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내려와 병풍바위, 비둘기바위에서 노닐다

보통학교 2년 휴학, 배재학당 갈 때도 2년 쉬어
영랑선생과 한 살 차이, 학업은 4년이나 늦어져

강진읍 보은산 중턱 등산로 근처에 있는 구암정이란 정자와 그 아래쪽에 있는 비둘기 바위의 모습이다. 구암정은 최근에 지었고, 그 아래에 비둘기 바위는 현구와 영랑선생들이 노닐었던 바위다. 지금은 소나무 때문에 전망이 가려있지만 예전에는 강진읍과 강진만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는 곳이였다.
현구선생은 1918년 강진동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생활기록부에 따르면 초등학교 시절 저학년때 보다는 고학년으로 갈수록 성적이 좋아졌으며, 교과목 중에서도 수신과 국어, 체육, 창가 과목의 성적이 우수했다고 한다. 국어와 창가과목을 좋아한 것은 우연의 일치였는지 모르지만, 그의 시적 서정을 일찍이 보여준 대목으로 보인다.

현구선생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2년 후인 1920년 서울의 배재학당에 입학한다. 영랑 김윤식 선생이 서울로 올라가 휘문의숙에 입학한지 3년 후였다. 여기서 우리는 현구와 영랑의 인생의 대비를 조금씩 볼 수 있다. 현구와 영랑은 나이가 한 살 차이이지만 초등학교 졸업 연도가 3년이나 차이가 난다. 영랑은 강진관립보통학교를 13세때인 1915년 졸업했다. 그리고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관서제에서 함께 공부했던 영랑이 서울에서 영어를 배우고 있을 때 현구는 초등학교를 한창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구조는 두 사람간에 어떤 경쟁체계를 부추겼을지 모를 일이다. 1919년 영랑은 휘문의숙을 다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4.4 강진만세운동을 도모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오지만, 현구는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가 영랑이 고향으로 내려와 독립운동을 하다 구속된지 다음해 엘리트들이 들어갔던 서울 배재학당에 입학을 했다. 그러다가 1921년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배재학당을 중퇴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현구가 강진 고향에 내려왔을 때 영랑은 이미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 학원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해 이제는 일본에서 유학중인 용아 박용철을 비롯한 한국인 문학도들을 만나고 있었다.<이승원 ‘영랑을 만나다’ 태학사 참조>

영랑이 튼튼한 재력을 바탕으로 중단없는 달리기를 하고 있을 때 현구는 보통학교를 다닐대 2년간 요즘말로 휴학을 했고, 다시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에 배재학당에 들어가기까지 2년간의 터울이 있었으며, 뒤늦게 올라간 배재학당마저 중단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현구집안의 재정형편과 함께 현구 스스로 어떤 심각한 정신적 혼란이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을 하게하는 대목이다.

고향으로 내려 온 현구는 강진읍 서문마을 뒤편 보은산에 있는 병풍바위와 비둘기바위등을 벗삼아 습작생활을 했다고 한다. 비둘기바위와 병풍바위는 강진읍 주민들에게 보은산을 상징하는 바위로 여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소나무들이 우거져 전망이 없지만 예전에는 이곳에 올라가면 강진읍내와 강진만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놀이터라는게 없었기 때문에 강진읍의 왠만한 아이들이 이곳 비둘기 바위와 병풍바위등에서 놀았다.

현구(玄鳩)선생의 구자는 비둘기구자다. 자신의 호에도 비둘기바위의 추억을 포함시켰던 것이다. 병풍바위는 비둘기바위에서 서쪽으로 50여m 떨어져 있는 곳에 있다. 영랑선생도 유년기에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뒷산에 있는 병풍바위나 비둘기 바위, 집 주위의 감나무 밭이나 동백 숲을 놀이터로 삼아 성장했다.(박노균, ‘김영랑’, 건국대학교 출판부 참조)

비둘기바위는 1919년 4월 4일 정오 김후식이란 주민이 초대형 태극기를 세워 강진 독립 만세운동의 시작을 알린 곳이다. 이 때문에 비둘기바위는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로 지정돼 종종 항일유적지 탐방단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70년대 중반까지 군청뒷편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겨울이 되면 그 연못이 꽁꽁 얼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아이들이 나무토막으로 공을 만들어 요즘 같으면 아이스하키같은 놀이를 많이 했다. 아이들의 겨울철 놀이 동선은 뒷산 기차바위에서 돌다가 비둘기바위로 옮겨 놀았고, 이어 연못으로 이동해 아이스하키를 하는게 정해진 코스였다.<탐동 주민 김두식씨 증언>

현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어릴적 놀았던 비둘기 바위를 잊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배재학당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와 다시 비둘기바위와 병풍바위에 올라가 시를 썼다. 다니던 학교를 중단하고 내려와 옛 어릴적 놀이터에서 시를 쓰는 시인의 마음이 참 쓸쓸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수 없다.

현구가 배재학당을 그만두고 내려온 시기는 어느 봄철이였다. 현구는 비가 오지 않으면 매일같이 보은산 기슭 병풍바위를 찾아갔다. 아지랑이와 솔바람을 벗삼아 팔을 괴고 창공에 흐르는 흰 구름과 더불어 명상에 잠기고 종달새의 자장가를 들으면서 꿈나라를 거니는 것이 그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스러운 시간이였는지 모른다.

고독과 명상이 이 시절 현구의 생활 전체였을 것이고, 오염된 세파를 혐오하고 대자연과 융합하며 인간을 사색하고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담지하려는 노력이 현구 생활에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었다.<차부진 선생 글 인용> 그러나 현구의 병풍바위 시작활동도 오래는 가지 않았다. 현구는 고향에 내려온지 1년만에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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