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읍 얼굴 바꾼 도읍가꾸기사업… 76~79년 집중 추진

읍내 도로 하수도 정비, 공용정류장 새단장 모두 그때 이뤄져
영랑로타리, 다산로타리도 당시 작품, 강진 발전의 큰 틀 마련

70년대 새마을운동이 각 마을을 변화시키는 것이였다면 읍면 소재지의 모습을 바꾼 것은 ‘도읍가꾸기’란 사업이였다. 새마을운동은 1971년부터 5년간 농어촌마을에 집중적 변화를 가져왔지만 새마을운동 정신만으로 되지 않은게 바로 읍면소재지의 일이였다. 단위사업들이 크고, 돈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여서 주민들의 협동심만으로는 접근이 어려웠던 것이다.

이에따라 정부가 ‘완전한 도시도 아니고, 완전한 농어촌도 아닌’ 읍면소재지 개발을 위해 1976년부터 대대적인 도읍가꾸기 사업을 추진했다. 강진의 도읍가꾸기는 치밀한 계획하에 진행됐다. 도로와 도로포장, 환경, 하수도, 시장, 공용정류소, 문화재등을 근본적으로 개선해 읍면소재지의 환경을 바꾸겠다는 것이였다.

도로의 경우 강진읍 중앙로와 순환도로를 연결하는 남북연결도로 3개선과 그 사이를 중간 관통하는 동서횡단로 개설 및 시내와 목리를 연결하는 도로 3개 선을 개설하는 것이였다. 또 5일 시장은 면적을 두배로 늘리고 기존장옥을 철거한 후 상설시장을 신축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또 강진공영정류소(현 버스터미널)의 경우 진입로를 개설하고 정류소시설을 현대화한다는 계획도 포함시켰다. 다산로라든가 강진읍~목리 연결도로등이 모두 이때 개설된 도로들이다.

요즘도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강진버스터미널의 정비사업을 살펴보자. 76년 당시 강진버스터미널은 막대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강진군의 자료를 보면 하루 교통량이 자동차 1,280대에 승객이 4만5천여명에 달했다. 당시 승용차가 많지 않았던 것을 감안할 때 버스터미널을 이용했던 1,280대의 차량은 대부분 버스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007년 신축된 현재의 터미널 모습 건물의 모양이나 주변환경이 많이 바뀌었다.
그런데 이곳의 미관이 형편없었다. 당시 사진을 보면 포장도 되지 않은 허허벌판에 앙상한 철골건물이 황량하게 있는 것을 알수 있다. 건물은 1972년 3월에 신설했으나 주변이 산만하고 모든 자동차가 시내 중앙로를 거쳐서 정류소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정류소 자체도 승강장과 광장이 좁아서 승객과 자동차가 빠져나갈때가 없을 지경이였다.

강진군은 ‘버스정류장은 강진읍의 도읍질서와 상태를 척도 할 수 있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라고 결론짓고 이곳을 정비하는데 혼신을 기울였다. 한마디로 강진의 얼굴인 버스터미널을 말끔하게 단장하겠다는 것이였다.

버스터미널 정비사업은 1976년 4월 20일 시작돼 9월 중순까지 계속됐다. 사무실과 대합실, 화장실, 진입로, 정차장, 휴게실, 보도블럭시설등이 새롭게 정비되거나 신설됐다.

비용은 총 2천1만원 정도가 들어갔는데 이중 군비가 370만원정도가 지원됐고, 나머지는 모두 버스터미널 경영자가 부담한 것이였다고 당시 사업들을 기록한 ‘고동치는 강진-도읍가꾸기-’란 책에 전해져 온다. 지금의 건물은 지난 2007년 새로 지은 것이다.

1977년 들어서는 도읍가꾸기 사업에 다산로타리와 영랑로타리사업이 포함돼 진행된다. 강진의 상징물 처럼 전해져 오던 다산로타리와 영랑로타리도 도읍가꾸기 사업때 만들어 졌던 것이다. 다산로타리는 지금의 강진의료원앞에, 영랑로타리는 강진소방서 앞에 만들어 졌다.

사업 초기에는 이곳은 단순히 조경수와 사철꽃, 잔디를 심은 로타리형 소공원으로 만들어 졌다. 그러다가 로타리를 조성해 놓은지 2년 후인 1979년 들어 해당 로타리에 다산선생과 영랑선생의 동상을 만들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었다. 영랑로타리는 영랑동상과 함께 그대로 존치하고 있으나, 다산로타리는 강진의료원앞 정비 때문에 없어지고 다산선생의 동상은 2009년 호수공원으로 옮겨져 있다.

정채균 전 군수
새마을운동에 이어 1976년부터 본격적인 도읍가꾸기가 진행될때 강진군수를 한 사람이 정채균 군수였다. 정군수는 1976년 1월~1979년 5월까지 3년 4개월동안 21대 강진군수를 했던 사람이다. 보통 관선군수의 임기가 1년이였다고 한다. 다른 사람보다 세배가 넘는 강진군수로 재직했다. 도읍가꾸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총 지휘했다고 할 수 있다.

정채균 군수의 업적을 되돌아 보면 지금 강진군의 큰 그림을 그때 그렸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청자재현사업이라든가 다산유적지 성역화사업, 영랑생가 복원, 마량면소재지 공유수면매립, 강진읍토지구획정리사업, 강진군청 청사설립등이 그때 이뤄진 것이다.

지금 강진의 큰 모습을 보면 그 때 잡혀진 큰 그림이 지금도 큰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병영성 복원 정도가 새로 진행되고 있는 큰 사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강진의 동서쪽 입구에 있던 영랑동상과 다산동상도 정군수때 세웠다. 3.1운동 기념비도 정군수의 작품이다.

장성이 고향인 정군수는 전남도청 서무과장을 하다가 강진군수로 부임했다. 서예에 조예가 깊었던 정군수는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강진에 부임하면서 강진문화의 저력을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문화군수를 자처하기도 했다.

부임후 곧바로 이용희, 조기정, 차부진, 김현장 선생들과 함께 청자재현사업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 첫 작품은 78년 2월에 나왔다. 당시 재현을 시작으로 강진에서 본격적으로 청자의 시대가 열렸다.<청자재현사업과 관련해서는 다음호에 구체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마량면 소재지로 가보자. 정군수가 부임하기전 면소재지 구 도로 앞은 모두 바다였다. 이곳의 공유수면 매립이 모두 정군수의 업적이었다. 공유수면이 매립돼 새로운 땅이 들어서면서 마량면소재지의 남쪽으로 훌쩍 넓어졌다.

지금 횟집거리라든가, 부두, 상가들이 있는 곳이 모두 공유수면 매립후 들어선 시설들이다. 정군수는 또 강진읍의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완성한 사람이였다. 지금 강진읍시장 주변과 다산로일대, 약수탕 주변등이 모두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통해 정비된 지역이다. 그 전에는 무질서하게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강진군이 땅을 모두 매입해서 구획을 정리한 다음 일반인들에게 매각했다. 덕분에 지금의 바둑판 같은 거리가 그 때 들어섰다. 정군수가 가장 아쉬워 했던 것 중의 하나는 강진읍중앙로새마을정비사업이었다. 흔히 이야기하는 소도읍가꾸기 사업이였다. 전국 읍단위에서 처음으로 정군수가 새마을정비사업을 따왔다. 예산 3억원이 내려왔다. 당시에는 큰 돈이였다.

지금의 강진읍 중앙로를 주변의 일제강점기 판자집을 뜯어내고 넓은 2차선도로를 내는 획기적인 사업이였다. 당시에는 강진읍의 주요도로가 중앙로 뿐이였다. 그러나 이 사업은 중앙로에 땅과 건물을 가지고 있는 일부 유지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여러 가지 시도가 있었으나 역부족이였다. 사업이 반납됐고 이 사업은 해남읍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해남읍에 지금 가보면 시내를 관통하는 2차선 도로가 넓게 뚫려 있다. 강진읍의 사업을 가지고 가서 했던 사업이다. 강진읍은 좁은 2차선 도로가 예전 그대로 모습을 하고 있다.

정채균 군수의 가장 큰 치적중의 하나는 영랑로 왕복 4차선 도로를 기획한 것이였다. 지금의 강진공영버스터미널 아래쪽은 70년대 중반에 허허벌판이였다. 2차선 도로도 없던 시절 이곳에 4차선 도로를 놓겠다고 도시계획을 짠것은 당시로서는 무모한 일이 였다. 그러나 이 도로는 요즘 강진읍의 뼈대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강진읍의 큰 구도를 보았던 것이다.

이 도로는 영랑생가 앞까지 4차선으로 뚫려 남쪽에서 강진읍에 진입하는 차량들이 곧바로 군청앞까지 직행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정군수 부임후 강진의 변화가 크게 눈에 띠자 완도와 해남, 장흥주민들은 자기지역 군청앞에서 “왜 우리군수는 강진의 군수처럼 하지 않느냐”고 데모를 벌이는 사태도 일어났다고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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