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3월 땅 5만평 기증 ‘강진농교’ 설립

1957년 어느날 강진만에 여객선이 운항하던 모습이다. 큰 배가 바다에 있고 작은 배가 부두에서 사람들을 실어나르는 모습이 보인다. 1930년대 중반 동은선생은 목포를 중심으로 강진과 고흥, 완도, 영암 등을 잇는 여객항로를 확보하고 있었다.
학교시설물도 사재로 건립해 강진교육 산실 마련
유재의씨도 산 21만평 기증해 농업학교 근간갖춰

동은선생은 대체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는 엄격했던 반면 명분있는 일에는 아낌없는 기부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은선생과 형제들의 관계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지금도 재산이 많은 집안이 종종 그렇지만 동은선생 집안도 일부 형제들 사이가 그렇게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은선생 바로 아래 동생인 후식씨는 다리를 약간 절었다. 그 이유가 이렇게 전해온다. 후식씨가 형님인 동은선생에게 재산분배 문제로 갈등이 있었다.
 
한번은 후식씨가 권총을 들고 재산을 더 주지 않으면 자살을 하겠다며 형님앞에서 시위를 벌인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방아쇠를 잘못당겨 자신의 다리를 쐈다. 다행히 총탄이 빗나가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훗날 다리를 절둑거리게 됐다고 전해 온다.

동은선생의 장손자인 성균(경기도 부천시 거주)씨에 따르면 할아버지(동은선생)에게 버스값을 달라고 하면 걸어다니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또 강진사람들을 통해 내려오는 일부 부정적인 이미지 또한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고리대금업등을 하면서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던 것과 관련돼 있어 보인다.  

그러나 동은선생은 통큰 기부를 많이 했다. 1945년 6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1억원을 기부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동은선생은 교육사업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동은선생은 1937년 3월 강진읍 교촌리 281번지 36필지 5만평을 내놓는다. 현재 전남생명과학고가 있는 자리다. 동은선생은 이곳에 교실 8개가 있는 본관과 강당이 들어가는 부속건물을 사재로 건축해서 기증해 강진농업학교가 출범할 수 있게 했다.

동아일보 1938년 8월 16일자 보도에 따르면 당시 동은선생은 학교시설을 설치하는데 12만원을 들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강진농고는 동은선생이 학교부지와 건물을 기증한데 이어 두달 후 강진읍 목리 유재의씨가 지금의 작천 까치내재에 있는 산 21만8천340평을 기증해서 명실공히 농업학교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유재의(1894~?)씨는 목리에서 송파정미소를 운영했던 강진의 부호였는데, 기증한 땅은 현재 제2농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1959년 강진농업학교의 모습이다. 뒷쪽으로 보은산 모습이 선명하다.<사진=독자 황민홍씨 제공>

현재 전남생명과학고 교정의 모습이다. 모양은 많이 바뀌었지만 옛 나무들의 정취는 그대로다.
강진농고(현 전남생명과학고)가 보관하고 있는 학교연혁을 보면 당시 학교설립 과정이 동은선생의 재산기부에서부터 개교까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은선생이 땅과 돈을 기부한 것은 1937년 3월이었다. 이어 한달 후인 4월 12일 조선총독부령에 의해 3년제 강진농업학교 인가를 받았고 다시 한달도 안된 5월 5일 첫 입학생을 맞아 들였다.
 
유재의씨는 개교기념식이 열리던 날 21만평의 산을 내놓았다. 동은선생의 재산기부에서 학교설립인가, 개교, 그리고 다시 제3자의 기부를 이끌어 내기까지 세달이 걸리지 않았던 일정이다.

이를 보면 당시 강진지역 유지들이 강진농교 설립을 위해 상당한 사전준비를 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동은선생이 재산을 기부한지 두달만에 유재의 선생이 재산을 헌납한 것에서 알수 있듯이 동은선생뿐 아니라 당시 강진의 부자들이 강진농고설립에 대단한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학교설립인가가 거의 한달만에 나온 것을 보면 조선총독부도 상당한 협조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진지역은 ‘부호들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에 총독부와 관계가 매우 좋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후술하겠지만, 1934년 강진에 세무서가 들어온 것이나 강진읍 승격(1936년 7월)이 다른지역에 비해 매우 빠른 것 등도 김충식씨를 비롯한 강진 부호들의 역할이 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였다고 향토사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김충식선생은 조선총독이 강진의 청자요지를 구경하기 위해 내려오자 지금의 강진읍 남성리 남도목욕탕 인근에 학실(鶴室)이라는 최고급 여관을 새로 지어 잠자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또 당시 조선총독을 대접하기 위해 몇 달전부터 서울에서 궁중요리사를 데려와 음식을 준비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젓갈류와 같은 절인음식은 몇 달전부터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요리사들을 미리 데려왔던 것이다.     

현 전남생명과학고에 설립자, 기증자 흔적 하나도 없어
한때 동은선생 흉상있었으나 그나마 실종
후손들이 기억할 수 있는 상징물 있어야
 

이렇게 해서 탄생한 강진농교는 1937년 5월 55명의 첫 입학생이 들어왔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40년 2월 25일자 동아일보에는 ‘강진농교’의 첫 졸업생 배출소식을 전하고 있다.

‘농업학교 설립이후 첫 졸업생을 내는 강진농업학교 당국도 무던히 기쁘련마는 강진사회로서도 기쁨을 마지 안는다. 강진농교는 특지가 김충식씨의 기부로 설립된바 제반시설이 완비되고 내용이 충실한바 올 봄에 첫 졸업생을 내게 되었다 한다. 졸업생 44명중 상급학교 진학은 18명, 공무원 취직 5명, 금융조합 입사 12명, 만주국 3명, 기타회사 5명들이다’

기사에 따르면 강진농교는 특지가 김충식씨의 기부로 교육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으며, 첫 졸업생을 낸 학교당국도 기쁨으로 가득 찼지만 강진사회 역시 감개무량한 일이였다.

이후 강진농고가 강진지역은 물론 우리나라 서남부지역 교육에 기여한 역사는 화려함 자체였다. 인근 해남이나 영암, 장흥, 완도등지에는 당시 농업학교가 없을 때였기 때문에 전국에서 학생들이 몰려왔다.

제주도에서도 학생들이 왔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전남지역 기관에 강진농고 출신이 없는 곳이 없었다. 모두 김충식씨의 기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역사였다.

이런 역사를 간직한 학교지만 지금 전남생명과학고에서 동은선생의 채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은 한 군데도 없다. 20여년 전까지는 교장실에 동은선생의 흉상이 있었으나 지금은 흉상의 거취를 아는 사람도 없다.

보통 학교 설립자나 거액의 기부자에 대해서는 작은 동판이라도 해서 후세들이 볼수 있게 하는게 관례지만 전남생명과학고는 그런 일을 하지 않고 있다. 21만8천평의 산을 기증한 유재의 선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목장 입구나 건물에 작은 기념비라도 세워 당시 기부자의 이름을 밝혀주는게 학교발전을 위해 좋은일이 될 것으로 보인다. 강진농고는 1950년 9월 30일 강진읍 동성리 김충식 선생의 집과 한날 불살라지는 비운을 겪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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