 헤아려 읽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둘째는 당시는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생성된 기록은 자기가 본 것 중심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남의 것을 보고 추가하거나 보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임진왜란 관련 자료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전투에 참여한 당사자들이 일기나 장계 형태로 남긴 기록이 있다. 또 하나는 주변에서 전투를 관망한 사람들이 남긴 것이 있는데, 이는 기록이나 구전의 형태로 남아 있다. 어느 것이건 간에 전투 상황 모두를 남길 수는 없고, 자신이 보거나 들은 것만 담아낼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목적의식이 들어 있을 수 있다. 임란 주요 전투 가운데 하나인 鳴梁海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우선 최고 지휘관인 이순신이 남긴 「난중일기」가 있다. 그런가 하면 당시 높은 산봉우리에 올라가 전투를 관망하였던 많은 사람들이나 해상에 떠있던 1백여 척의 피란선에 타 있던 사람들이 보고 들은 것도 있다. 이 중에서 「난중일기」에 대한 의존도가 절대적인데, 그런 상황에서는 일기에 기록된 그 자체가 역사 전체일 수밖에 없다.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니, 그런 점에도 다른 자료에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黨色이 사실을 기록하는 데에 적지 않게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고, 새로운 기록의 발굴과 기존 기록의 재해석이 요구됨도 알 수 있다. 필자는 이런 점에 주목하여 본 논문을 작성하였는데, 먼저 유학을 공부하다 무과에 급제하여 수군 장수로 무인의 길을 걸은 김억추의 생애를 알아보겠다.

이어 일기를 쓴 당사자 이순신과 일기에 부정적으로 표현된 김응남⋅김억추 3인의 정치적 관계를 알아보겠다. 마지막으로 김억추가 전라 우수사에 임명되어 이순신과 함께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과정에 대해 알아보겠다. 의도한 대로 연구되면, 「난중일기」의 자료적 한계와 그 극복방안이 드러날 것이고 명량해전 전투에 대한 새로운 접근도 가능해질 것이다.

강진출신 임난의병과 선양활동
권수용(조선대학교 한국학자료센타 전임연구원)

임진왜란은 실로 우리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국제 정세를 통째로 뒤흔든 사건이었다. 네 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결국 정권을 장악한 사림세력은 동서로 분당되어 정치적 대립의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대외정세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이런 와중에 치밀한 전쟁 계획을 세우고 침략한 왜적에게 조선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끝내 국가 사직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의병활동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정유재란은 호남을 쑥대밭으로 만들기를 작정했던 전쟁이니만큼 호남의병의 활약은 국가의 존부를 판가름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의 호남의병은 아직까지도 그 전모가 다 밝혀졌다고 할 수 없으니, 현재 발굴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의병활동에 있어서 관군을 제외하기도 하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당시에는 정규군의 기능을 가진 관군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할 때 관병이나 의병의 소속을 따진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다. 때문에 본고에서는 관병과 재야 의병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의병으로 칭한다.

임진왜란(정유재란 포함) 때 강진 출신으로써 의병활동에 참여한 인물에 대해서 일괄적으로 기록한 책자는 『호남절의록』(1799),  「금릉창의록」(『양건당문집』,1896), 『강진군지』(1923), 『호남절의록』(1964), 『강진군지』(1967)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위 기록에 들어 있는 강진 인물은 80여명이 되며, 5개 책자에 모두 이름이 올라 있는 경우는 10명이다.

한편 임난의병에 대한 국가에서의 포상은 전쟁이 끝나고 조금 지난 1605년에 일괄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공신도감에서 발행한 선무원종공신 녹권과 호성원종공신 녹권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들어있는 강진인물은 40명이 넘는다. 이외에도 전쟁이 끝난 후 많은 사람이 순절한 격전지에는 사당을 세워 그 넋을 기렸는데, 진주 창열사, 남원 충열사, 금산 종용사 등이 대표적이다. 각 해당지역에서는 유림들과 후손들이 서원·사우를 세워서 선조를 배향하고 동시에 후학과 후손들을 결집하고 향촌에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였다.

강진지역의 임난의병을 조사하다보니 상당히 많은 수의 의병이 확인되었다. 5개의 책자에 올라있는 인물이 80여명이고, 그 뒤로 더 밝혀진 인물도 상당 수 되어서 실제 인물은 훨씬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400년이 훨씬 지났지만 아직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사람이 많이 있다는 의미이다. 특히 정유재란 때 호남이 입은 피해는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던 것을 생각할 때 앞으로도 밝혀야할 인물이 많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과거의 역사가 그저 지나간 일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 그 숭고한 정신과 행동을 오늘도 되새기고 내일도 되새겨야 할 것이다.

『금릉창의록(金陵倡義錄)』의 발간과 그 의의
김만호(전남대학교 강사)

황대중의 문집 『兩蹇堂集』에 실린 「격왜일기」에는 소위 ‘金陵倡義’의 대체적인 경위가 밝혀져 있는데, 순창군수(淳昌郡守) 김억추(金億秋)는 공(公, 황대중)과 윤현(尹俔), 이준(李浚)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강진(康津)은 곧 연해(沿海)의 인후(咽喉)이다. 급히 창의하여 군사를 모아 성산(城山)에 결진(結陣)하여 일본군이 오는 길목을 막아라!”라고 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강진 지역의 ‘금릉창의’는 김억추가 황대중, 윤현, 이준에게 강진이 전략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성산에서 결진하여 일본군의 침략을 막으라고 하였던 것이다. 참고로, 성산은 지금의 병치(兵峙)로 해남군 옥천면 성산리와 강진군 도암면 지석리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금릉창의록」에 김억추가 “傳檄文”이라는 정확한 활동 내역을 적고 있다. 또 황대중도 “總務兼書記”라고 하여, 김억추의 발의를 통해 강진 지역에서의 창의과정에서 총무 겸 서기 역할을 했던 사실을 확실하게 써 두었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볼 때, 「금릉창의록」 작성 시에 김억추가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작지 않았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이처럼, 현재 「금릉창의록」을 수록한 문집을 작성한 인물들, 「창의록」에 실린 인물들의 비중을 살펴볼 때 김응정, 김억추, 조팽년 등이 주도하여 작성한 것은 아닌가 한다. 특정한 사람이 초본을 작성하여 그것이 차례차례 다른 인물들에게 전달된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38명은 4종의 문집에 동일하게 실려 있고, 기록의 상당수가 유사하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몇 명이 모여서 「창의록」의 초안을 작성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그것이 당대 혹은 문집 작성 시기에 약간의 편집을 거쳤던 것 같다. 수록한 인물을 추가 혹은 삭제한다든가, 아니면 수록 순서를 바꾼다든지, 내용을 추가한다든지 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서 현재에 남겨진 결과물을 낳았던 것 같다.

우선 「창의록」은 김응정, 김억추, 조팽년이 주도하여 발간된 것 같다. 김응정은 임진왜란 당시에 강진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원로 급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김억추는 임란 당시에 순창현감이었는데, 강진의 황대중에게 연락을 취하여 금릉 창의가 가능하도록 했다. 또한 「창의록」 수록 인물 39명 중 1/3에 해당하는 13명이 김억추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다. 조팽년은 곽기수와 함께 강진 지역에서 과거시험에 합격한 몇 안되는 인물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했으며, 김억추와도 관련되어 있고 김응정과도 교유한 인물이다.

발간 시점은 선조 39년(1606) 이후로 추정해 보았다. 이준(李浚)의 과거합격 시점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또한 「창의록」이 담고 있는 내용은 이남과 이억복의 사례를 볼 때, 반드시 임진왜란 관련 인물에 한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임진왜란 때 창의한 인물들을 정리하면서, 그 이전에 강진 지역에서 본받을만한 충절인물을 찾아 함께 기록하였던 것 같다.

수록 인물의 출신지를 분석한 결과 「금릉창의록」에 수록된 39명 중 강진 출신 인물은 25명으로 전체의 64%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강진 다음으로는 장흥, 나주, 영암 지역이 많고, 해남과 무안이 그 다음이었다. 타지역 인물들이 36%나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창의록」이 강진 지역 인물들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강진 지역에서 창의할 때 도움을 주었거나 관련된 인물들까지 포함시킨 자료라는 것이다. 강진에 인접한 영암, 해남 지역의 인물을 포함한다면 전체의 87%에 해당하는 점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활동 내용을 보면, 다른 기록에서는 보이지 않는 내용들이 확인되었다. 즉,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강진 지역이 창의와 관련된 실상이 드러나 있다는 점이다. 김억추가 격문을 전달해 주었다든지, 김천일의 종사관이었던 나주의 임환(林懽)도 격문을 전했다든지, 임계영을 도왔던 문영개도 격문을 전달했다든지 하는 것이다. 즉, 금릉창의는 여러 계열의 의병 집단에서 격문이 전달되어 강진 내부에서도 그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해 나갔다는 점이다. 또한 김응정, 이준, 정명세, 박대기, 정언우, 이지득 등은 강진 지역에서 병량미와 의병을 모으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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