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새마을운동 본격 시작

71~77년까지 14억1천700만원 투입
정부지원금 2억7천여만원까지만 지원
11억3천800만원은 주민 자부담으로

1976년 8월 강진경찰서앞~강진읍조합 구간의 하수도 개수공사를 하고 있다. 기존 시설을 완전히 철거하고 철골콘크리트 시공을 하였으며 도로포장도 동시에 보수한 공사였다.<사진= 고동치는 강진, 도읍가꾸기. 1976년. 강진군발행>
60년대가 가고 대망의 70년대가 왔다. 70년대는 새마을운동과 식량증산이라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시기다. 농촌의 모양이 급변했고, 그 속에서 주민들은 어느때 보다 열심히 살았다. 6.25 전쟁과 60년대 큰 가뭄을 겪으며 농촌에서 사는 것을 큰 부담으로 느꼈던 사람들이 나도 열심히 하면 잘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강진에서 새마을운동은 크게 3기로 나누어져 진행됐다. 71년부터 73년까지는 기반조성기로 정하고 기초환경정비와 새마을정신의 개발에 힘썼고, 74년부터 76년까지는 자조발전기로 정하고 생산기반확립과 범군민운동으로 확대발전시켰으며, 77년부터 81년까지는 자립완성기로 삼고 새마을운동의 생활화와 복지분야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강진향토지. 257페이지 참조>

강진향토지에는 당시 새마을운동의 사례가 몇건 소개돼 있는데 군동 신리마을을 사례를 살펴보자. 신리마을은 51호 311명이 살고 있었는데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로 가난하고 낙후된 마을의 전형이였다. 빈번한 한해와 주민들의 과분한 소비성향, 노름과 음주등으로 발전은 커녕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유산마져 보존하지 못하는 실정이였다.

이러한 시기에 전국적으로 새마을 운동이 불붙고 있었다. 신리마을에는 오동석이라는 주민이 있었다. 그는 가난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못하고 목공을 배워서 다른 마을에까지 목공일을 해주던 이유때문에 다른 마을의 잘사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오동석은 우리마을도 잘살아보자며 새마을운동지도자가 되어 발벗고 새마을운동에 뛰어들었다.

연 인원 1백만9천여명 참여
1만2천25개 사업 속속 진행
명실공히‘새마을’속속 탄생


1975년 어느날 강진군청에서 새마을운동 유공자들을 시상하고 있다.<사진= 강진군향토지. 1978년. 강진군발행>
처음에는 61년도에 자조근로사업으로 시작했다가 버려 두었던 소류지를 72년 1월에 군비보다 30만원, 자체부담 20만원을 투입해 완전히 보수해서 천수답 4㏊의 농업용수를 해결했다. 그 다음에는 농로 800m를 개설하여 영농의 편리성을 높혔고 73년도에는 마을 출신의 재일동포 김상수씨의 도움을 받아 전화사업을 완성했으며, 지도자 사비 4만7천원을 들여 방송시설을 하며 마을주민들의 계몽에 힘쓰는 한편 74년도에는 16평의 마을회관을 건립해 마을 공동 시설을 완결지었다. 특히 방송을 통해 아침마다 마을 헌장을 전 마을주민들에게 낭독해 줌으로서 정신혁명에 힘써왔다는 대목도 눈에 띤다.

이어 소득사업으로 객토사업을 벌이고 31평의 창고를 건립했으며 퇴비증산 및 우수보리 종자를 보급한데 이어 마을에 돼지 200두를 입식해 주민들의 소득창출 구조를 만들었다. 또 지도자 자신의 목공기술을 이용해 51가구에 이르는 마을 주택의 지붕을 모두 개량했으며 도색도 아름답게 끝마쳤다. 마을뒤 수원을 보건소의 타당성 조사를 받아 간이상수도시설도 완료함으로서 신리마을은 명실상부한 새마을이 됐다.

요즘 시대에 볼 때 일부 내용이 웃음까지 자아내기도 하지만 당시 강진의 주민들은 새마을을 만들어 보기위해 엄청난 일들을 했다. 강진군에서 72년부터 6년간 진행된 새마을운동 내용을 보면 생산소득기반사업 5,126개소, 공동이용시설 1,341개소, 복지환경사업 5,558개소에 총 사업비가 14억1천700만원이 들어갔다.
 
참여한 연 인원은 1백만9천여명에 달했다. 새마을운동 사업비 구성을 보면 주민들의 자담도 적지 않았다. 투입된 총 사업비 14억7천700만원중에 정부지원금은 2억7천여만에 불과했고, 나머지 11억3천800만원은 주민들이 스스로 부담한 것이였다. 여기에 연인원이 100만명 이상이 투입됐으니까 주민들은 돈을 부담하고, 노동력을 투입해 그 엄청난 공사들을 해냈던 것이다.  

몇가지 여담으로 들어가 보자. 60·70년대 농촌의 큰 변화를 꼽으라면 지붕개량을 꼽을 수 있다. 6.25 전쟁이 끝나고 대도시를 중심으로 지붕개량 운동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농촌지역 지붕개량은 66년 7월에 ‘농어촌 지붕개량 촉진법’이 만들어 지고 나서부터다. 정부는 다음해 5월 10년내 초가지붕을 기와등으로 개량하기위해 농협을 통해 농가 1호당 지붕개량 소요액의 50%인 1만원을 연 9%로 융자해 주기로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지방순시를 할 때면 “고속도로 주변 초가집 지붕을 빨리 바꾸라”고 지시하곤 했다. 공무원들이 가만히 있을리 없었다. 주겠다던 융자금은 주지 않으면서 빨리 지붕을 개량하라고 재촉했다. 고속도로 주변 주민들이 묘안을 짜냈다. 초가지붕을 그대로 남겨둔 채 고속도로에서 보이는 쪽만 기와나 스레이트를 씌운 것이다. 70년대 초에 경부고속도로가 지나는 충청도와 경북지역에 그런 집이 많았다.  

당시 정부는 호남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를 놓고 두가지 정책을 내놓는다. 호남고속도로주변은 주변 농토의 경지정리에, 경부고속도로 주변은 지붕개량에 예산을 집중했다. 71년 4월 24일 김보현농림부장관이 고속도로주변 개발계획을 발표했는데 호남고속도로에는 경지정리비용으로 87억을, 경부고속도로 주변은 지방개량비용으로 11억6천만원을 배정했다.

1975년 주민들이 양수기를 닦고 손질하고 있다. 양수기 손질은 일반주민들도 참여했다.
당시 호남고속도로 주변 개발 예산이 많다고 비꼰 사람들은 “호남고속도로의 길이가 80㎞로 경부고속도로의 5분의 1도 안되는데 돈을 일곱배나 많이 주었다”고 주장했다. 전남지역에 본격적인 지붕개량이 시작된 것은 70년대 초 였다. 강진에도 건축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도로 주변 마을이 우선 지붕개량 대상이 됐다. 1973년 어느날 군동면의 한 마을. 마을 담당공무원인 김모씨가 지붕개량을 해야한다고 마을주민들을 설득했다.

당시만해도 강진지역 상당수 마을이 마을 진입로 마저 샛길인 곳이 많았다. 지붕개량을 위해서는 자재를 싣고 들어가야 하는데 그런 준비도 안돼 있던 것이다. 담당공무원이 지붕개량의 필요성을 설명하면서 낮은 초가지붕에 손을 쑥 넣었다. 그랬더니 물컹한게 손에 잡혔다. 깜짝 놀란 공무원이 그것을 잡고 휙 뺐더니 커다란 황구렁이가 따라 나왔다. 집을 지킨다는 구렁이였다.

소스라치게 놀란 공무원이 지붕개량 설명을 하다말고 돌아가 버렸다. 초가집은 그렇게 수백년 동안 주민과 생물이 함께 공존한 공간이였던것이다. 그 마을도 훗날 지붕개량에 나서 온 마을이 기와와 스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었다. 아마도 집을 지키던 구렁이는 살길을 찾아 다른 곳으로 거쳐를 옮겼을 것이다.

가뭄을 극복하는데 필수도구였던 양수기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도 많다. 1968년과 69년 엄청난 한해를 겪은 박정희 대통령은 70년대로 접어 들면서 가뭄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양수기 확보가 시급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는 저수지 개발이나 관정보급이 거의 되지 않았을 때다.

69년 처음으로 연리 9%, 1년거치 4년 분할조건으로 양수기 구매자금을 전액 융자로 보급하는 제도가 도입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상당히 높은 금리지만 그 전까지는 본인부담이 40%에 달해 현금이 없는 농민들이 양수기를 구입할 수 없는 형편이였다.

한편으로 정부는 68년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일본에서 2천여대의 양수기를 도입한데 이어 70년대 들어서는 농업원조차관이 들어오면 우선적으로 양수기를 구입하는데 투입하는등 양수기 보급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렇게 해서 70년대 초까지 강진에도 각 면사무소에 일제 양수기와 국산 대동양수기가 20~30대씩 보급돼 만일의 한해 사태에 대비했다.

강진읍사무소에는 40대가 넘은 양수기가 있었다. 가뭄이 들면 이 양수기들이 2단, 3단, 4단 양수를 해서 멀리 있는 곳까지 물을 보냈다. 그런데 문제는 양수기가 제대로 작동을 하느냐 하는 것이였다. 정부가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모아 보급한 양수기의 상당부분이 성능미약과 관리부실로 방치되고 있었다.

72년 3월 정부가 전국 시군에 공급한 양수기 3만5천대를 조사한 결과 14%인 4천여대가 관리부실로 다시 손질하지 않고는 쓸 수 없는 상태였다(동아일보 72년 3월 14일자 참조). 실제 불량은 이 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1975년 주민들이 양수기를 닦고 손질하고 있다. 양수기 손질은 일반주민들도 참여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다음해 6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이례적이였다. 전국 양수기를 일제 점검하도록 특별지시를 내린 것이다. 당시 박대통령의 특별지시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통치 행위였다. 박대통령의 특별지시가 각 중앙일간지의 1면 톱기사를 장식했을 정도다.

박대통령은 “농업생산증강을 위해서는 농업용수 문제의 해결이 가장 중요하다. 이를 위해 모든 농민과 행정기관은 한발이 들기전부터 미리미리 유비무환의 정신을 발휘해서 양수기를 점검해 두고 그 사용방법을 완전히 갖추도록 하라”고 특별지시했다.

전국에 양수기 점검 열풍이 불었다.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즉각적으로 꾸려진 점검반에는 감사원감사관, 청와대사정특별보좌관실요원, 청와대민정비서실요원, 현역군인등이 포함됐다. 또 청와대는 각 시도가 책임아래 정비를 끝내도록 지시하고, 감사도 병행했다.

72년 내무 부감사에서 14명의 군수가 양수기 관리를 잘 하지 못해 직위해제되는 대란을 겪었다. 이정도면 시장 군수들이 양수기 관리에 모든 것을 걸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였다. 각 읍면사무소에서는 창고에 양수기를 보관하면서 개인당 한 대 꼴로 책임관리를 하게 했다. 닦고, 조이고, 칠하고 한 것은 기본이였고, 무엇보다 양수기가 정상적으로 가동을 해야 했다.

하루에도 몇차례씩 시험가동이 이뤄졌다. 양수기의 무게가 보통이 아니여서 한번 이동하려면 어른 네다섯명이 힘을 써야 했다. 양수기 감사는 수시로 진행됐다. 전남도 감사관들과 군 보안대 군인들이 불쑥 내려와 양수기를 하나 찍었다. 돌려보라는 신호였다. 그때 돌아야 도는 것이였다.

그런데 전날까지 잘 돌던 양수기가 이상하게 감사관 앞에서는 꿈쩍하지 않을때가 많았다. 며칠씩 양수기를 닦고 조이며 관리하던 공이 완전히 헛수고가 됐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징계는 징계대로 당했다. 성격이 못된 감사관은 담당공무원을 발로 걷어찼다. 그게 통하는 시대였다. 그래서 강진군 공무원들 사이에 유행가가 생겼다. 양수기를 닦고 조이며 부르던 노래다.

‘한 많은 양수기야~ 변함없이 잘 돌아라~ 감사관이 오거들랑 쉬지말고 자알 돌아라’ 대중가요 ‘한 많은 대동강아’를 개사해서 부른 노래다. 양수기가 그만큼 공무원들을 괴롭혔던 시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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